소설리스트

화산파 공녀님 (79)화 (79/123)

#79.

요즘 들어서는 어쩐지 왕왕 일어나는 일이 되었지만, 샬롯은 아직도 제 주변에서 일어나는 어떤 사건을 누군가가 대신 해결해 준다는 것에 익숙해지지 않았다.

줄곧 제가 처음부터 끝까지 뭔가를 해결해야만 했던 그 시절이 너무 길었다.

카밀라는 부드러운 주홍색 눈동자로 샬롯을 바라보며 담담히 물었다.

“우리 손녀께선, 즐거운 가출이었나?”

모든 것은 카밀라의 귀에 들어가니까, 모르리라곤 생각하지 않았다. 하지만 생각보다는 훨씬 부드러운 추궁이었다.

샬롯은 제 옆에서 딱딱하게 굳어 선 베티가 어쩔 줄 모르고 손을 떠는 것을 보며 작게 웃었다.

아니면, 그냥 제가 카밀라 가주를 좀 더 편안하게 여기게 된 것뿐일지도 모른다.

어제의 대화 이후로.

“네.”

“기왕 가출한 김에, 사나흘은 할 줄 알았더니. 생각보다 내 손녀가 간이 작구나.”

아무리 생각해도 비꼬는 말로 들리는지, 주변 사람들은 자꾸 걱정되는 낯빛으로 샬롯을 바라봤다.

하지만 샬롯은 카밀라의 그런 어투가 상냥하기 짝이 없다고 생각했다.

자꾸 손녀라고 불러 주는 것도, 꽤 마음에 들었다.

“퍼레이드에 참여하고 싶어서요. 기왕 우승한 거, 좀 귀찮더라도 우승한 기분을 좀 내보기로 했어요.”

“하하, 그랬구나.”

카밀라는 샬롯의 대답이 마음에 드는지 호방하게 웃음을 터뜨렸다.

주위 식솔들이 다 눈이 휘둥그레져서는 그런 두 사람을 번갈아 보았다.

카밀라의 모든 손자가 카밀라를 대할 때는 항상 제 할머니의 권위 앞에서 딱딱하게 굳어서 긴장해 있는 게 보통이었고, 카밀라도 그런 제 손자들에게 항상 필요한 말만 전달하고 사무적으로 대했다.

애초에 가족들과 긴 시간을 보낼 수 있는 그녀도 아니었고.

그래서 이렇게 카밀라를 향해 두려움 없이 대하는 손녀도, 진심으로 재미있다는 듯 웃는 카밀라를 보는 것도 처음이었다.

“곧 출발할 테니, 마차에 타자꾸나. 그보다, 아직, 조금 시간이 남았는데. 요제프 황자님께선 어떻게, 시간이 좀 있으신지요.”

이번의 말에는 식솔들도 놀랐지만, 샬롯도 놀랐다.

제가 카밀라에게 요제프와 리카르도에 관한 생각을 재고해 달라고 청한 것은 맞지만, 카밀라가 이렇게까지 뭔가 본격적으로 빠르게 행동에 나서리라고 생각해 보진 않았으니까.

그래서인지, 다른 이유에선지는 모르지만…….

어쨌든 카밀라가 요제프에게 말을 거는 걸 보는 건 분명 처음이었고, 다른 이유를 생각하기 어려웠다.

‘내, 내가 다 긴장돼.’

샬롯이 어쩔 줄을 모르고 낯을 굳히는데, 요제프는 샬롯을 흘끗 바라보곤 카밀라를 향해 아무렇지도 않게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내게 할 말이 있는 모양이군. 좋아, 언제든 시간을 내어 드리지.”

아직 앳된 목소리임에는 분명했지만, 요제프가 평소와 다름없게 대답하는 목소리에는 이상하리만큼 여유가 있었다.

옛날, 샤를로테와 요제프가 처음 만났을 때와는 전혀 다른 사람 같을 정도로.

카밀라는, 샬롯을 흘끗 돌아보곤 요제프 황자를 돌아보았다.

제아무리 그녀가 세티야 가 가주라고는 하나, 요제프 황자와 단둘이 밀실에 들어간다면 호위 기사 둘이 따라붙을 게 당연했다.

