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화산파 공녀님 (118)화 (118/123)

118.

지금 탄티누스 후작께서…….

3황자 전하를 지지하신다고 하신 거야?

아니, 도대체 뭐가, 어떻게 돌아가는 거야? 다른 분들이 모두 3황자 전하를 지지하신다고 해도, 탄티누스 후작께서는…….

숨죽인 목소리들이 연회장 여기저기에서 당혹을 표했다.

그 목소리들은 셀렌 황후의 귀에까지 닿지는 않았지만, 그 술렁이는 분위기는 그 누구라도 모를 수가 없었다.

셀렌 황후는 입술을 파르르 떨며 제 언니를 노려보았다.

“……언니. 지금, 무슨 말을 했는지 알고나 있어?”

라모레이 탄티누스는 생각보다 태연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셀렌 황후가 제 언니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며 다시 한번 물었다.

“내가 무엇을 위해서 이 자리를, 황후 자리를 악착같이 차지했는지…… 어떤 마음으로 아이들을 키워 왔는지 알아? 아느냐고.”

다른 사람에게는 들리지 않을 만한 조그맣고 나직한 목소리였지만, 그 아주 작은 목소리에는 억눌린 분노와 당혹이 충분히 스며 있었다.

라모레이 탄티누스는 제 동생과는 다른 푸른색 머리를 쓸어 올리며 작게 한숨을 쉬었다. 그러곤 케이트의 손을 꽉 쥐며 답했다.

“폐하의 말대로입니다. 바로 그래서 방금의 지지 발언을 했습니다, 황후 폐하.”

“……뭐?”

“폐하께선 당신만 아이를 키웠다 생각하시겠지만, 아이를 키운 건 폐하만이 아닙니다. 물론 폐하의 아이들은 귀하디귀한 황자 전하시지만요. 저에게도 아이가 있습니다. 폐하께선 관심이 없겠지만.”

라모레이의 말은, 이 상황과 전혀 맞지 않았다.

황태자를 선정하는 자리에서, 이게 무슨 쓸모없는 대화란 말인가.

게다가, 황후를 상대로 할 법한 말도 아니었다. 언니였지만, 건방지기 짝이 없는 말이었다.

셀렌 황후가 목소리를 높이지 않으려 애를 쓰며 되물었다.

“지금 무슨 말을 하는 거야?”

라모레이는 황후의 그런 되물음을 마치 예상했다는 듯 작게 웃었다.

“저도, 폐하처럼 제 아이에게 제가 가진 권력을 물려줄 상상을 해 봤습니다. 그리고 이다음 세대가 어떻게 살아갈지를 생각해 봤습니다. 그러니까 안 되겠더라고요.”

“……언니! 정신이 나갔어?”

“나라가, 무너질 겁니다. 비유가 아니라, 정말로.”

“……나라가? 하…… 그러니까 언니는 지금, 리카르도가 황제의 자리에 오르면 그럴 거라는 건가?”

“제가, 황후 폐하께 존댓말을 쓰면서부터 폐하께서는 제 모든 말을 우습게 생각하셨죠. 하지만 저도 제 의견을 가지고 있답니다. 그래서 다시 생각을 해 보았습니다. 내가 해야 하는 일이 무엇인지. 내가, 케이트에게 주어야 하는 게 정말로 공고한 권력인지.”

황후의 표정이 무너져 내렸다. 온화한 미소는커녕, 무표정조차 유지하지 못한 채로 그녀가 제 언니를 노려보았다.

귀족들이 가득 들어찬 연회장. 각기 라모레이 탄티누스의 발언에 대한 경악으로 대화를 나누고 있었기에 이 순간 황후를 주목하는 이는 아무도 없었지만, 그렇다 해도 이런 위험천만한 대화를 연회장 한복판에서 나누게 될 줄은 몰랐다.

“……그래서? 그래서 택한 게, 바보 같은 선택지야? 3황자가 황제가 된 세상에서, 탄티누스 후작가가 어디 제대로 자리 잡고 살 수 있을 것 같아? 언니가 제정신이야?”

라모레이 탄티누스는 더 이상 대답을 하지 않고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더는 할 말이 없었다.

라모레이도 셀렌의 말이 맞다고 생각했다. 여태껏 그녀는 선대 탄티누스 후작들이 그랬듯 제 가문이 제대로 살아남는 게 우선이고, 제 가문의 피를 이은 자가 황제가 되는 게 우선이라고 생각하며 살았다.

