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6.
하지만 처음에는 난처해하던 샬롯은, 이내 웃어 버렸다.
투명 인간이라는 별명을 가지고 있던 그녀가 누구 한 명을 고른다는 상황 자체가 웃겼다.
“있잖아, 베티.”
“네?”
“모두에게 회신해 줘.”
“……모두에게요? 똑같이 회신하면 될까요? 뭐라고…….”
“이렇게 아침마다 뿔뿔이 흩어져서 수련해 봤자, 나 같은 꼬맹이한테도 지니까 그냥 다들 한 군데 모여서 수련하자고. 할머니가 쓰시는 수련장, 거기 써도 좋다고 하셨는데. 거기로 가자.”
샬롯의 말을 들은 베티의 얼굴이 희게 질렸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아이작에게 그런 말을 전할 생각을 하니까 벌써부터 기가 질리는 모양이었다.
샬롯은 부드럽게 웃으며 괜찮다고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아이작은 처음부터 그녀를 인정해 주었던, 첫 번째 사람이었다.
오히려 다른 사람이 뭐라고 할지는 모르겠지만, 아이작만은 제 편을 들어줄 거다.
‘……어제만 해도. 결국은 나 때문에 돌아온 모양이니까.’
샬롯은 베티가 울상을 하곤 시종에게 메시지를 전달하러 가는 모습을 바라보다가, 절로 입 밖으로 흘러나오려는 한숨을 삼켰다.
결국은, 아무것도 해결하지 못했다.
아이작이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지도 알아내지 못했다.
고작 열다섯이었던 제가, 지금은 고작 아홉 살인 제가…… 뭐 그렇게 대단한 사람이라고 8년 가까이 쌓여 온 고민을 한 방에 해결할 수 없으리라는 건 알고 있지만…….
그래도 이렇게 어영부영 세월이 쌓여 가는 것을 보고만 있어서도 안 될 것 같단 말이지.
이대로 아무것도 안 하고 시간이 흘렀다간, 아이작이 어떤 사람이 될지 아는 사람은 저 하나뿐이니까, 묘한 책임감이 생긴 것 같았다.
‘아이작을 위해서라도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부터 알아내야겠어.’
샬롯은 자두만 한 제 주먹을 힘껏 움켜쥐었다.
* * *
란슬롯은 대회가 끝난 다음 날도, 그다음 날도 새벽같이 혼자 제 수련장에서 고요히 검을 쥐었다.
원래는 행사장이니 연회장이니 하는 곳에 참석하지 못해 안달이었고, 친구들과 함께 있지 않으면 어딘가 마음이 허전해서 안달이었던 그였다.
하지만 샬롯과 함께 검을 고르러 간 날, 그녀에게 완전히 패한 뒤부터는 그런 것들이 중요하지 않게 느껴졌다.
그를 따르는 아이들이 우르르 몰려들어서 함께 놀자고 졸라 대도, 수련을 같이할 거 아니면 그냥 다음에 보자고 말하게 되었다.
그냥, 시간이 아까웠다.
그리고 제가 지독히도 정체해 있다는 느낌에 안달이 났다.
칼그림자의 날, 샬롯과 직접 대련하면 그 느낌이 좀 시원하게 해소될 줄 알았는데…….
‘갈증만 더해졌어.’
란슬롯은 목검을 콱 틀어쥐곤 짚으로 만든 허수아비를 내려치며 이를 악물었다.
그래도 제 나이에서는 제법 인정을 받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전혀 아니었다.
란슬롯의 눈에는 칼그림자의 날 대회 결선의 장면이 아직도 선했다.
요제프 황자도, 샤를로테도 저와는 전혀 다른 수준에 있었다.
심지어 샤를로테는 비야키 형님과도 여유 있게 맞붙었고, 아이작 형님과도 대등하게 겨뤘다.
그 대전은 너무 수준 높은 것이어서, 심지어 황제 폐하께서도 넋을 놓고 지켜보시질 않았던가. 솔직하게 말해서 제 눈으로는, 다 따라가지 못하는 순간들조차 많았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아이작 형님에게서까지 승리를 따낸 건 정말…… 말도 안 돼.’
대결은 신성한 것. 실력 이외의 요소로 움직일 아이작이 아니었다.
하지만 일부러 승리를 양보해 준 건 아니라고 해도, 거기엔 우연도 작용했을지도 모른다는 게 란슬롯의 생각이었다.
아이작 형님은 칼그림자의 날에 몇 번째 참여하는 거였지만, 매번 정신계 계열의 시험은 지독하게 짜증을 내며 싫어했다. 차라리 검을 집어 던지고 말 정도로.
그래서 그 덕을 봐 샬롯이 이긴 거로 생각하긴 했지만, 그래도 대단했다.
결선의 장면을 곱씹던 란슬롯은 목검을 내리치면서 쓸데없는 생각을 떨쳐 냈다.
‘……그게 중요한 게 아니야. 중요한 건, 내가 그중 그 누구도 이길 수 없다는 거야.’
좀 더 시간을 소중히 여겼더라면 좋았을 거다.
그랬더라면, 지금의 저도 어느 정도는 샬롯의 적수가 될 수 있었을까?
마치 요제프 황자처럼…….
란슬롯은 아무도 지켜보고 있지 않고 아무도 말을 걸지 않았는데도, 몰려온 수치심에 괜히 저 혼자 얼굴이 붉어져서는 저도 모르게 검을 멈춰 세웠다.
