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3.
샬레스 황녀의 이름을 듣고 기분이 좋은 것은 거짓이 아니었다.
샬롯이 처음에 정보를 하나 쥐여 준 뒤로, 황녀는 그녀가 됐다고 거절하는 것에도 굴하지 않고 제멋대로 값진 물건을 선물해 주거나 함께 놀러 가자고 권유해 오곤 했다.
우호 관계에 있으면서도 한편으로는 서로를 경계하기도 하는 대상인 타국의 황녀님이라, 샬롯으로선 그런 제안들이 부담스럽기도 했지만…… 또 어떨 때는 시원시원하게 탁 터놓고 이야기할 줄 아는 또래의 여자아이와의 대화가 반갑기만 했다.
물론 친하게 지내는 또래 여자아이들이 없는 건 아니었다.
10년 전 칼그림자의 날 있었던 슬라임 사건 이후로, 케이트 탄티누스와도 제법 친하게 지내게 되었다. 그리고 케이트가 친구들을 여러 차례 소개시켜 주기도 했고.
하지만 점점 황태자 후보 간의 보이지 않는 알력 싸움이 가속화되면서부터 케이트 역시 제 마음대로 그녀를 보러 오는 게 어려워지는 모양이었다.
그러니 샬레스 황녀를 만나는 건 즐거울 수 밖에.
샬롯은 그제야 얼른 납득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관리 필요하면 받아야지. 좋아, 어서 가자.”
어쨌든, 연무장에서는 무복 차림이 예의이듯 연회장에서는 드레스 차림이 예의일 수 있었다. 그곳의 문법 속에서 살아가는 샬레스 황녀와 이야기를 나누려면, 거기에 맞추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 싶었다.
앞서 귀찮아했다는 게 거짓말이라는 듯 샬롯이 너무 선선히 고개를 끄덕이자, 베티가 어이없다는 듯 그녀를 바라보았다.
“……아가씨의 마음은 알다가도 모르겠다니까요. 요제프 황자 전하께 예쁘게 보이자고 할 때는 그렇게 미적거리셨으면서.”
샬롯은 몇 발짝 앞서서 뒤돌아 걸으며 작게 웃었다. 바람에, 긴 분홍색 머리카락이 휘날렸다.
“요제프에게 잘 보이려고 노력하는 건, 어딘가 지는 느낌이잖아? 하지만 여자가 보라고 꾸미는 건 보람차고 좋아. 제대로 내 노력을 알아줄 테니까. 좀 더 뭐랄까, 예의를 갖춘다는 느낌이지.”
하지만 샬롯이 기껏 붙인 부연 설명에, 베티는 더 모르겠다는 듯 고개를 작게 저었다.
“어쩜 저렇게 질투도 없으신지 모르겠다니까요.”
질투?
그 단어를 생각해 보지 않은 건 아니었지만, 질투라고 말하기에는 이상했다.
굳이 이름을 찾자면, 호기심일까?
그냥 이미 정해진 인연이 있다면, 그게 언제 맺어질지 궁금하게 여기는 것뿐이었다.
그건 그렇게 됐으면 좋겠다는 기대라기보다, 만약 샬레스 황녀와 요제프가 이어지게 된다면 그때 제가 아무렇지도 않게 덤덤하게 받아들일 수 있도록 마련해 놓는 방패 같은 거였다.
요제프는 상냥하니까, 괜히 자신의 눈치를 보게 하는 것도 싫었고.
정말로 꽤나 많은 일이 원작대로 흘러간 나머지, 재산도 제법 축적할 수 있었으니까. 그런 생각이 드는 건 당연했다.
주인공 둘이 이어지는 것이야말로 원작의 가장 큰 흐름이었으니까.
‘만약 정말로 둘이 이어질 거라면, 최대한 빨리 그렇게 됐으면 좋겠다.’
오늘 아침에 있었던 요제프와의 키스가 떠올라서, 샬롯은 저도 모르게 몸을 다시 앞으로 바로 하곤 표정을 숨겼다. 그러곤 나직하게 한숨을 쉬었다.
베티의 말대로 그녀도 이제 열아홉이었다. 감정을, 엉망으로 낭비하는 건 이제 사양이었다.
* * *
방으로 돌아가 베티의 권고대로 온갖 관리를 받는 것은, 시작이야 귀찮았지만 받는 중에는 나름 기분이 좋았다.
