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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화 (5/120)

제5화

“리온, 리온.”

나는 매일같이 리온의 방에 찾아가 문을 두드렸다.

그의 얼굴을 보는 것은 꽤 쉽지 않았다. 사람은 어려우면 어려울수록 더욱 오기가 생기지 않은가.

혹시나 그가 날 알아보지 못할까 봐 오늘은 특별히 머리에 푸른 리본을 장착했다.

드레스에도 주렁주렁 리본을 달았다.

“아가씨, 오늘따라 리본이 너무 과한 것 같아요.”

“아니야. 이 정도는 해야 내 노고를 알아줄 거야.”

“뭔지는 모르겠지만, 부담스럽지 않을까요?”

“으음, 그럼 더 기억에 남겠지!”

충격 요법이라고 들어 봤는가?

사람이 놀랄수록 기억에 더 오래 머문다고 한다.

나는 그 점을 노려 리온에게 오랫동안 기억되고 싶었다.

리온이 방문을 열어 줄 때까지 나는 문 앞에서 웅크리고 앉아 기다렸다.

“아, 다리 저려. 리온이 문을 안 열어 줘서 다리에 쥐가 났어.”

“……돌아가.”

“여긴 내 집인걸?”

“……치사해.”

“맞아, 나 치사해. 근데 며칠 동안 얼굴도 안 보여 주는 리온도 치사해.”

툴툴거리며 방문을 쿵쿵 찼다.

“아! 다리 저려! 리온이 나오면 좋을 텐데!”

반응이 없는가 싶더니 이내 문이 열리고 빼꼼 리온이 얼굴을 내밀었다.

“……리본.”

“맞아, 짜잔!”

나는 한 바퀴 돌며 그에게 활짝 웃었다.

“어때? 누가 봐도 나지?”

“풉.”

리온이 고개를 숙이고 웃기 시작했다. 먹힌 건가? 먹혔나 봐!

나는 입을 가리곤 가만히 그의 말을 기다렸다.

“내가 졌어. 들어와.”

그의 말에 나는 기쁜 마음에 손을 잡고 위아래로 흔들었다.

조금 가까워진 기분이 들어 내심 기분이 좋았다.

리온은 잡힌 제 손을 빤히 내려다보더니 얼굴을 붉혔다.

짜식이 조금은 쑥스러운 모양이다.

* * *

“요즘 들어 꽤 자주 저를 찾으시는 것 같네요.”

나는 에드가를 보며 고개를 치켜들었다.

호랑이 앞에서 주눅이 들었다간 잡아먹히고 만다. 그러니 이럴 땐 뻔뻔한 태도로 나가는 것이 맞다.

“꽤 자랐군.”

“그런 시시한 이야기는 됐어요.”

“……그래, 본론으로 들어가지. 어떻게 알았지? 양피지 말이다.”

“음, 그게 궁금하신가요?”

에드가는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

아무것도 모르는 아이라 생각했는데 사업에 대해 꽤 지식이 있는 것 같으니 호기심이 샘솟는 모양이다.

정말로 양피지 사업을 접었는지 책상에는 종이가 놓여 있었다. 무시할 줄 알았는데 무슨 변덕일까.

“비밀이에요.”

그가 턱을 매만지던 손길을 멈추곤 나를 빤히 보았다.

“건방 떠는 걸 보니 간도 컸나 보군.”

당연히 사람이 자라면 몸 안의 장기도 자라지 않을까요? 라고 말하고 싶지만 차마 입 밖으로 내뱉진 못했다.

나는 내 목숨을 소중히 여기는 사람이었으니까.

“그때 말씀드렸잖아요. 아버지를 닮아 이쪽으로 머리가 좋은가 보죠.”

“……나를 닮아?”

“그럼, 제가 누굴 닮았겠어요?”

당연한 걸 되묻고 그래. 아이는 여자 혼자 낳아?

내 몸에는 에드가의 유전자도 있었다. 그러니 그를 닮은 것도 분명 있겠지.

붉은 머리칼만 해도 똑 닮았는데 뭘 저렇게까지 놀라고 그러는 걸까.

나를 내려다보는 에드가의 시선에 약간의 분노가 서려 있었다.

건방을 떠는 내가 마음에 들지 않는 듯했다.

