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화산파 공녀님 (101)화 (101/123)

#101.

아렌느는 샤를로테가 제게 말을 거는 순간, 자신을 향한 사람들의 악의적인 시선이 순식간에 누그러지는 것을 느꼈다.

분명 아직 요부라느니, 황제의 마음을 홀린 것도 모자라 다른 남자들과 정을 통한 부정한 여인이라느니 하는 온갖 좋지 않은 추문이 제게 주렁주렁 매달려 있을 텐데도.

아직 아무것도 바뀐 것도, 해결된 것도 없다. 그런데도 사람들의 시선이 유해진 것은 어째서일까?

그녀의 시선이 제게 말을 걸어오는 분홍색 머리의 작은 소녀에게 가 닿았다.

오늘 죽을 위기를 겪었다는 소녀는, 밝고 경쾌했으며 반짝반짝 빛나는 밝은 미소를 매달고 있었다. 아홉 살이라는 나이에 걸맞게, 볼이며 손은 깨물어 주고 싶을 정도로 귀여웠는데…….

어떻게 이렇게 많은 사람들의 마음을 간단히 움직이는 걸까?

‘황제 폐하께서 직접 들렀을 때도 움직이지 않았던 내 마음까지 간단히 움직인 것도, 이 아이였지.’

어떻게 이런 아이가 있을 수 있을까?

아렌느는 느리게 눈을 깜박이며 다리를 굽히고 몸을 낮춰 샤를로테와 시선의 높이를 맞추었다.

“샤를로테, 초대해 줘서 고맙구나.”

샬롯은 태연하게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

“에이, 당연히 초대해야죠. 그보다 와 주셔서 제가 더 감사한걸요.”

“큰일이 있었다던데, 다친 곳은 없니?”

지금, 이 상황에서 당연히 물어야 할 질문이라고 생각했는데, 샬롯은 이상하게 그 질문에 당황한 듯 눈을 되록되록 굴리더니 멋쩍게 웃었다.

“크, 큰일은요. 하하, 하하하. 누가 보면 제가 뭐, 대단히 위험한 일상을 사는 줄 알겠어요. 정말 하나도 안 위험한데…… 하하하. 어휴, 그런 대단치 않은 것보다…… 요제프! 요제프 황자님! 이리 와서 빨리 아렌느 님한테 쿠키 맛있었다고 말씀드려!”

아렌느는 갑자기 샬롯이 말을 돌리듯 뒤에 선 요제프를 닦달하는 것에 놀라서 눈을 크게 떴다.

‘쿠키……?’

요제프는 아렌느가 만드는 음식에 손을 대질 않았다. 매번 안부 인사를 위해 의례적으로 들르긴 했지만, 자리에 앉았다가 그녀의 애정이 어린 잔소리가 지겨워진 지 오래라 오래 앉아 있지도 않고 금방 자리를 떠 버리기 일쑤였다.

‘그런데 쿠키를 맛보았다고? ……지난번 샬롯이 가져갔던 그건가?’

샬롯의 말에 고개를 돌리자 멀지 않은 곳에 서 있던 요제프가 자신을 바라보고 멀뚱히 서 있는 게 보였다.

아렌느는 요제프가 나이트메어의 뒤에서 백마를 타고 당당히 군중들의 함성을 들으며 돌아올 때부터, 줄곧 보기 좋다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이렇게 가까이에서, 귀족들 사이에 서 있는 요제프의 모습을 보니까 새삼스럽게 아들이 많이 컸다는 실감이 났다. 많이 컸고, 많이 단단해졌고, 그리고…… 화려한 의복 때문인지는 몰라도 정말로 황태자 후보라는 지위에 걸맞게 위풍당당해 보였다.

훌쩍 자라 버린 아들과 눈을 마주치자 어쩐지 긴장이 되었다.

막상 이런 대외적인 장소에서 요제프의 얼굴을 마주하는 게…… 얼마 만인지도 모를 오랜 일이었다.

아렌느는 요제프를 이런 대회에 내보내려고 한 적도 없었고, 오히려 나가지 못하게 제 품에 가둬 두려고만 했으니까 당연한 일이었다.

제가 여기에 온 것을, 정말로 요제프도 반길까.

반기기는커녕, 제게 들러붙은 엉망진창의 소문들 때문에 저를 창피해하는 건 아닐까.