요제프의 실력을 반도 따라가지 못하는 것을 알고 나자, 요제프 황자를 보잘것없는 머저리라고 놀리고 괴롭히던 그 모든 시절이 떠오를 때마다 죽을 듯이 창피했다.
물론 요제프 황자를 괴롭힌 건, 분명히 저에겐 그럴 명분이 있었던 거고 2황자님과 세티야 가를 위해서 했던 거지만…….
그래도, 이제 와서 완전 다른 사람처럼 구는 요제프 황자가 제 실력을 보면 얼마나 우습겠냐는 생각이 들면 자다가도 이불을 걷어차게 되는 건 어쩔 수가 없었다.
요제프 황자에 대해 떠올리던 란슬롯의 머리 한구석에 그가 샤를로테에게 제 마음을 전하는 장면이 절로 스쳐 지났다.
샬롯은, 일찍이 본 적 없을 만큼 행복해 보였다.
괴롭힘당해서 우는 게 아니라, 그렇게 볼이 붉게 물들어서 행복에 젖어 눈물을 흘리는 모습은 정말 처음 보았다.
그 모습은…… 어딘가 묘하게 눈을 뗄 수 없는 구석이 있었다.
‘……요제프 황자만큼, 내가 실력이 되었더라면. 그랬더라면…… 샤를로테에게 화관을 건네는 사람은 달라졌을까?’
란슬롯은 저도 모르게 떠올려 본 의문에, 스스로가 생각해도 기가 막혀서 혀를 찼다.
“지금 내가 무슨 생각을 하는 거야?”
이건, 질투였다.
그냥, 그 자신은 계속해서 질시가 많을 수밖에 없는 환경에서 자라났으니까.
세티야 가의 직계를 부러워하고, 카밀라 가주가 다음 후계자를 손자 세대에서 찾는 이 환경에서 더 일찍 태어나지 못해 아이작 형님만큼 나이가 들어 있지 않은 것을 아쉬워했으니까.
그러니까, 저도 모르게 요제프 황자와 샤를로테도 질투해 버린 걸 테다.
그 대단한 실력이 부러워서.
그냥 그뿐.
그 이상은 아무것도 없었다.
란슬롯은 머리를 비워 내려 애쓰며 목검을 다시 한번 고쳐 쥐었다.
그때 수련장의 흙바닥을 밟는 발소리가 그에게 다가왔다.
란슬롯은 시종을 돌아보지도 않고 물었다.
“샬롯이, 뭐래? 요제프 황자와 수련해야 한다고 대련은 어렵대?”
어차피 뻔한 답변이 돌아왔을 거라 생각하며 던진 말에, 시종이 반 박자 느리게 대답했다.
“저…… 그게 아니라…… 샤를로테 님께서 다 함께 수련하자고…… 전해 달라고 하시는데요?”
“……다 함께?”
“……네.”
세티야 가의 후계자 후보들은, 각자 제 영역이 있었다.
어떻게 본다면 제 사냥터와 제 영역을 가진 야생 맹수에 비견할 만했다.
언젠가부터 이어져 내려온 전통 아닌 전통이었다.
다들 제가 수련하는 모습을 남에게 보이고 싶지 않아 했기 때문이기도 했고, 가뜩이나 다들 별로 사이가 좋은 편도 아니므로 혈기 왕성한 나이에 생길지 모르는 사고를 미연에 방지하기 위함이기도 했다.
그리고 가주인 카밀라부터가 남들과 잘 섞이지 않는 성격이라서 그런 전통이 더 공고해진 것 같기도 했다.
그런데 인제 와서 다 같이 모여서 수련하자고?
란슬롯이 제 수련장을 배정받은 게 그가 여덟 살이 될 무렵이었던가.
직계인 아이들은 자신만의 수련장을 더 일찍 배정받을 테다. 재능이 발현하면 즉시 배정받는다고도 들었던 것 같았다.
그 이후로 다른 사람과 함께 수련하고 싶으면 차라리 황곰 기사단의 훈련장으로 나가면 나갔지, 세티야 가 사람들끼리는 수련하는 일이 없었다.
그래서 그런지 누군가와 함께 수련한다는 것은 생각만 해도 너무 거북했다.
란슬롯이 거의 반사적으로 거절의 말을 내뱉으려는 순간, 시종이 한참 동안 망설였던 듯한 얼굴로 뒷말을 마저 속삭이듯 말했다.
“……그리고 이렇게 아침마다 뿔뿔이 흩어져서 수련해 봤자, 샤를로테 님께 지니까 그냥 다들 한 군데 모여서 수련하자고 하셨습니다…….”
시종은 란슬롯이 뭐라고 말을 하기도 전에 이미 얼굴이 희게 질려서 그의 눈치만 보았다.
란슬롯은 기가 막히다 못해 웃음이 절로 샜다.
“……하. 하하하. 하하하. 정말…….”
목검을 들지 않은 손으로 이마를 짚은 란슬롯은, 가슴속이 간질간질할 정도의 승부욕이 퍽 즐겁다고 생각하며 고개를 위아래로 끄덕였다.
“좋아, 어디 한번 가 보자고.”
* * *
하지만 야심 차게 카밀라 소유의 본관 앞 훈련장에 도착한 란슬롯은 생각 밖의 풍경에 멍하니 멈춰 서야 했다.
“지각생이네.”
샬롯이 그렇게 말하며 생긋 웃어 보이는 모습 뒤로, 한데 모여 있을 리가 절대, 절대로 없는 사람들이 잘도 모여서 아침부터 목검을 치고받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