차라리 이렇게 탁 트인 공간에서 대화를 주고받는 게 오히려 더 밀담하기에는 편리했다.

게다가 아직, 카밀라는 요제프 황자와 그렇게까지 대단한 친분을 가진 사이로 보이고 싶지 않기도 했고.

그리고 요제프 황자는 그런 그녀의 의도를 얼추 짐작한 듯 보였다.

“뭐, 얼마나 대단한 각오로 시작한 일이신지는 모르겠습니다만, 샤를로테에게 그렇게 공식적인 자리에서 화관을 주기 전에 미리 상의를 좀 했으면 좋았을 것 같습니다.”

요제프 황자는 그 까만 눈으로 카밀라를 빤히 올려다봤다.

“그러면?”

“네?”

“그러면 카밀라 세티야 공작께서는, 샤를로테와 내 약혼을 기꺼이 허했을 건가?”

카밀라는 요제프의 새카만 눈동자를 들여다보았다.

물론, 대회에서 요제프의 무위를 보는 동안, 그저 소문과 같은 나약하고 멍청한 황자님은 아니라는 것을 알았다. 그리고 샬롯에게 화관을 내민 순간, 영악하다는 생각도 했다.

하지만, 여기까지는 생각하지 못했다.

샬롯을 돌아보는 요제프 황자의 눈동자 속에는, 뜻밖에 진지하고 청초한 어떤 작은…… 불꽃 같은 것이 있었다.

카밀라는 작게 숨을 삼켰다.

정치적 도구로 샤를로테를 이용하는 이 똑 부러지는 꼬맹이 황자님에게 경고를 해 둘 생각이었는데, 어쩌면 제 생각이 틀렸을지도 모르겠다.

정치적 도구가 아니라…….

“……샤를로테에게 진심이신 것처럼 보이는군요. 맞습니까?”

요제프 황자는 대답하는 대신 그녀를 빤히 올려다보았다.

“세티야 공작, 그대가 걱정할 일은 만들지 않도록 하겠다.”

카밀라는 조금 허탈하게 미소 지었다.

요제프 황자가, 샬롯과의 약혼을 빌미로 그를 좀 밀어 달라고 한다면 저도 할 말이 있겠지만…….

저렇게까지 딱 부러지게 알아서 하겠다고 해 버리면, 오히려 할 말이 없다.

“어떻게, 황자 전하께선 어디까지 욕심이 있으신지요?”

요제프가 제법 의외라는 얼굴로 카밀라를 올려다보았다.

“그런 질문을 카밀라 공작에게 들으리라곤, 생각도 못 해 봤는데.”

“저야말로, 이런 질문을 황자님께 드리게 되리라곤 생각지도 못해 봤습니다만. 요즘 주변이 시끄러워서 말입니다.”

“……나는, 아까도 말했지만, 샬롯에게 해가 될 일은 하고 싶지 않아.”

“그건, 권력에서는 물러나겠다는 말씀이신지요?”

요제프가 카밀라를 뚫어져라 바라보며 말했다.

“내가, 권력에서 물러난다면 어떻게 될지 알면서, 그런 말을 하는 건가?”

카밀라는 이번에야말로 쓰게 웃었다.

‘3황자가 권력에서 물러나면, 그땐 지금까지보다 더 물어뜯기겠지. 다시는 일어나지 못하도록, 철저히.’

제 처지를 잘 파악하고 있는 줄이야 알았지만, 저렇게까지 객관적으로 말해 버리면 정말로 그녀가 할 말이 없었다.

‘……권력에 욕심이 있다는 말을 이런 식으로 할 줄이야.’

요제프 황자가 뜻이 있다면, 또 여러 가지로 골치 아픈 이야기가 많아진다.

카밀라는 관자놀이를 누르며 입을 다물었다가 긴 침묵 끝에, 아예 다른 이야기를 꺼냈다.

“그러고 보니, 혹시 세레스 국의 샬레스 황녀 전하와는 아는 사입니까?”

“……누구? 샬레스?”

“네.”

“모르지는 않지만, 안다고도 못 하지. 그냥 이름만 서로 아는 사이 아닌가 싶은데.”

“그분께서, 요제프 황자님을 뵈러 오늘 황성 연회에 참석하신다고 하더군요.”