“제가 알려 주면 뭘 주실 건가요? 아버지는 정보상을 하시면서 기본적인 룰도 모르시나요?”

“하.”

“정보를 얻고 싶으시면 응당한 대가를 내놓으셔야죠.”

나는 팔짱을 끼곤 아버지를 빤히 보았다.

시선 하나 피하지 않고 눈을 부릅떴다.

긴장해서 식은땀이 났지만, 여기서 물러서면 결국 지고 마는 것이다.

“지금이라도 내쫓기고 싶나 보군.”

에드가는 치사하게 또 거취를 들먹였다.

나는 하는 수 없이 한발 물러서기로 했다. 하지만 정말 그에게 말한 것 말고는 말해 줄 것이 없었다.

“하지만 정말 그것뿐이에요. 디리아가 그랬어요! 저는 머리가 좋다고.”

어릴 때부터 콕 박혀서 글이나 줄줄 읽어 댔으니 그럴 법도 했다.

머릿속에 든 것도 많았고, 글도 빨리 뗀 편이었다.

심지어 다른 나라의 언어까지 읽을 줄 알았으니 정말로 영재일지도 모른다.

“쓸모가 있는 모양이군.”

에드가의 텅 빈 눈동자가 여전히 내게 꽂혀 있었다.

그는 툭툭 테이블을 치더니 이내 멈추며 물었다.

“좋아. 뭘 원하지?”

“노예 사업 그만두셨으면 해요.”

“……오냐오냐해 줬더니, 건방진 말을 잘도 내뱉는구나.”

아, 역시 이건 너무 갔나? 하지만 지금 당장 멈춰야 하는 것은 그 사업이었다.

에드가가 화를 내기 전에 빨리 타당한 이유를 대야 했다.

“다른 이들이 말해 줬을 리도 없고, 아는 이도 드문데 네가 어떻게 안 걸까.”

에드가의 시선이 주변에 서 있는 시녀와 기사들을 빠르게 훑었다.

나는 다른 사람에게 불똥이 튀는 것을 막기 위해 재빨리 말했다.

“저번에! 아버지의 책상에 적힌 서류에서 봤어요. 사람들의 인적 사항이 적혀 있는 거요.”

“허락 없이 마음대로 훔쳐보기까지 하고.”

“보이는 걸 못 본 척할 수는 없잖아요…….”

나는 기어 들어가는 목소리로 눈치를 보았다.

손가락을 꼼지락거리며 에드가를 올려다보자, 그의 눈이 매섭게 가늘어졌다.

“난 손해 보는 짓은 하지 않는다.”

“대, 대신 그보다 더 좋은 사업을 알려 드릴게요.”

노예만큼은 손을 떼게 만들어야 했다.

훗날 황제가 귀족들의 노예 시장을 전부 폐지하기 위해 단행한 법은 엄청났다.

거기에 휘말리게 된다면 아버지 역시 황실에 더욱 적대감을 보이고 말 것이다.

그것은 곧 나의 죽음을 재촉하는 길이었다.

아버지가 정확히 무슨 연유로 황실을 싫어하는지는 모른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나쁜 일이 정당화되진 않는다.

그러니 내 손으로 막을 수 있는 것은 막아 보는 수밖에.

“들어나 보지.”

“아버지, 누가 확실하지도 않은 계약에 자신의 패를 까겠어요? 저는 그리 멍청하지 않아요.”

“……좋아, 계약서를 쓰지.”

에드가는 서랍에서 서류 하나를 꺼내 책상에 놓았다.

나는 그제야 만족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자세를 고쳐 잡았다.

고객과의 거래에서는 예의를 지켜야 하는 법이니까.

“이리 오세요. 공평한 위치에서 해야 하잖아요?”

“하?”

서류를 잡은 손에 힘이 들어가 종이가 구겨졌다.

나는 마른침을 삼키며 테이블을 향해 눈짓했다.

힘쓰지나 말고 앉아서 계약서나 쓰라는 뜻이었다.

* * *

“정말 접으실 겁니까?”

“뭐, 노예 사업만큼 위험한 일은 없었으니까.”

“하지만 귀족들이 반발할 텐데요.”

에드가의 옆을 지키고 선 보좌관이 걱정스러운 투로 말했다.

