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화산파 공녀님 (94)화 (94/123)

#94.

리카르도의 시선이, 문득 제 앞에서 달리고 있는 세 개의 검과 두 개의 방패가 새겨진 마차에 가 닿았다.

그 마차 안에는 그의 어마마마가 타고 있었다.

셀렌 황후는, 이번 사냥제를 큰 기회로 여기고 있었다.

리카르도도 황후의 계획이 뭔지는 몰랐지만, 눈에 거슬리기 짝이 없는 요제프에게 이참에 본때를 보여 주는 건 퍽 좋은 계획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리카르도는 침을 꼴깍 삼켰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렇게까지 많은 눈이 있는데, 어마마마라 해도 뭔가를 도모하는 건 무리가 아닐까 싶었다.

‘……그저 사냥제일 뿐인데 무슨 구경 났다고 이렇게들 몰려든 거야? 다들 한가해 빠졌지.’

리카르도가 구시렁거리는 소리를 입속으로 삼키며 막 백색숲의 초입에 설치된 임시 마구간 앞에 말을 멈춰 세우는 순간이었다.

와아아아-.

와아아-.

만세! 요제프 황자 전하 만세!

작은 거인 만세!

샤를로테 만세!

그가 입장할 때만 해도 쥐 죽은 듯 고요하던 인파 속에서 귀가 따가울 정도의 함성이 터져 나왔다.

리카르도가 인상을 그으며 뒤를 돌아보자, 새하얀 백마와 새카만 나이트메어가 앞뒤로 나란히 서서 입장하고 있었다.

그 위에 앉아 있는 건 꼴도 보기 싫은 두 꼬맹이라는 것은 말할 필요도 없었다.

흘끗 시선을 주었다가 몸을 돌리려던 리카르도는 그대로 샤를로테를 바라보자마자 돌처럼 굳어 섰다.

평생을 황자로 살아온, 그것도 유일하게 황태자가 되리라는 기대를 받으며 자라 온 그였다. 언제고 사들일 수 있는 물건에 딱히 집착은 하지 않았지만, 사치하는 것에는 누구보다 자신이 있었다. 비싼 것을 알아보는 안목만은 그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았다.

그런 그의 눈에 들어온 샤를로테는, 말 그대로 돈을 휘감고 있었다.

옷가지도 모두 값비싼 것들이었지만, 머리 장식이며 목걸이 같은 것들에 박힌 보석만 봐도 땅을 제법 사들일 수 있을 정도의 고가의 물건들이었다. 게다가 허리에 차고 있는 단검들이야말로 대단한 고가로, 경매장에서도 쉽사리 볼 수 없는 물건들이었다.

세티야 가주의 컬렉션을 탐내서 몇 번이나 구경 간 적이 있었기 때문에, 리카르도는 대번에 그것들의 가치를 알아보았다.

‘그때는 아무리 많은 돈을 주셔도 팔 수 없다고 단호하게 못 박았던 주제에, 저 애송이의 허리에 채워 준다고? ……세티야 가에서, 아주 작정을 했군, 샤를로테를 띄워 주기로.’

그게 무슨 의미일까.

리카르도의 인상이 구겨졌다.

지금까지 제게 납작 엎드려서 순종하고 있던 세티야 가였는데, 도대체 무슨 의중이 있기에 3황자와 약혼시킨 샤를로테를 저렇게 띄워 주냔 말이다.

하늘에서 내려온 천사 같아요!

작은 거인 만세!

열광하는 목소리가 들려오면 들려올수록 머리에 불이 나는 것 같았다.

게다가 그 옆에 앉은 요제프의 꼴도 퍽 보기가 싫었다.

요제프는 허리를 당당하게 펴고 앞머리를 걷어 올리고 있었다. 항상 눈을 가릴 정도로, 엉망으로 길게 자란 검은 머리로 가리고 있던 눈매가 드러난 것만으로 그는 전혀 다른 사람인 것처럼 보였다.

그리고 요제프의 목에는, 리카르도의 것이었던 붉은 펜던트가 걸려 있었다.

‘샤를로테가 내 목걸이를 저놈한테 준 건가? 하…… 정말, 가지가지 하네.’

순간, 시선이 마주쳤다.

새카만 요제프의 눈동자는, 마치 제가 본 것이 이복형이 아니라 하찮은 나뭇가지나 풀이라도 되는 것처럼 무심하게 그를 스쳐 지났다.