하지만 그 공고하던 세계에 균열이 간 것은, 케이트가 슬라임에게 죽임을 당할지도 모르는 일을 겪었던 순간. 샤를로테 세티야라는, 보잘것없던 아이가 두각을 드러내기 시작한 순간이었다.

그날부터 라모레이는 천천히 의구심을 가지고 관찰했다.

과연 제가 케이트에게 잘 하고 있는 건지. 제 남편이 케이트에게 강인해지라고 강요하는 것을 방관하고 있는 건 아닌지.

자식인 케이트의 행복보다 권력에 눈이 멀어 있는 건 아닌지.

하나의 균열이 생긴 뒤로는, 줄곧 의심은 짙어져 갔다.

케이트와 샤를로테가 제법 친하게 지내면서부터, 소심하고 말수도 별로 없던 케이트는 완전히 다른 아이처럼 밝아졌다. 검에 대해서도 스스로 나서서 더 발전하려고 노력했고, 이전까지만 해도 어린아이처럼 굴던 부분들도 완전히 없어지고 속이 넓고 여유 있는 아이가 되었다.

아이들은 본래 주위의 영향을 쉽게 받는다지만, 소심하기만 하던 케이트가 그렇게 단기간에 크게 변할 줄은 상상도 하지 못했다.

그래서, 샤를로테를 근처에 두고 관찰하면서 믿어지지 않을 만큼 어른스러운 그녀와 더불어 3황자인 요제프의 인품도 눈여겨보게 되었었다.

그 이전까지만 해도, 굳이 요제프 황자에 대해 살펴볼 필요도 느끼지 못했었다. 그저 방해되는 대상이고, 괜히 두각을 드러내서 일을 귀찮게 만든다고만 생각했다.

그런데 샤를로테라는 아이 하나가 모든 것을 보는 시각을 바꿔 놓았다.

동생의 아이인 만큼 자주 볼 기회가 있는 리카르도 황자와 요제프 황자는 전혀 달랐다. 정말로 하늘과 땅만큼 다른 성품을 지니고 있었다. 차마, 리카르도 황자를 황제로 추대하고 싶다는 말이 나오지 않을 만큼.

리카르도가 10년 전 칼그림자의 날에 직접 보인 추태가 아니더라도, 그것을 제쳐 두더라도…… 스스로 자신이 가고 싶은 길을 알고 끊임없이 노력해 나가는 요제프와, 단순히 엄마가 제시한 길을 꾸역꾸역 살아가고 있는 리카르도는 너무 격이 달랐다.

그리고 그런 고민에 방점을 찍은 건, 바로 그제였다.

요제프 황자가, 세레스 국에서 돌아온 이후의 일이었다.

요제프 황자는 탄티누스 가를 단독으로 방문하여 그녀에게 독대를 청했다. 샤를로테 때문에 워낙 자주 듣고 본 바가 있어서인지, 라모레이도 굳이 그 독대를 거절하고 싶지는 않았다.

요제프 황자는 따지고 들자면 적진에 혼자 들어온 셈인데도 제법 여유가 있는 태도로 그녀에게 말했었다.

‘내가 오늘 여기에 온 것은, 그대를 설득하기 위함이 아니야.’

황자는 침착한 얼굴로 자리에 앉기도 전에 대뜸 본론을 꺼냈었다. 오래 있을 생각 따위는 없다는 듯.

‘……무슨 말씀이신지요.’

‘그냥, 할 말이 있어서 왔다.’

‘할 말이라 하심은…….’

솔직히 뻔하다고 생각했다.

황자가 제게 할 말이라면.

하지만, 요제프 황자의 입에서 튀어나온 말은 전혀 다른 것이었다.

‘내가, 황태자가 되더라도. 아니, 내가 황제가 되더라도 탄티누스 후작가에 해를 끼치는 일은 없을 것이다. 지금 하는 사업 중, 불법적인 것에는 제지가 있겠으나 그 외에는 일절 손을 대지 않을 생각이다.’

기가 막혔다.

올해로 스물두 살이던가, 요제프 황자의 나이가.

그런 자가, 어떻게 저런 말을 대뜸. 그것도 이 나라에서 권세로 치자면 부러울 자가 없는 탄티누스 후작가에 홀로 들어와서 한단 말인가.

라모레이 탄티누스는 요제프 황자를 빤히 바라보며 되물었다.