요제프는 전혀 앞뒤가 짐작되지 않는 이야기라는 듯, 눈살을 가볍게 찌푸렸다.

* * *

과거 카밀라는커녕, 샬롯 그녀와도 제대로 대화를 하지 않으려 했었던 요제프는 마치 보이지 않는 벽으로 스스로를 가둔 정말 어린아이처럼 보였는데.

‘……뭔가, 요제프가 너무 많이 자란 느낌이야. 착각일까?’

샬롯이 혼자 그런 생각을 하는 사이에, 카밀라와 요제프는 이미 그녀를 등지고 뭔가 대화를 나누며 멀어져 가고 있었다.

샬롯은 둘이 무슨 이야기를 하는지 궁금하기 짝이 없었다.

점점 더 멀어지면서도, 카밀라는 자꾸 저를 힐끗거리며 뭔가를 다짐받듯이 이야기를 하고 있었고, 요제프도 카밀라와 이야기를 하면서도 이상하리만큼 자주 저를 돌아보았다.

‘……대체 뭐야.’

기를 운용하면, 대화를 엿듣는 것 정도는 그리 어려운 일은 아닐 거다.

하지만 제게 해를 끼치는 사람의 대화도 아니고, 제가 아끼는 사람들의 대화를 엿듣는 건 어딘가 좀 죄책감이 느껴졌다.

샬롯이 입을 비죽거리며 나중에 요제프에게 물어봐야겠다고 생각을 고쳐먹는 순간, 바람을 타고 대화 중 몇 단어가 그녀의 귀로 흘러 들어왔다.

“……샬레스…… 세레스 국…… 황녀…… 정치적…… 의향을…….”

‘샬레스 황녀? 소설의 여주인공……?’

샬롯은 제 입을 가볍게 가렸다.

꽤 미래에나 등장할 거라 생각했던 인물이, 벌써 등장할 줄은 몰랐다. 원작에서는 요제프가 장성한 시점에서 만나게 된다고 나오니까.

‘내가 본 게 잘못 본 게 아니었어.’

칼 그림자의 날, 분명 세레스 국 황족 특유의 머리카락 색을 봤다고 생각했는데, 워낙 정신이 없던 차에 제롬이 말까지 거는 바람에 그 모습을 놓쳐 버리고 말았었는데.

‘샬레스 황녀가 요제프 황자를 알아봤을까?’

원작에서도 그렇듯.

요제프가 칼 그림자의 날에서 승리하는 시기가 빨라지면서, 샬레스 황녀의 집착이 시작되는 시점도 바뀌었을까?

전혀 이상한 이야기는 아니었다.

흔히 로맨스 소설에서는 운명에 대한 이야기를 꼭 하니까.

결국 만나게 될 사랑이라면, 언제고 만나게 될 거다.

그런 확신이 들었다.

그냥 조연이 아니라, 두 명은 소설 속의 주인공이었으니까.

‘먼저 연락 안 해도 만날 수 있겠네. 잘됐다.’

샬롯은 눈을 반짝였다.

샬레스 황녀와는 언제고 꼭 이야기를 나눠 보고 싶었다.

솔직히 그녀에게 제공할 정보도 많았고, 그 대가로 받아 내고 싶은 것도 많았으니까.

그런데 이렇게 접근할 기회가 생긴다면 기쁜 일이었다.

‘……근데 만약 샬레스 황녀와 요제프가 원작대로 잘된다면? 그러면 요제프에게 받은 청혼은, 그냥 해프닝으로 지나가는 걸까?’

샬롯은 제 심장 위에 손을 얹고 고개를 한쪽으로 갸웃 기울였다.

원작에서 샬레스 황녀는 정말 요제프를 지극정성으로 사랑하고 돌봤다.

요제프는 성인이 되어서도 자주 쓰러지고, 또 가끔은 이지를 잃어버릴 정도로 괴로워하기도 했다.

샬레스 황녀는 그런 요제프에게 온갖 신관을 다 붙여 가며 돌봤고, 사랑을 위해 체이커 제국을 통째로 정벌할 정도로 제 사랑에 확신이 있었다.

그런 샬레스 황녀라면 이번에도 요제프에게 빠질 것만 같아서…….

‘……만약 그렇게 된다면.’

샬롯은 생각에 잠겨 고개를 길게 기울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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