원래도 말이 많은 아이는 아니었지만, 요제프가 제법 오래 묵묵히 물끄러미 저를 보기만 하자 아렌느는 어쩐지 여기에 오지 말 것을 그랬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녀가 어쩔 줄 모르는 표정이 되었던지, 샬롯이 얼른 아렌느의 손을 꽉 쥐며 입을 열었다.

“요제프가 너무 좋으면 어쩔 줄을 몰라 할 때가 있어요.”

약혼했다고 하기에 꼬맹이들끼리의 장난 같은 거라고 생각했는데, 아들의 마음을 대변해 주기까지 하는 게 정말로 약혼자 같은 느낌이 났다.

샬롯은 이번에는 요제프를 향해 고개를 돌려 속살거리듯 말했다.

“이 누님 말 들어. 그래야 후회 안 한다, 너.”

“……누님?”

아렌느가 얼빠진 목소리로 되묻는데, 좀처럼 얼굴에 내심을 드러내는 법이 없는 요제프의 표정이 고작 그 단어 하나에 와락 구겨지는 게 보였다. 그 모습은, 표정을 잃어버린 웃자란 소년이 아니라, 정말 제 나이 또래의 천진한 아이같이 보였다.

그게 너무 보기 좋다고 생각하는데, 요제프가 어쩔 수 없다는 얼굴로 한숨을 토하며 아렌느에게 다가왔다.

샬롯은 그제야 아렌느의 손을 놓고 옆으로 물러났고, 요제프는 아직 쪼그리고 앉아 있는 아렌느의 앞으로 다가와 느리게 고개를 끄덕이곤 말했다.

“맛, 나쁘지 않았어요.”

“……어?”

‘정말로 쿠키 먹었구나.’

아렌느가 조금 놀라는데, 샬롯이 요제프의 어깨를 기대듯이 툭 미는 게 보였다.

요제프는 내키지 않는 얼굴로도 순순히 제 말을 정정했다.

“맛있었어요, 쿠키. 겉은 바삭하고, 속은 촉촉하고, 제가 좋아하는 견과류만 박혀 있어서…… 맛있었어요.”

아렌느의 눈동자가 살짝 커졌다가, 부드럽게 휘었다.

내키지 않는 일이라면 죽어도 하지 않는 요제프가 저렇게까지 등 떠밀려서 뭔가를 하는 것도 처음 보았고, 요제프가 제 음식을 먹고 이렇게 말해 준 것도 처음이었고, 그리고 제가 여기에 서 있는 것을 타박하긴커녕 그냥 아무렇지도 않게 여상한 일인 양 취급해 주는 게…….

모든 게 너무, 좋았다.

아렌느는 아랫입술을 꽉 깨물었다. 그러지 않으면 웃음 끝에 눈물이 터져 나올 것만 같아서.

사실은 알고 있었다.

요제프는 힘든 일을 말할 때마다, 이 어미가 너무 힘들어하니까 어느 날부턴가 아예 이야기하지 않고 있다는 걸.

그녀가 또 발작적으로 모든 음식을 거부할까 봐, 안 좋은 얘기는 일절 하지 않게 되었다는 걸.

알고 있었다.

그저 모른 척했을 뿐.

어미로서 자신이 해 줄 수 있는 게 없어서. 그게 최선이라고 생각해서.

근데, 모르는 새 너무 많이 자랐고, 너무 단단해져 있었다.

어느 날부턴가는, 그냥 아픈 것을 숨기는 게 아니라 정말로 아프지 않은 거라고 의원이 진찰 결과를 전해 왔던 것도 인제 와서야 정말로 믿어졌다.

아렌느는 시선을 옮겨 요제프의 등 뒤에 숨듯이 서선 이쪽을 빼꼼 바라보고 있는 사랑스러운 아이를 바라보았다.

귀엽기도 했고, 예쁘기도 했지만, 무엇보다도 올곧았다.

그녀는 부드럽게 웃으며 요제프의 손을 쥐었다.

“우리 아들이…… 다른 것도 다 잘하는데, 사람 보는 눈도 있네.”

요제프가 그녀의 시선이 가 닿았던 곳을 눈치챘는지, 아렌느의 말에 전적으로 동의한다는 듯 고개를 주억거렸다.

아렌느는 웃음을 터뜨렸다.

소리도 내지 않는 작은 웃음이었음에도 이렇게 웃은 게 얼마 만인지 기억도 나지 않았다.

