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0.
샬롯은 요제프와 함께 말에서 내려, 나이트메어를 시종에게 맡기면서도 복잡한 머릿속이 다 정리가 되질 않았다.
요제프의 어머니 아렌느는, 작중에서는 별반 묘사도 나오지 않았다.
그저 그녀에 대한 떠도는 소문들, 안 좋은 뒷말들에 대해서만 나온 게 고작이었다.
그나마 등장한 장면을 꼽자면, 성인이 된 요제프가 그녀의 묘지에 가끔 들르는 장면이 나온 게 전부일까?
‘……연회장에도 얼굴을 비치지 않으니까, 나도 모르게 무심코 요제프의 어머니를 만날 수 없을 거라고 생각했나 봐.’
요제프가 성인이 되었다 해도 아렌느는 고작해야 마흔 중반인데, 그렇게까지 나이가 많은 편도 아닌데 일찍 돌아가신 걸 보면 몸이 안 좋았던 걸까?
샬롯이 생각에 잠겨 있는데, 황궁 본관으로 들어가는 입구에 선 기사들이 일제히 검을 높이 들어 요제프 황자를 환영해 주었다.
그녀는 그제야 고개를 들고 주위를 바라보았다.
연회에 참석하기 위해서 왔던 황궁과 이렇게 요제프와 함께 방문한 황궁은 너무나도 다른 느낌이었다.
연회장은 아무래도 손님들을 위한 공간이었기 때문에 사람을 압도하는 거대한 공간 속에 빼곡하게 장식이 들어차 있어서, 체이커의 부와 세력을 과시한다는 느낌이 강했다. 그런데 이렇게 요제프와 함께 지나는 황궁은, 너무 아름답지만 그래도 일상적인 공간이라는 냄새가 났다.
시녀들이 서로 이야기를 하며 지나는 모습, 바쁜 듯한 걸음걸이로 서류를 안고 지나가는 행정관, 빨랫감 바구니를 안고 지나가는 시종들.
그리고 그녀의 옆에 선 요제프를 향해 쏟아지는 시선들.
그건 아마 지금까지 천대받기만 했던 요제프 황자가 인제 와서 다시 황실로 복귀한 것에 대한, 황태자 후보로 선언된 것에 대한 의문과 호기심일 것이다.
샬롯은 그 모든 게 제법 재밌다고 생각했다.
그녀는 궁정 집사가 나와서 둘을 맞이하고 또 안내하는 것을 따라가며, 요제프에게 작게 속삭였다.
“있잖아, 요제프.”
“응.”
“뭔가…… 황궁을 이런 식으로 와 볼 줄은 몰랐거든. 이렇게 여기서 막 돌아다니니까, 뭐랄까…… 정말, 요제프 네 약혼녀가 된 느낌이야. 너무 재밌어.”
요제프는 눈을 느리게 깜박이며 샬롯을 바라보았다.
“……지금까지, 제대로 이해한 거 맞아?”
“어? 당연하지.”
“약혼 말이야. 뜻은 아는 거야?”
“응. 아는데?”
요제프는 저와의 대화에서 가끔 이렇게 답답해 죽겠다는 듯한 얼굴을 할 때가 있었다.
그녀는 그게 재밌어서 까르르 웃었다.
평소 같으면 요제프는 이런 상황에 그냥 작게 한숨을 쉬고 넘어갔을 텐데, 이번만은 그럴 수가 없었던 모양이었다. 샬롯의 손을 꽉 쥐곤, 다시 한번 다짐을 받듯 물었다.
“우리가 약혼한 거, 로테 너, 아는 거 맞지?”
샬롯은 그런 요제프가 귀여워서 얼른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알지. 안다니까?”
요제프는 의심스럽다는 듯 샬롯을 한참 들여다보곤, 눈썹을 잔뜩 찌푸렸다.
“그런데 왜 말을 그렇게 해?”
“내가 뭘? 말을 이상하게 했어?”
“네가…….”
요제프가 막 샬롯을 다그치려는 순간, 궁정 집사가 발을 멈췄다.
황궁 본궁의 3층. 어른의 키를 기준으로 해도 그 두 배도 넘는 높이의 화려하고 거대한 문 앞이었다.