‘……저 자식이.’

리카르도는 요제프를 죽일 듯 쏘아보다가 입술을 꽉 깨물었다.

‘분수도 모르는 놈이, 아주 기세가 등등하시군.’

어마마마께서 의도하신 게 무엇이든, 그게 잘 안 되면 당장 제 손으로라도 뭘, 어떻게 해 버리지 않으면 안 될 것 같았다.

리카르도는 단단히 결심을 굳히며 몸을 돌렸다.

* * *

산체스 황제의 잿빛 눈동자가 군중들 사이를 찬찬히 훑었다.

차례로 오늘의 참석자들이 입장했다.

샬롯과 요제프에 이어, 다른 세티야 가의 인물들도 면면을 드러냈다. 아이작, 란슬롯과 러슬, 비야키는 각자의 무구를 들고 나타났다.

하지만 황제의 시선은 참석자가 아니라 관중석으로 가 닿아 있었다.

‘은색…… 은색…….’

속으로 중얼거리며 시선을 돌리는데, 그런 그의 곁으로 황후가 다가섰다.

“뭔가, 기다리는 사람이라도 계십니까?”

황후가 나붓하게 물었다. 산체스 황제는 그녀의 말이 다 떨어지기도 전에 고개를 얼른 가로저었다.

“내가 기다리는 사람이 누가 있겠소.”

“그렇습니까?”

“그렇소. 그저…… 세레스 국의 황녀가 놀러 왔기에 무슨 의중이 있나 했는데, 급히 돌아갔다 전갈이 와서, 혹 여기엔 참석하지 않았나 해서 보고 있었소.”

산체스 황제는 제가 대답하면서도, 스스로가 이 정치 바닥에서 많이 구르긴 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렇게까지 뻔뻔하게 생각과는 다른 말을 뱉을 수 있다니.

“세레스 국의 황녀라…… 세레스 국과는 모처럼 평화로운 시기니, 친교를 다지기 위해서 온 것 아니었겠습니까.”

“그렇겠지요.”

“그런 생각은 그만두시고, 리카르도의 성과를 기대해 주시지요.”

“물론 그럴 생각이오. 오늘 보니, 리카르도가 참 많이 컸더군. 리카르도와 함께 사냥하는 것도 퍽 오랜만인데, 몹시 기대되오.”

황제가 그리 대답하고서야, 황후는 만족스레 웃으며 물러났다.

산체스는 겉으로는 여유 있게 미소를 지으며 손을 흔들었지만, 속으로는 작은 한숨을 삼켰다.

‘……올 거라는 기대는 전혀 안 했지만. 그래도 요제프의 성장을 지켜봐 줬으면 했는데.’

그의 시선이 천천히 요제프에게 가 닿았다.

요제프 황자는, 다른 두 황자와는 달리 몰이꾼이나 수하들을 주렁주렁 달고 있지도 않고 그저 호위 기사 둘을 데리고 있을 뿐이었다.

항상 아렌느의 걱정은 기우에 불과할 거라 생각했는데, 이렇게 사냥터에 나와 서 있는 요제프의 모습을 보니까 왜 이렇게 위태위태해 보이는지 모를 일이었다.

‘요제프를 출발선에 올리는 건, 내가 해 줄 일이지만…… 내가 일일이 돌봐 줄 수는 없지. 아렌느의 말대로…… 내가 간섭하는 게 더 문제가 될 수도 있고.’

하지만 마냥 내버려 두기에도 마음이 쓰였다.

산체스가 요제프 쪽을 보며 고개를 끄덕이자, 황제의 뒤에 서 있던 호위 기사단 중 하나의 팀이 황제에게서 떨어져 나갔다.

‘이것 봐, 칼그림자의 날밖에 없다니까. 내 운신의 폭이 넓은 날은. 결국, 내가 할 수 있는 건 그만그만한 일인데.’

“오늘의 참가자분들을 위한, 황제 폐하의 연설이 있겠습니다! 참가자를 제외한 관객 여러분께서는 모두 출발선 뒤로 물러나 주시고…….”

산체스는 속으로 한숨을 삼키며 계속 관중석을 눈으로 훑다가, 단상 위에 올랐다.