‘하신 말씀은 잘 알아들었습니다. 그런데, 왜 황제가 되고 싶다고 생각하시는 것인지, 여쭈어도 괜찮겠습니까?’

그래. 이게 줄곧 궁금했다.

샤를로테도 그랬다. 그리고 요제프도 그랬다.

둘 다, 망설임이라곤 일체 없이 제 목표를 향해 나아갔다.

하지만 리카르도도 그렇고 샤를로테를 만나기 이전의 케이트도 그랬고…… 아이들이란 본래 그렇게 뚜렷한 목표를 가지지 않았다. 부모가 제시한 길이 그저 제 목표인 줄 알고 살아가는 아이들은 많았지만, 그게 아니라 제 뜻으로 아주 어린 나이부터 제 길을 고찰할 줄 아는 이들은 아주 드물었다.

초록은 동색이라고, 어떻게 샤를로테와 요제프는 둘 다 그럴 수 있는지 너무 궁금했다.

요제프는 제가 한 말과는 전혀 다른 질문임에도 진지하게 고민하는 얼굴을 하더니, 이곳에 온 뒤로 보인 눈빛 중 가장 부드러운 눈빛을 보이며 대답했다.

‘로테를, 내 약혼녀를 지켜 주기로 했으니까. 그러기 위한 힘이 필요해.’

솔직히 상상도 못 한 대답이었다.

샤를로테 세티야야말로 쟁쟁한 세티야 가의 직계 막내딸이고, 가주뿐만 아니라 온 식구의 사랑을 독차지한 것으로 유명한 아이인데.

하지만 이제는 다들 잊고 있었지만, 대략 10년쯤 전에는 지독히 차별당하고 따돌림받던 아이라는 것도 분명 라모레이는 기억하고 있었다. 그것을 기억하고 있는 건, 케이트가 샤를로테를 따돌렸던 무리 중 한 명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케이트가 샤를로테와 잘 지내면서도 끊임없이 미안해하고 있다는 것도, 그로 인해 더 나은 사람이 되려고 노력하고 있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그때, 마음속에서 어떤 저울의 추가 확실히 한쪽으로 기울었다.

차라리 대단한 권력욕이었다면 권력을 누가 가지는 게 나을지 가늠이라도 해 보았을 텐데, 제 약혼녀를 지키고 싶다는 말에는 응전할 말도 생각나지 않았다.

라모레이는 허탈하게 웃으며 되물었다.

‘그러면, 황자 전하. 그 너그러운 제안은 제게만 해 주시는 것입니까? 가문에 해를 끼치지 않겠다는?’

만약 그 제안이, 요제프 황자 나름으로 황후파 인사들을 설득하는 방법이라면 누구에게나 하고 다닐 법했다.

하지만 요제프 황자는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해충을 갈아엎지 않고는, 이 나라는 앞으로 나아가지 못해. 탄티누스 후작가가 내가 방문할 가문의 마지막인 건 맞지만, 총 여섯 명뿐이다. 내가 이 말을 전하기로 한 건. 어쨌든, 내가 황태자가 되는 건 결정된 사안이다. 판단은 알아서 하도록.’

이미 결정된 사안이라는 말을 이제 와서 한다.

그건 허언이 아닐 터였다.

라모레이는 요제프 황자가 언급한 여섯 명에 대해 떠올려 보았다. 누군지 말하지 않아도, 대충 목록이 눈에 선히 그려졌다.

해충을 갈아엎는다는 말, 이 나라가 앞으로 나아가야 한다는 말에서 라모레이는 저도 모르게 쓴웃음을 지었다.

그 해충의 범위에는 제 여동생이 포함되어 있을지도 몰랐으니까.

그토록 약혼녀 샤를로테를 소중히 여기는 요제프 황자이니만큼, 그녀를 해치려 했던 셀렌 황후에 대한 감정이 좋을 리가 없었다.

‘이미 저 황자는, 고작 황태자가 아닌, 훗날 그가 황제가 된 뒤를 생각하고 있어.’

그러니까, 황후파의 모든 귀족에게 잘 보이는 것보다는 정확히 제가 필요한 자와 쳐낼 자를 구분하고 있는 거다.

동시에 지금 마지막 기회를 주는 거다. 어차피 결론이 결정 난 사안에 찬동할 것인지. 혹은 쓸데없이 힘을 뺄 건지.

그런 생각이 들자, 어딘가 소름이 오싹 돋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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