어차피 내력을 운용하여 몸 안의 기혈에 쌓인 노폐물 같은 것이 남지 않는 샬롯의 입장에서는 몸이 굳거나 하는 일도 없긴 했지만, 그래도 남이 몸을 주물러 주거나 매만져 주는 건 기분 좋은 일이었으니까.
“어머, 아가씨. 매번 느끼지만 어쩜 피부가 이렇게 고우세요.”
“정말 말랑말랑해요. 뭉친 곳도 하나 없으시고.”
“머릿결도 너무 매끄러우세요. 보통은 어느 정도 자라면 더 이상 안 자라는데, 샬롯 님은 제법 많이 기셨네요.”
종알종알, 시녀들은 매번 감탄사를 터뜨리며 샬롯의 머리끝부터 발끝까지를 세심히 관리해 주었다. 샬롯이 깜박 잠이 올 것 같다는 생각까지 하며 늘어져 있는 사이에, 참새 같은 시녀들의 목소리가 겨우 끝이 났다.
“수고했어, 다들.”
샬롯이 부드럽게 웃으며 몸을 일으키는데, 시녀 중 한 명이 쭈뼛쭈뼛하며 그녀에게 다가왔다.
“음……?”
“아, 아가씨. 제, 제가 아가씨와 요제프 황자 전하의 패, 팬인데요…….”
이것도, 이젠 익숙한 광경이었다.
흘끗 시선을 돌려 보니 예상한 대로 베티가 흐뭇한 얼굴로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베티는 샬롯 아가씨의 충직한 종복이라는 자신의 위치에 아주 만족하며 지냈는데, 제 아가씨에게 대뜸 다가오는 팬들을 제지하며 남몰래 번호표 같은 것을 나눠 주는 일도 하고 있다는 풍문을 들은 적이 있었다.
그래서 그런지, 본가에 있을 때는 동시에 두 명 이상이 동시에 제게 팬임을 밝히는 일이 없어서 샬롯은 그것을 감사하게 생각했다. 자신을 딸처럼 여기는 베티가 흐뭇해할 일이 많다면, 그것도 나쁘지 않았고.
샬롯은 작게 웃으며 옆에 놓인 검을 검집째 들어, 아무런 의미도 없는 줄 알면서도 그것으로 시녀의 어깨를 두드려 주었다.
“그대를 축복해. 그대의 가족들이 서로 떨어지지 않고, 화목하게 잘 살길 바라. 이겨 낼 수 없는 고통이 닥치지 않길 바라.”
신의 이름이 섞이지 않은, 샬롯 그녀만의 방식대로 하는 축복이었다.
그녀는 신의 뜻이 아닌, 그녀를 죽음으로 인도하던 이의 뜻에 따라 다시 한 번의 삶을 얻은 거니까.
처음에는 정말 이런 것으로 좋아하겠냐고 생각했지만, 이건 제법 잘 먹혔다. 거의 백발백중으로.
이번에도, 샬롯의 앞에 서 있던 시녀는 얼굴이 붉게 달아올라서 눈물까지 글썽이며 검집이 닿은 제 어깨를 꽉 움켜쥐고 몇 번이나 인사를 하고 도망치듯 나가 버렸다.
“또, 축복이 필요한 사람이 있을까?”
그 말에 시녀 중 두 명이 흠칫하며 샬롯에게 간절한 시선을 던졌지만, 베티가 그 순간 엄하게 고개를 가로젓자 이내 실망한 얼굴로 시선을 내리깔았다.
‘……정말, 못 말린다니까.’
잠시 고민하던 샬롯이 고용인들 사이에 구축된 암묵적인 약속을 지켜 주자고 생각하며 모르는 척 고개를 돌리는 순간, 저 멀리서 벤이 계단을 올라오는 발걸음 소리가 들렸다.
베티와 시녀들을 물리고 나서 오래지 않아 노크 소리와 함께 벤이 들어왔다.
“어땠어?”
샬롯의 질문에, 벤은 예를 갖추며 답했다.
“전달해 드렸습니다.”
“좋아하셔?”
“무척이나 좋아하시는 것 같았습니다.”
