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3.
“……그런 게 아니라…….”
“나도 샤를로테, 그대가 마음에 들어. 대회도 멋있었고. 그런데, 지금 요제프 황자를 옆에 끼고 나한테 고백한 거야? 맞아?”
아니. 아니다.
이걸 들을 대상도 잘못됐고, 분위기도 잘못됐고, 모든 게 잘못됐다.
샬롯이 당황해서 양손을 허공에 내저었다.
그때, 가만히 서 있기만 하던 요제프가 샬롯을 슬쩍 끌어당기며 그녀를 샬레스 황녀의 시선으로부터 가리듯 몸으로 막아섰다.
“나한테 볼일이 있는 줄 알았는데.”
샬롯은 아까보다 한층 더 사나워진 그의 말투가 조금 의외라 눈을 동그랗게 떴다.
요제프가 이렇게 대놓고 적의를 드러내는 경우는 참 드문데.
문득 샬롯은 쓸데없이 길어지는 대화에 자신들 세 사람에게 점점 더 시선이 모여드는 것을 느꼈다.
샬롯은 어쩔 수 없이 요제프를 직접 끌다시피 해서 먼저 테라스 쪽으로 향했다. 샬레스 황녀가 요제프에게 무슨 볼일이 있든, 이렇게 사람들의 이목이 쏠린 곳에서 이야기할 수는 없을 터였다.
게다가 그녀 역시 샬레스 황녀에게 좀 해 두고 싶은 이야기가 있었고.
결국, 샬롯의 주도로 세 사람은 듣는 사람이 없는 테라스의 작은 테이블에 옹기종기 모여 앉았다.
가장 먼저 입을 뗀 건, 샬레스 황녀였다.
“단도직입적으로 말하지. 우리 어마마마께선, 요제프 황자에게 투자를 하고 싶어 하셔. 힘을 실어 주고 싶다는 이야기지.”
외국의 세력을 끌어들이는 것에 대해, 자신은 마음을 정했지만, 요제프는 어떻게 생각할지 궁금해서.
“필요 없어.”
하지만 호기심을 갖는 것보다 먼저, 요제프가 단칼에 제안을 잘라 버렸다.
샬레스 황녀가 눈살을 찌푸렸다.
“……뭐?”
“필요 없다고.”
“……그게 대답이야? 리카르도 황자에게, 네가 얼마나 비견도 안 될 세력을 가졌는지는 알고 대답하는 거지?”
“그래. 이게 대 대답이야.”
요제프는 대화를 그렇게 잘라 내 버렸다. 그러곤 일어나려는지 의자를 뒤로 밀었다.
샬롯은 다급하게 요제프의 의자를 붙들었다.
“일단, 기다려 봐, 요제프.”
“왜?”
요제프가 제 말에 이렇게 이유를 묻는 일은 잘 없는데.
샬롯은 요제프가 뭔가 불만에 찬 얼굴을 한 것 같다고 생각하며 그의 의자가 아니라 손을 고쳐 쥐었다.
요제프는 그제야 고삐를 잡힌 아슬란처럼, 어쩔 수 없다는 얼굴로 손잡이를 짚고 있던 손에서 힘을 뺐다.
샬롯은 좀 안심해서, 샬레스 황녀에게 고개를 돌렸다.
꼭 해 두고 싶은 말이 있었는데, 지금 만한 기회를 다시 포착하기는 쉽지 않을 것 같았다.
“샬레스 황녀 전하.”
“응. 근데, 말 놔도 괜찮아. 요제프 황자와도 반말하는 사이인 것 같고. 나도 그대가 마음에 들고.”
샬롯은 고압적인 샬레스 황녀의 성격을 책으로 읽어서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이게 얼마나 자신에게 파격적인 대우인지도 잘 알았다.
보통은 감히 받아들이지 못할 제안이었지만, 샬롯은 마침 불편하던 차에 냉큼 샬레스 황녀의 제안을 받아들여 버렸다.
“응. 알았어. 그럼, 나 진짜 말 놓는다?”
“……어머, 얘 정말 시원시원하네.”
샬레스 황녀의 하늘빛 눈동자가 점점 흥미로 가득 물들었다.