그녀는 웃음 끝에 눈가에 매달린 눈물을 웃음 탓이라 치부하며 손끝으로 쓸어내었다.

‘하지만 이렇게 되면…….’

아렌느의 시선이 요제프와 샤를로테를 지나, 바로 옆에 있는 황후에게로 가 닿았다.

황후와 2황자를 떠올리기만 해도 손끝이 절로 차가워졌다.

솔직히 말하면, 지금 당장이라도 황태자 자리를 포기하라고 말하고 싶었다.

하지만, 샤를로테의 말이 맞았다.

요제프를 믿어 주셨으면 좋겠다고 말하던, 그 아이의 말이 맞았다.

‘황태자가 되는 것도, 그래…… 나쁘지 않을 수도 있어. 차라리, 그게 나을 수도 있어. 이렇게 단단해진 우리 아들이라면…… 그리고 그 옆에 샤를로테가 있어 준다면…….’

아렌느는 요제프가 왜 이렇게 이르게 결혼 이야기까지 꺼내 가며 샤를로테를 제 곁에 붙들어 두고 싶어 하는지 충분히 이해했다.

“요제프.”

“네, 어마마마.”

“네가 네 길을 정했다면, 나도 이제 물러나 있지만은 않으마.”

요제프의 흑요석같이 까만 눈동자에 의문이 스치는 것을 보며, 아렌느는 떨리는 주먹을 꽉 움켜쥐었다.

체이커 제국에서 제법 큰 상단을 운영하고 있는 그녀의 친정에, 아주 오랜만에 방문할 일이 생길 모양이었다.

샬롯은 요제프가 아렌느를 부축하듯 잡아 일으켜 세우는 모습을 흐뭇하게 바라보았다. 요제프가 별다른 내색은 하지 않았지만, 그가 박수와 환호를 받는 현장에 어머니가 와 있다는 것을 기뻐한다는 것은 그의 등만 봐도 알 수 있었다.

‘아렌느 님을 부른 것도 내 오지랖이 넓었지만, 결과를 보면 그렇게 나쁘지 않았던 것 같아.’

샬롯은 방긋 웃으며 흐뭇한 미소를 짓다가 문득 아렌느의 곁에서 자신을 바라보는 요제프의 시선을 깨달았다.

새까만 눈동자가 눈치를 살피듯 슬쩍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샬롯은 그 시선의 의미를 알 수 없어서 고개를 옆으로 기울였다가, 문득 깨달았다.

‘……뭐야, 이거 그거잖아. 내가 가족들 품에 있을 때, 혼자 있는 요제프를 신경 썼던…… 그거잖아.’

그녀는 이 상황이 너무 웃겨서 웃음이 났다.

반대의 상황에 부닥쳐 보니까 너무 잘 알겠다.

요제프는 엄마가 없는 샬롯의 앞에서 제 엄마와 함께 나란히 있는 모습이, 뭔가 유세처럼 보일까 봐 걱정하는 모양이었지만, 그녀에겐 전혀 그렇게 보이지 않았다. 그뿐만 아니라, 너무 보기 좋았고, 자신이 괜히 나서서 한 참견인데 오히려 저렇게 생각해 주는 게 고맙고 귀여웠다.

그리고, 이미 샬롯도 충분히 행복했다.

군중들이 작은 거인이니 뭐니 하고 연호해 줄 때, 너무 환자 같아 보일까 봐 슬쩍 걷어 내야 했을 정도로 제 몸에 망토가 무겁게 여러 장 둘려 있던 것도 그랬고, 카밀라 가주를 비롯한 모두로부터 걱정을 받은 것도 그랬고…….

그리고 무엇보다도, 요제프가 곁에 있어서.

‘요제프도 이런 마음이었겠구나.’

그런 생각을 하니까, 웃기고 재밌기까지 했다.

샬롯은 자신은 괜찮다는 듯 방긋 웃어 보이며 고개를 돌리다가, 문득 이쪽을 바라보고 있는 황후의 얼굴을 보았다.

그 어떤 상황에서도 뻔뻔하리만큼 낯빛이 변하는 법이 없던 그녀였는데, 지금, 이 상황만은 견딜 수 없다는 것처럼 낯이 희게 질려 있었다.

황후가 이렇게 뭔가에 당황해하는 건 작중에선 없는 장면이었는데.

샬롯은 그녀의 표정이 너무 고소해서 저도 모르게 더 해맑게 웃어 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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