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화산파 공녀님 (84)화 (84/123)

#84.

“그것참, 재밌겠군요.”

가장 먼저 툭 던져진 목소리는, 간신히 평정을 되찾은 황후의 목소리였다.

속내야 어찌 되었든, 그녀가 겉으로 할 수 있는 말은 그것뿐이었다.

하지만 황후의 목소리가 지난 뒤에도 다른 귀족들은 여전히 아무런 말도 하지 못하고 황제를 바라보고만 있었다.

황제가 세 명 황자의 대결을 정식으로 선포한 건 정말 여러 가지로 뜻깊은 일이었다.

샬롯은 겉으로 드러내지는 못했지만, 진심으로 그 선언을 환영했다.

그 순간, 연회장에 있는 귀족들이 서로의 눈치를 맹렬하게 보는 그 광경도 진심으로 환영이었다.

세월이 요제프를 황제로 만들어 주기 전에, 요제프가 스스로 발을 디뎌 황태자가 될 수 있는 첫 번째 관문이 드디어 열린 셈이었다.

* * *

기나긴 연회가 끝나고, 샬롯은 제롬과 러슬, 비야키와 함께 마차에 오르러 가다가 문득 요제프의 앞에서 발을 멈췄다.

검은 눈동자의 요제프가 가만히 서서 저를 바라보고 있는 게 어쩐지 마음에 걸렸다.

요제프는 오늘부터 궁에서 생활하게 되는 거다.

그는 썩 내키지 않는 얼굴이었지만, 황제가 이미 요제프를 황태자 후보로 발표한 이상 황궁에서 지내는 것도 그리 나쁜 선택지가 아니라는 생각이 든 모양이었다.

“언제든지 내 방에 놀러 와도 되니까, 그런 얼굴 하지 마.”

“언제든지라는 건, 얼마나지?”

“정말로 언제든지야.”

샬롯은 어쩐지 제게서 떨어지기 싫어하는 강아지를 억지로 떼어 놓는 기분이 들어서 작게 웃으며 요제프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하긴 그녀도 언제고 요제프를 만날 수 있는 가까운 거리에서 좀 멀어진다는 생각이 드니까 그렇게까지 내키는 일은 아니긴 했다.

손 안에서 포실포실 흔들리는 머리카락의 감촉을 즐기던 샬롯은, 곧 손을 내렸지만 아무래도 발이 안 떨어졌다.

자신이 없어도 요제프가 잘 지낼 수도 있을 테지만…….

어딘가 요제프가 분명 많이 자랐다는 것도 알고 있었지만…….

그래도 요제프는 제게 있어서 물가에 내놓은 동생 같은 느낌이 있었다.

“있잖아. 요제프, 오늘 하루만 더 세티야 가에서 같이 지낼래?”

요제프는 길게 생각해 볼 것도 없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샬롯도 그제야 다시 웃음이 나왔다.

‘분명 황궁에서 생활하면서 얻을 수 있는 이득이 있다는 건 아는데. 도저히 걱정되어서 못 견디겠는걸.’

제가 안 보면, 어쩐지 또 식사를 잘 하지 않을 것 같다는 건 그냥 기우만은 아닐 것 같았다.

요제프의 손이 어느새 그녀의 손을 깍지 껴서 쥐었고, 샬롯은 방긋 웃으며 마차를 향해 걸음을 떼어 놓았다.

* * *

요제프를 마차에서 내려 주고, 그녀의 방이 있는 별관으로 가는 길이었다.

문득 마차가 멈춰 섰다.

샬롯이 어리둥절한 얼굴로 마차에서 내리자, 앞선 마차를 타고 있던 카밀라가 그녀를 기다리고 서 있었다.

꽤 시간이 늦어서 사위가 어둑어둑했다. 그래서인지 카밀라의 표정도, 어딘가 지친 듯 보였다.

“할머니?”

“샬롯.”

“왜요?”

“이걸 받아라.”

샬롯은 카밀라 옆에 선 시종이 넘겨주는 것을 품에 받아 안았다. 양팔로 들어야 할 만큼 제법 거대하고 아름다운 꽃다발이었다.

새하얗고 길쭉한 꽃이 가득한 꽃다발은 제법 아름다웠다.