원래 벨루아 가문은 줄곧 어두운 사업을 해 왔다.

그 이유를 그는 알고 있었다. 아마도 이 가문에서 에드가를 제외하고 전말을 아는 이는 저밖에 없을 것이다.

“양피지 사업은 접을 생각이었지만, 노예는 아니지 않습니까.”

보좌관인 헤링턴의 말이 옳았다.

에드가는 원래 양피지 사업을 이번까지만 하고 처분할 생각이었다.

그도 동물들의 상태가 요즘 들어 좋지 않다는 정보를 입수했었다.

정보상을 이끌고 있었으니 그에 대한 정보를 몰랐을 리 없었다.

장마가 온 이후부터 다른 지역에서 하나둘 동물들에게 병이 생긴 사실을 들었으니까.

“계약까지 하시다니. 대체 무슨 생각인지 모르겠습니다.”

“그쪽에 한 번 알아봐. 촉이 꽤 뛰어난 것 같으니까. 황실에서 알게 된다면 골치 아프긴 했지.”

어떻게든 제 가문을 끌어내리려 했으니 이상할 것도 없었다.

벨루아 가문은 겉으로는 멀쩡한 정보상을 하고 있었지만, 비밀리에 온갖 일들을 도맡았다.

황실에 대적하기 위해 힘을 쌓고, 귀족들의 마음을 얻고, 재력을 모아왔다.

“아직, 아직이야.”

에드가는 주먹을 쥐었다.

어느새 자란 엘르 나타시아는 제 아내를 빼닮았다. 붉은 머리카락과 푸른 눈동자는 저를 닮았지만…….

‘보지 않는 게 나을 뻔했군.’

잊고 살아왔던 그였다. 잊으려 했었다.

보지 않는 게 편했고, 관심을 주지 않는 것이 아이에게 좋았다.

에드가가 황실을 대적하게 된 이유는 그의 아내, 셀리느의 죽음이었다.

셀리느 델리샤는 황후의 손에 의해 죽음을 면치 못했다.

그 원인은 제 아내의 언니, 데펠로아를 향한 황제의 탐욕에 있었다.

황제는 데펠로아를 가지기 위해 겁탈하여 정부로 삼았다.

그녀는 반려가 있었음에도 운명의 짝을 맺지 못했다.

궁에 갇혀 하염없이 눈물만 흘리는 그녀를 죽이기 위해 황후는 일을 꾸몄다.

이 사실을 알게 된 셀리느는 언니를 구하기 위해 사람을 쓴다. 에드가에겐 알리지 않았다.

황실에 대적하는 것은 즉, 반기는 드는 것.

그것은 가문의 멸할 정도로 가혹한 형벌이 내려진다.

그것을 셀리느는 똑똑히 알고 있었다.

그렇기에 그녀는 자신이 낳은 핏덩이인 엘르를 지켜 줄 사람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로 인해 홀로 뛰어든 것이다. 에드가와 벨루아 가문은 제가 할 일과 관련이 없다는 것을 보여 주기 위해.

황제는 자신이 저지른 일이 있는 탓에 황후의 만행을 눈감아 주었다.

다른 이들의 입에 오르내리지 않기 위해 벨루아 가문에도 변방으로 쫓겨나는 것 외에 다른 처벌은 내려지지 않았다.

원인이었던 데펠로아와 셀리느가 죽었으니 묻으면 그만이었다.

‘어떻게 혼자 떠날 수 있지?’

에드가는 셀리느를 떠올리며 의자에 몸을 기댔다.

모든 일이 엘르 탓인 것만 같았다. 그래서 그녀를 보지 않았다. 앞으로도 그럴 것이라 여겼다.

“괜찮으십니까?”

헤링턴이 에드가의 어두워진 표정을 보며 조심스레 물었다.

상념에서 깨어난 그는 눈을 감고 나지막하게 말했다.

“정리해. 아무래도 감시를 좀 해야겠어.”

내 딸이 부쩍 들어 똑똑해진 기분이 드니 말이야.

에드가는 어딘가 모르게 달라진 엘르의 분위기가 거슬렸다.

스쳐 지나가듯 예전에도 보긴 했지만, 어쩐지 점점 크면서 더 건방져지는 기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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