샬롯은 샬레스 황녀를 만나면 해 두려고 생각했던 이야기를 머릿속에서 최대한 빠르게 정리한 다음, 입을 열었다.
“네 숙부가, 널 배신할 거야.”
대뜸 튀어나온 제 집안 이야기에 샬레스가 눈살을 있는 대로 찌푸렸다.
샬롯은 얼른 말을 이었다.
“결과적으로야 반란이 진압되겠지만, 네 숙부가 일으킨 반란 때문에 세레스의 내정이 꽤 오래 혼란에 빠질 거야. 돌아가서, 즉시 네 숙부의 비서 라프탄의 첫째 부인을 찾아가. 그녀라면 모든 걸 털어놓을 테니까.”
세레스 제국이 비탄에 빠진다고 해서, 체이커가 그 나라를 넘볼 만큼 국력이 쇠하지도 않았다.
그저 황족끼리의 집안싸움이 잠깐 있을 뿐이다.
그런 거라면, 미리 알려 줘서 빚을 지게 하자는 게 샬롯의 생각이었다.
샬레스 황녀가 순간적으로 제 호위 기사들의 위치를 눈으로 살피더니 다시 샬롯을 바라봤다.
“……너, 이거 농담이면 진짜 재미없을 줄 알아.”
샬롯은 아무렇지도 않게 고개를 끄덕였다.
샬레스 황녀는 손톱을 깨물며 다시 한번 주위를 살피곤 차갑게 가라앉은 눈으로 샬롯을 바라보았다.
분홍색 머리를 사탕처럼 묶고 있는 꼬마는 그저 귀엽고 사랑스럽기만 한데. 어쩜 이렇게 반전 매력이 가득한지 몰랐다.
저런 조그마한 손발로 그 쟁쟁한 사람들이 다 출전한 대회에서 우승을 거두질 않나, 고백을 받은 것만으로 눈물을 펑펑 쏟던 그 귀여운 얼굴로 이런 말도 안 되는 남의 나라 황실의 속사정 이야기를 하질 않나.
‘……레임 숙부가 그리 믿을 자는 못 된다고 생각하고 있었지만, 어떻게 우리조차 모르는 이야기를 저 아이가.’
솔직히 백 퍼센트 믿는 건 아니었지만, 칼그림자의 날 최종 우승자인 대단한 실력자가 타국의 황녀인 자신을 붙들고 다짜고짜 이런 말도 안 되는 허풍을 늘어놓을 이유가 있을까.
“……그게 정말이면, 어떻게 아는 거지?”
샬롯은 어깨를 으쓱했다.
그러곤 언제부터인가 얌전히 이 대화를 경청하고 있는 요제프의 어깨를 손으로 톡톡 두드리며 속삭였다.
“황녀 전하의 어마마마께서 보시는 눈이 있으시단 뜻이 아닐까, 요제프 황자 전하를 밀어 주기로 했다는 건?”
‘요제프 황자에게 그런 정보력이 있다고?’
샬레스 황녀는 요제프 황자를 살폈지만, 그의 기색은 아무리 봐도 저와 대화하고 싶어 하는 눈치가 아니었다.
그런 대단한 정보력이 있는 것처럼도, 그런 정보력을 활용하고 있다고도 보이지 않았다.
그렇다면 역시 샬롯 개인의 정보라는 건데.
흔히 있는 이야기다.
황족에게 충성을 맹세한 이가 공을 돌리는 건.
샬레스 황녀도 황녀로 살아오며 많이 겪어 봤던 일이고.
‘……뭐가, 어떻게 돌아가는 건진 모르겠지만, 샤를로테가 요제프 황자와 그저 그런 약혼 관계가 아니라는 건 알겠군.’
샬레스 황녀는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샤를로테가 제 가문의 이름을 걸고 참석한 이 궁정 연회에서, 제게 말도 안 되는 허풍을 지껄이는 머저리인지. 아니면 정말로 제가 숙부의 음험한 장난질을 모르는 멍청이인지.
어느 쪽이든 지금 당장 알아내지 않고서는 배길 수 없게 궁금했으니까.
“나는 사람을 좀 보낼 일이 있어서, 먼저 일어나지.”
“그래. 다음에 또 만나.”