“이건…….”

샬롯이 멍하니 꽃다발을 들여다보는데, 카밀라가 부연 설명을 덧붙였다.

“기사의 명예를 뜻하는 꽃이다.”

“그건 아는데, 이걸 갑자기 왜요?”

카밀라는 어딘가를 바라보듯 멍하니 숲 쪽을 바라보다가, 천천히 샬롯에게 고개를 돌렸다.

“부탁할 생각인데, 거절해도 괜찮아.”

“어떤 부탁인데요?”

“저 오솔길로 쭉 가면, 아이작이 있을 거다. 그 좋아하는 것이라곤 없는 아이가, 너를 그래도 아낀다지.”

“……아이작 오라버니가요?”

샬롯이 반색하자, 카밀라가 고개를 끄덕였다.

카밀라가 길게 말하지 않아도, 샬롯은 그녀가 아이작을 걱정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리고 그녀답지 않게 이런 꽃다발까지 챙겨 주면서 ‘부탁’이라는 말을 쓴다는 것에서 참 많은 게 느껴졌다.

“제가 간다고 해서 뭐가, 어떻게 되진 않겠지만, 기꺼이 다녀올게요.”

카밀라는 뭔가 하고 싶은 말이 많은 듯했지만, 그저 고개만 가볍게 위아래로 끄덕였다.

샬롯은 그 자리에서 휘파람을 불었다.

그사이에 제법 친해진 나이트메어가 어둠 속에서 쓱 하고 모습을 드러냈다.

샬롯은 날개를 접고 고개를 숙이는 나이트메어의 등에, 꽃다발을 안은 채로도 익숙하게 올라탔다. 그러곤 카밀라에게 제가 할 수 있는 한 최대한으로 밝게 웃어 보이곤 오솔길을 따라 나이트메어를 몰았다.

* * *

꽃다발을 품에 안은 샬롯은 오솔길이 끝나는 지점에서 멈춰 섰다.

쇠 울타리로 분리된 구획이 거기에 있었는데, 잡초가 없도록 잘 관리된 잔디밭 사이에 샬롯의 키까지 올라오는 높은 비석들이 정갈하게 늘어서 있는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여기, 묘지가 있었구나.’

세티야 가의 묘지라면 모르는 곳은 아니었다.

책 속에서 제법 자주 묘사되는 곳이었다.

‘그만큼 세티야 가 사람들이 족족 죽어 나갔다는 뜻이니, 뭐 희망적인 이야기는 아니지만.’

그리고, 소설 속에서 이 장소가 나올 때마다 카밀라가 여기에 서 있는 장면이 함께 나오는 것도 꽤 기억에 깊이 남아 있었다.

그렇게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카밀라인데도, 저택에 머물 땐 잠을 줄여서라도 매일같이 묘지를 방문한다는 묘사가 몇 번이고 나왔었다. 꼭, 흰 꽃다발을 가지고서.

점점 더 묘지가 가까워질수록 샬롯은 거기에 누군가가 있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카밀라의 말대로였다.

아이작은 공작저의 땅이 끝나는 곳 즈음에 있는 고요한 작은 묘지에 앉아 있었다.

샬롯은 안 본 지 하루밖에 되지 않는 늘씬하고 긴 그림자를 마주하고서야,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정말로 여깄었구나.’

“수고했어, 나이트메어. 다시 부를게.”

샬롯은 혹시 아이작의 기분을 상하게 할까 염려되어 나이트메어에서 뛰어내리곤, 발소리를 숨기지 않고 터덜터덜 걸어 그에게 다가갔다.

아이작이 고개를 들고 샬롯을 바라보았다.

그는 집에도, 황성에도 돌아오지 않고 고집스레 여기 앉아 있는 사람치곤 그리 나쁜 표정은 아니었다.

“이게 누구야, 세티야 가의 막내 아가씨 아니야.”

다만, 그렇게 농담을 하면서도 평소처럼 샬롯을 안아 올린다거나 하는 일 없이 묘 앞에 걸터앉은 채로 힘없이 웃어 보일 뿐이었다.

샬롯은 입을 꾹 다물고 아이작의 앞으로 다가가 털썩 주저앉았다.