샬롯은 뿌듯하게 웃었다. 뭐, 저 혼자 쓰자고 번 돈도 아니었고, 일이라면 진저리나게 많이 하는 할머니의 고충을 덜어 줄 수 있다면 얼마든 쓸 수 있었다.
그녀가 그렇게 생각하고 있는데, 벤이 문득 생각났다는 듯 말을 툭 더했다.
“아, 그리고…… 10년 전 청을 들어주신다고 하셨습니다.”
샬롯은 깜짝 놀라 벤을 돌아보았다.
할머니, 카밀라는 절대로 말을 허투루 하는 사람이 아니었다.
그래서 10년 전, 제가 칼그림자의 날 대회에서 우승하면 소원을 들어주겠다는 약조도 지켜 주었다. 그 결과, 당시만 해도 모든 귀족 간의 관계가 이미 꽉 짜여 있어서 요제프를 갑자기 다시 본다는 게 쉽지 않은 일이었음에도, 샬롯의 말대로 진지하게 검토하고 가능성을 열고 봐 주었다.
그리고 지금, 그때의 청을 들어주겠다고?
10년 전의 청이라면, 요제프 황자를 지지해 달라는 그 청 말곤 없었다.
아직도, 대중들 사이에서 샬롯과 요제프의 인기가 하늘을 찌르는 것과는 별개로 귀족들 사이에서는 리카르도에 대한 지지가 더 많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다. 대대로 황후를 배출한 가문으로부터 그간 이득을 취한 귀족들이 얼마나 많을 것이며, 뒷배를 봐 달라 청탁한 가문이 또 얼마나 많을 것인가.
게다가 한 번 형성된 유착 관계는 끊어 내기도 힘들뿐더러, 주위를 끌어들이게 마련이었다.
그 와중에, 세티야 가문이 요제프 황자에 대한 지지를 선언한다면 그건 지지부진하게 계속 대립하고 있는 구도에 큰 파문이 될 게 틀림없었다.
정말로 쉽지 않은 결단인데.
샬롯은 심장이 두근거렸고, 카밀라에 대한 고마움으로 가슴이 벅차올랐다.
“벤, 지금도 할머니는 쉬러 가지 않으셨겠지?”
“네. 집무실에 불이 켜져 있는 걸 보고 온 참입니다.”
“고마워.”
자리에서 벌떡 일어난 샬롯은 무복을 입은 채로 복도를 내달렸다. 그리고 굳이 노크하지 않아도 이미 제 기척을 알아내고 기다리고 있을 할머니의 방문을 벌컥 열고 들어가서, 희미한 미소를 띠고 있는 카밀라에게 덥석 안겨 들었다.
“할머니.”
카밀라는 다 큰 손녀가 갑자기 애교를 부리며 안겨도, 그게 싫기보다는 귀엽기만 한지 부드럽게 웃으며 샬롯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그래.”
“할머니, 고마워요.”
“샤를로테.”
“네?”
“나야말로. 이렇게 잘 자라 줘서, 네 그 기가 막힌 재능들에도 불구하고 비뚤지 않게 커 줘서 고맙구나.”
의례적인 말일 수도 있었지만, 카밀라의 입으로 듣는 건 또 달랐다.
샬롯은 카밀라에게 안긴 채로 눈을 잠깐 감았다.
원래 무림에서 살았던 제 나이를 훌쩍 지나, 열아홉 살이 되었다. 불행하면, 하루하루가 지독하게 잘 가지 않고 안 좋은 기억으로 켜켜이 남는 법인데, 행복하면 시간이 쏜살같이 지나간다는 것을 배울 수 있는 날들이었다. 열아홉 살이 되기까지, 정말 눈 깜짝할 만큼 짧은 시간밖에 지나지 않은 것 같았다.
카밀라가 제게 잘 자랐다는 칭찬을 해 준 건 그 시간 동안, 제가 허투루 살지 않았다는 증명 같아서 좋았다.
엄마가 있다면, 이런 느낌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종종 하곤 했는데…… 그런 존재로부터 잘 컸다는 칭찬을 듣는 건 뿌듯하고 기쁜 일이었다.
카밀라도 그녀를 밀어내지 않았다. 이렇게 다 큰 여자애가 이렇게 안기는 걸 좋아하는 것이 안쓰럽다는 듯, 샬롯의 머리를 몇 번이고 쓰다듬으며 오래도록 안아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