문은 반쯤 열려 있었는데, 높고 거대한 창으로 바깥에서 쏟아져 들어온 밝은 햇빛이 실내를 가득 채우고 있는 것이 인상적인 방이었다.
샬롯은 넋을 놓고 방 안으로 한 발자국 발을 들여놓았다.
전체적으로 부드러운 회색과 흰색을 기반으로 꾸며진 방은, 요제프와 잘 어울렸다.
벽에는 커다랗게 세 개의 검과 두 개의 방패가 그려진 깃발이 걸려 있었다.
“요제프 황자 전하께선 앞으로 이 방을 쓰시게 되실 겁니다. 확인하시고, 부족하신 것이 있다면 언제든 분부해 주십시오.”
“그래, 그러지.”
“그럼, 필요하신 일이 있다면 언제든 불러 주십시오, 전하.”
궁정 집사가 물러나자마자, 샬롯은 얌전히 방을 구경하던 태도를 집어던지고 얼른 침대로 달려가 몸을 던졌다.
폭신폭신하고 부드러운 촉감이 몸을 받아 주는 게, 너무 기분 좋았다.
그녀는 다시 벌떡 일어나서 방 안을 여기저기 돌아다니며 구경했다.
그녀의 방도 제법 좋다고 생각했는데, 황궁의 가장 중심부에 있는 거대한 방과는 격이 달랐다. 방에는 응접실에, 작은 서재까지 딸려 있었다.
본궁에서 제 방을 가져 본 지가 오래되었을 텐데도 요제프는 그것들에 그리 큰 감명을 느끼지 않는 모양이었다. 그저 반갑지 않다는 듯 뚱한 표정을 하고 있을 뿐이었다.
하지만 샬롯은 요제프가 이런 융숭한 대접을 받는 게 제법 마음에 들었다.
“와, 진짜 커. 정말 크다. 와…… 여기 이 방 안에, 내 방은 통째로 세 개도 들어오겠는데? 아니, 다섯 개도 들어올지도. 너무 좋다. 그치?”
“……그래.”
요제프의 그리 달갑지 않은 듯한 목소리에 샬롯은 몸을 휙 돌렸다.
거대한 문 아래로, 까만 머리를 한 작은 소년이 서 있는 모습이 보였다.
문은 너무 거대했고, 많이 컸다고만 생각했던 요제프는 여기서 보니 또 너무 작아 보였다.
샬롯은 저 혼자 너무 들떠 있었던 것 같아서, 아직도 열린 문 앞에 서 있기만 한 요제프에게로 다시 돌아갔다.
그의 심정을 알 것 같았다.
저 같아도, 자신이 열두 살이 되도록, 그것도 칼그림자의 날에서 우승하는 모습을 보이기 전까지는 돌멩이보다 못한 취급을 해 왔던 황실에서 이제 와서 잘해 준다고 해서 마냥 기쁘기만 할 수는 없을 것 같았다.
샬롯은 요제프의 앞에 마주 보고 서서, 그를 품에 안아 주었다.
‘아무래도, 요제프의 키가 크니까 안아 주는 모양새가 아니게 되긴 한단 말이야.’
샬롯은 불만스레 생각하며, 요제프에게 농담 반 진담 반으로 종알거렸다.
“이 정도로 크면, 혼자 쓰기엔 너무 넓어 보이기도 하는데. 가끔 놀러 와서 자고 갈까?”
“그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대답이 돌아왔다.
요제프가 이제 황궁으로 돌아가겠다고 했을 때, 제법 선을 그으려는 태도가 느껴졌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그게 아니었구나. 요제프도, 돌아오고 싶지 않았구나.’
샬롯은 요제프가 대견해서, 그의 머리를 또 살살 쓸어 주었다.
“그럴게. 자주 놀러 올게. 그래도 괜찮다면야.”
“안 괜찮을 것도 없지.”
“그래?”
“그래.”
힘을 주어 대답하는 게 역시 너무 귀엽다.
샬롯이 까르르 웃음을 터뜨리고 팔을 풀자, 요제프가 방 안을 한 번 눈으로만 둘러보더니 별로 들어가고 싶지 않은 사람처럼 그대로 몸을 돌렸다.