아이작의 앞에 놓여 있는 묘비에는 예상대로 로룸 세티야라는 이름이 적혀 있었다.

샬롯이 묘비명을 손으로 한 번 쓸어 보는데, 아이작은 어딘가 지친 얼굴로 그녀에게 중얼거리듯 말했다.

“조금만 더 쉬다가 곧 돌아갈게. 먼저 돌아가 있어.”

샬롯은 고집스레 고개를 저었다.

아이작이 알아서 잘 하리라는 걸 알았다.

하지만 그녀는 아이작이 처음으로 제게 마음을 열어 주었던 게 정말 의미 있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제가 더 잘해 주고 싶었다.

“……아이작 오라버니가 걱정되는데.”

샬롯이 아홉 살답지 않게 툭 중얼거리자, 아이작이 어딘가 딱딱해 보이는 얼굴에 부드러운 웃음을 억지로 그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알겠으니까. 곧 돌아갈게. 어서 돌아가. 사람들이 찾겠어.”

그녀는 그의 말에 대꾸하는 대신 주위에 있는 다른 묘비들을 둘러보았다.

몇 개의 묘비명을 읽어 내려가던 그녀의 손은, 어떤 이름 앞에서 멈춰 섰다.

[라일락 베디아 세티야]

한 번도 직접 본 적 없는 사람의 이름인데, 왜 이렇게까지 보기만 해도 그리움이 스칠까.

왜 비석에 새겨져 있는 이름을 손으로 만지기만 해도, 가슴이 이토록 시릴까.

따지고 보면 전혀 상관없는 사람인데도.

샬롯은, 진짜 샤를로테의 생모의 이름을 몇 번이고 손으로 덧그리다가, 묘비 앞에 쪼그리고 앉았다.

누가 다녀갔는지는 모르겠지만, 묘비마다 제법 싱싱한 꽃다발 묶음이 놓여 있는 게 그제야 눈에 들어왔다.

‘꽃다발은, 산 사람을 위한 거구나.’

샬롯은 묘한 생각을 하며 그것들을 바라봤다.

꽃다발이 놓여 있다는 것 하나만으로, 어딘가 마음에 위안이 되었다.

이 묘비의 주인이 외롭지 않을 거라는. 누군가가 그들을 기억하고 있다는 게, 이상하리만큼 위안이 되었다.

샬롯은 그제야 제가 가져온 꽃다발의 의미도 조금 알 것 같았다.

샬롯은 제가 가지고 왔던 꽃다발을 묶은 끈을 풀어 꽃다발을 반으로 나누었다. 그리고 손으로 종이 끈을 반으로 가른 뒤, 꽃다발을 작은 두 묶음으로 나누었다.

하나는 라일락의 묘비 앞에 두었고, 또 하나는 아이작이 앉아 있는 앞자리에 두었다.

아까부터 줄곧 돌아가라는 소리를 하던 아이작은, 샬롯이 라일락의 묘비 앞에 선 뒤로 줄곧 말이 없었다.

그냥 멍하니 묘비를 바라보다가, 그의 옆에 쪼그리고 앉은 샬롯에게 망토를 깔아서 자리를 내주었을 뿐.

샬롯은 그 자리를 사양하지 않고 그의 옆에 기대앉았다.

아이작을 뭐라고 설득하면 좋을지, 솔직히 말해서 전혀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무리 검 하나로 생사가 갈리는 줄을 알면서 검을 쥔다고 말하지만, 사람의 생과 사는 너무 무거운 문제다.

특히 아직 어른이 되지 못한 사람들에게는.

샬롯은 오늘 이른 새벽부터 줄곧 온갖 일정에 시달려 왔다. 한참 동안 아이작에게 기대앉아 건넬 말을 고민하는 동안, 어쩔 도리 없이 천천히 졸음이 쏟아졌다.

‘……아, 자면 안 되는데.’

하지만 보통은 그런 생각이 들면 이미 늦어 있게 마련이었다.

꾸벅, 꾸벅.

양 갈래로 머리를 묶어 올린 귀여운 머리통이 쏟아지듯 졸기 시작하자, 아이작은 손을 뻗어 제 사촌 동생에게 망토를 덮어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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