“체이커의 풍년을 기원하며. 자, 사냥감의 무게를 달아 가장 공로가 큰 자에게 내 직접 공에 걸맞은 상을 수여할 것이오. 보물찾기도 함께 준비했으니, 찾아낸 보물의 값어치를 합산하여 가장 공이 큰 자에게도 또 다른 상이 있을 것이오.”

황제의 개회사에, 열렬한 기대의 함성이 터져 나왔다.

귀족들을 상대로 한 보물찾기라니, 평민들이 하는 보물찾기와는 달리 정말로 ‘보물’ 찾기가 될 게 틀림없었다.

“당연하지만, 세 명의 황자들의 활약 또한 기대하고 있소. 거기에 더해서, 칼그림자의 날에 뛰어난 무위를 보여 주었던 청년들의 활약도.”

함성이 다시 한번 쏟아져 내렸다.

연호되는 이름 중에는 세 명 황자의 이름보다도 샤를로테의 이름이 더 많았다.

아무래도 아홉 살짜리 여자아이가 뛰어난 무위를 보였다는 것과 나이트메어라는 마수를 타고 있는 샤를로테의 모습이 모두에게 대단한 감명을 준 게 틀림없었다.

샬롯은 제게 쏟아지는 함성을 들으며, 볼을 긁적이다가 손을 들어 화답해 주었다.

처음에는 쉽사리 변하는 민심이 그렇게까지 달갑지 않았는데, 며칠 전 팬레터를 하나하나 읽다 보니 마음이 꽤 찡했던 거다.

‘내가 무술을 배우는 게, 그냥 나만을 위한 일이라고 생각했는데…… 그게 누군가에게 그렇게 힘을 준다고 생각하면 나도 기분 좋은 일이니까.’

샬롯이 손을 흔드는 것에 몇 배로 요란스러워진 관중석에, 사회자가 놀라서 관중들을 진정시킬 정도였다.

샬롯은 사회자로부터 가만히 있을 것을 권고받고서야 요제프의 곁으로 돌아왔다.

“쫑은, 잘 있지?”

샬롯의 속삭임에 요제프가 표정을 애매하게 찡그렸다.

쫑은, 요제프의 목에 걸려 있는 붉은 펜던트 속에 깃든 사냥개 정령이었다.

쫑도 나이트메어처럼 평범하게 자연계에 존재하는 생물은 아닌지, 몸이 반투명하고 반짝거리기까지 했다. 몸집도 커서 샬롯과 체격이 비슷할 정도인 데다, 제법 속도를 낼 줄 알았고, 무엇보다도 사냥감의 냄새를 귀신같이 맡았다.

“……정말로, 그 이름으로 결정된 거야?”

“왜? 원래 강아지 이름은 누렁이 아니면 백구잖아. 쫑 정도면 엄청나게 잘 지은 거 아냐?”

무림에서 강아지 대접은, 딱 그 정도였다. 집이든, 가축이든 지킬 대상이 있어야 대접이 좀 나을 텐데, 그 대단한 화산파에 얌생이 같은 도둑이 발을 들일 수 있을 리가 없었다.

제가 아는 이름 중에서도 제법 예쁜 이름으로 고른 건데도, 제 말 이름도 우아하게 지은 요제프의 성에는 차지 않는 모양이었다.

이상하게 큰일을 결정할 때는 그녀가 뭐라고 하건 토 하나 다는 법이 없으면서, 제법 사소한 데에서 집착이 있었다.

샬롯은 요제프의 그런 점도 귀엽다고 생각하며 픽 웃었다.

‘사냥감도 사냥감이지만, 보물찾기가 있는 줄은 몰랐는데. 그래서 책에서 이 목걸이가 그렇게 빛을 발했구나.’

보물찾기라면, 사냥감이 남긴 발자국을 추적할 수도 없을 테고 분변을 보고 쫓아갈 수도 없다.

쫑의 도움이 아니라면 그렇게까지 수월하게 묻어 둔 물건을 찾기란 어려울 거다.

사냥제의 우승 따위 별것 아닐 수도 있지만, 이번 대회를 주목하고 있는 시선이 굉장히 많았다.

귀족들도 그랬고, 일반 대중들도 그랬다.

요제프가 확실히 점수를 딸 기회에 적절한 물건을 쓸 생각을 하니, 그녀는 벌써부터 신이 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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