“이제, 가자.”
샬롯은 아까 요제프가 말했던 아렌느 폐비를 만나러 간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녀는 고개를 끄덕이며 요제프의 익숙한 걸음을 뒤따랐다.
* * *
‘……와, 예쁘다.’
샬롯은 요제프의 뒤를 따르며 작은 정원을 보고 꽤 감탄했다.
황비 자리에서 폐해진 아렌느는 황궁 가장 구석진 곳에, 갇히듯 버려져 있다고 했다.
하지만 직접 눈으로 본 아렌느의 별궁은 제법 아름다운 공간이었다.
식물에 대해서는 그렇게까지 잘 몰랐지만, 정원이 잘 구획되어 예쁘게 가꿔져 있다는 건 충분히 알 수 있었다. 하나하나 모두 사람의 손이 닿은 듯, 엉망으로 자라 있는 잡초도 없었고 시든 이파리 하나 눈에 띄지 않을 정도였다.
이미 본 적 있는, 새하얀 꽃송이들이 만발한 정원을 멍하니 바라보던 샬롯은 손을 내밀어 그 꽃송이 하나를 만져 보았다.
‘에버폴이라고 했던가. 대신관의 정원에서만 재배된다고 하더니…… 여기도 심겨 있는 건, 일부러 심었다는 뜻인데. 황제가 아렌느 황비에게 심어 준 걸까……?’
영원히 시들지 않는 꽃을?
하지만 그렇다기엔, 아렌느는 이미 폐해진 채였다.
앞뒤가 맞지 않는 이야기에 머리를 굴리느라 멈춰 서 있던 샬롯의 옆으로, 요제프가 다가와 섰다.
“아, 미안. 내가 미적거렸지. 가자.”
요제프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곤 함께 에버풀 꽃 무리를 보고 서서, 나지막하게 말했다.
“어쩌면, 불편할 수도 있어. 그냥 내 욕심으로 소개해 주고 싶다고 생각한 거니까.”
“어? 네 어마마마를 뵙는 게?”
“그래. 그래도 어쩔 수 없다고 생각해. 어쨌든, 우리가 약혼하고, 또 결혼할 사이라는 걸 한 번은 말해야 할 테니까.”
“……어? 어? 그래서…… 그, 그래서 온 거였어?”
‘난 그냥 요제프의 어마마마를 뵌다고 생각만 하고 왔는데. 진짜 결혼할 사이도 아닌데…….’
하지만 당황스러운 건 맞지만, 싫은 건 아니었다.
눈앞에 있는 에버폴 꽃을 보는 것만으로, 속이 다디달았다.
요제프가 그녀에게 가족이 되어 주겠다는 말을 하던, 그 순간들을 떠올리면 심장이 조금 빨리 뛸 정도로 행복했다.
그냥, 시간이 흐르고 흘러서 언젠가 자신과 그가 지금과는 다른 관계가 될 거라는 사실이 아쉬울 뿐이지, 약혼 자체가 싫은 건 아니었다.
그리고 요제프가 좋고 너무 사랑스러우니까, 요제프의 어머니도 그리 거북하지 않았다.
“좋아. 맨손으로 온 게 아쉽긴 한데…… 얼른 인사드리고 가자. 보여 주고 싶은 펜던트가 있단 말이야.”
어쩔 수 없다는 듯 웃으며 고개를 끄덕이자, 요제프가 묘한 얼굴을 하고선 되물었다.
“로테, 또 이해 못 했지?”
“어?”
“내가 한 말, 제대로 이해했어?”
“어? 응. 왜? 너희 어마마마 뵈러 간다며?”
샬롯이 아무렇지도 않은 얼굴로 눈을 깜박이며 요제프를 다시 한번 바라보자, 그가 그 새까만 눈으로 그녀를 길게 들여다보다가 고개를 바싹 가까이로 붙였다.
새하얗고 고운 얼굴이, 아주 가까워지는 순간에.
부드러운 풀 내음이 코끝을 스치는 순간에.
아까처럼 이마가 아니라, 입술 끝에 간지러운 깃털이 톡 하고 스치는 감각이 드는 순간에.
샬롯은 저도 모르게 요제프를 따라서 눈을 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