“그래. 다음에 또.”
샬레스 황녀는 그 자리에 샤를로테와 둘만 있는 것처럼 그녀에게 윙크를 남기고선 우아한 걸음으로 테라스를 떠났다.
샬롯은 멀어지는 샬레스 황녀의 치맛자락을 바라보며 묘한 감상을 곱씹었다.
‘……아직 어릴 때 만나서, 둘 사이에 아무 감정이 없는 건가 봐. 소설 속의 내용처럼 스물이 넘어서 만나야 하는 걸까?’
뭐가, 어떻게 되었든 빚지고는 못 사는 의리파인 샬레스 황녀에게 정보를 빨리 흘려 둘 수 있었던 건 다행이었다. 사건이 일어난 뒤에 정보를 흘려 봤자 별로 감사를 들을 일이 못 되니까.
‘나중에 다 요제프가 황제가 되는 데 요긴한 인맥이 될 거야.’
샬롯이 흐뭇하게 웃는데, 줄곧 그녀의 손을 꼭 쥐고 있던 요제프의 시선이 느껴졌다.
“어?”
시선을 마주하자, 요제프의 검은 눈동자가 평소보다 따갑게 저를 바라보고 있었다. 다정하지만, 어딘가 추궁하는 기색이 섞여 있었다.
‘그러고 보니 요제프가 보기에, 내가 영 이상한 소릴 한 거겠지.’
다른 나라의 속내를 아주 잘 안다는 듯 얘기했으니까.
그것도 당사자인 황녀조차 모르는 정보에 대해서.
샬롯이 뭐라 변명을 할까 고민하는데, 요제프가 먼저 입을 열었다.
“열 명분의 가족이 되겠다며.”
“어?”
“그런 것치곤, 다른 사람의 가족이 되겠던데.”
“……어?”
샬롯은 요제프의 뚱한 시선을 받아 내다가, 문득 저도 모르게 입을 허물고 웃어 버렸다.
“까르르-.”
샬롯이 요제프의 손을 꼭 움켜쥐고 한참 동안 웃자, 요제프는 불만스레 눈썹을 구긴 채로도 그런 그녀의 모습을 끝까지 눈에 담았다.
“까르르. 하하. 지금 샬레스 황녀님을 질투하는 거야? 내가 너무 친해서?”
“……로테.”
“너무 귀엽다, 진짜. 오구오구.”
샬롯이 요제프의 머리를 마구잡이로 헝클여 놓았다.
요제프는 아까보다 더 불만이 가득한 얼굴이 되어 표정을 구겼지만, 샬롯의 손길을 피하지는 않았다.
* * *
황제와 황후가 입장하고, 이어서 리카르도 황자까지 입장하고 나자 연회의 분위기는 무르익을 대로 무르익었다.
그저 샬롯과 요제프를 응원하던 군중들과는 달리, 귀족들은 두 황자를 살피며 어느 쪽 세력에 붙으면 좋을지를 알아내려 황제의 눈치를 몹시 살폈다.
챙챙챙!
이르게 떠오른 손톱 달이 막 동쪽 하늘을 수놓을 무렵, 시종이 황제의 연설이 있음을 알리며 작은 종을 두드렸다.
산체스 황제는 모두의 주목을 받으며 황좌에서 일어서 잔을 높이 치켜들었다.
“오늘같이, 아름다운 밤. 재능 있는 젊은이들이 함께해 주는 것에 감사하오. 여러 나라의 사절들이 축하를 위해 방문해 준 자리이니만큼, 오늘은 특별히 내 재미있는 기획에 관해 이야기해 볼까 하오.”
오오오-.
귀족들의 기대 어린 목소리가 여기저기서 터져 나왔고, 산체스 황제의 잿빛 눈동자가, 제 옆자리에 선 황후를 살피듯 슬쩍 굴렀다.
“그건 바로, 세 명의 황자를 모두 정식으로 황태자 후보로 올려 앞으로 10년을 두고 경쟁시키고자 함이오.”
뜻밖에, 지나치게 직설적인 선포에 귀족들은 잔을 높이 쳐든 채로 그대로 굳어 섰다.
누구 하나 뭐라 반응하지 못하고 황제만을 바라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