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7화
“저, 오늘 엘르 님은 좀 늦으십니다.”
“알고 있어요.”
리온은 가만히 창밖을 보았다.
처음엔 누가 누구인지 알아보지도 못했지만, 꾸준한 노력으로 저택의 사람들은 구별이 가능하게 되었다.
그 사실을 아는 이들은 극히 드물었다.
리온은 사람들을 잘 알아보지 못하는 척을 하며 지내왔다.
어쩐지 그래야 할 것만 같았다.
‘이 향을 쓰는 건 그녀밖에 없지.’
매일 제 침실을 정리해 주는 다정한 시녀. 디리아.
시녀들은 항상 같은 옷을 입었기 때문에 그들이 어떤 일을 하는지는 알아보기 쉬웠다.
다만 다 똑같은 복장 때문에 누가 누구인지 구별하는 데에는 꽤 오랜 시간이 걸렸다.
디리아를 구별하기까지도 2년.
사람을 구별하기 시작했을 때 기뻐하던 엘르의 표정을 잊을 수 없었다.
그는 엘르의 미소를 보기 위해서 열심히 노력했다.
리온은 단 한 사람, 엘르만은 분명하게 구분할 수 있었다.
특유의 체향과 함께 목소리가 달콤했다. 그녀의 걸음걸이도, 습관도 모든 것을 외웠다.
엘르는 저도 모르게 웃을 때 코끝을 찡그린다.
멍하니 생각에 잠겼을 때는 목덜미를 손으로 꾹 누르는 행동을 반복했다.
그는 알게 모르게 엘르를 알아보기 위한 모든 것을 눈에 담아 왔던 것이다.
엘르는 리온이 여전히 푸른 리본으로 저를 구별하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지만, 그것은 큰 착각이었다.
푸른 리본은 저 멀리서 그녀가 오고 있다는 것을 정확하게 해 주는 매개물이었을 뿐이었다.
제게 달려오는 뜀박질도, 제 이름을 부르는 악센트도 다 기억했으니까.
‘벌써 5년밖에 남지 않았네.’
시간은 왜 이리도 빨리 흐르는 건지 리온은 바싹 속이 타들어 갔다.
“오늘도 키가 크셨네요.”
“……또 컸나요?”
“금세 어른이 되시겠어요.”
시녀의 말에 리온은 입술을 잘끈 깨물었다.
어른이 되고 싶지 않았다.
어려지면 엘르와 평생 같이 있을 수 있는 걸까?
“어른이 되고 싶지 않아요.”
“저런, 엘르 아가씨와 떨어지고 싶지 않으신가 보군요.”
리온을 보며 시녀가 낮게 신음했다. 계속해서 붙어 있었으니 떨어질 날이 다가오는 것이 달갑지 않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리온이 커 갈수록 주변 사람들은 긴장했다.
정말로 그가 소문에 떠도는 그 저주받은 아이일까?
‘하지만, 전혀 붉은 눈동자가…….’
순간 시녀는 창밖을 빤히 보고 있던 리온의 눈빛에 이채가 서리는 것을 보았다.
흑빛 눈동자에 순간적으로 어른거렸던 붉은빛.
그것은 틀림없이 자신이 잘못 본 것은 아닐 터.
“……헉.”
그녀는 저도 모르게 마주한 리온을 보며 몸을 떨었다.
마주한 눈동자에 선명한 붉은빛이 돌자 입이 꾹 하고 닫혔다.
“왜 그래요? 디리아.”
디리아의 행동은 늘 정형화되어 있었다.
제게서 한 걸음 떨어져 있는 것 하며, 자신이 알아볼 수 있도록 배지를 착용한 것까지.
나른한 목소리와 함께 창문에 걸터앉은 리온이 디리아를 향해 활짝 웃었다.
“맞아요, 떨어지고 싶지 않아요. 그러니까 난 아직 어린애예요.”
“맞습니다. 리온 님. 아직 어린애로 보여요.”
디리아는 홀린 듯 고개를 끄덕였다.
훅하고 제 몸에 깃든 무언가가 빠져나가는 느낌과 함께 털썩 그녀의 몸이 바닥으로 쓰러졌다.
“엘르, 다들 내가 네 곁을 떠나길 바라나 봐.”
매번 정해진 당번으로 시녀들이 제 방을 들어왔고, 각자 착용하는 배지의 색이 달랐다.
엘르는 싸늘하게 내뱉는 말과 달리 제법 저를 아껴 주고 있었다.
그런 생각을 하자 한결 기분이 나아졌다.
리온은 바닥에 쓰러진 디리아를 흘깃 보곤 저 멀리서 백작저로 들어오는 마차를 보았다.
그는 단번에 마차에 탄 것이 엘르일 것이라 느꼈다.
그냥 직감이 그리 말하고 있었다.
‘이 시간이라면, 엘르일 가능성이 크겠어.’
엘르가 오기 전에 디리아를 깨워 밖으로 내보내야 했다.
“디리아, 괜찮아요?”
그는 느릿하게 창가에서 일어났다.
아무것도 모르는 얼굴로 그녀를 흔들어 깨웠다.
정신을 잠시 잃었던 디리아가 영문을 모르는 표정으로 부스스 몸을 일으켰다.
“어머, 내가 왜…….”
“갑자기 쓰러지셨어요. 여기 물이요.”
리온은 그녀에게 다정한 미소를 머금은 채 물 컵을 건넸다.
“고마워요.”
디리아는 고개를 옆으로 기울이곤 물을 들이켰다.
어쩐지 뭔가 까먹은 느낌이 들었지만, 생각나지 않았다.
“누군가 온 것 같아요.”
리온의 말에 디리아가 고개를 끄떡이곤 리온의 손을 잡았다.
“엘르 님이 오셨나 봐요. 그럼 어서 마중 가셔야죠.”
문을 열자 엘르를 향해 달려 나가는 리온을 보며 디리아는 뻐근한 목덜미를 쓸었다.
‘이상하네, 뭔가 기운이 빠지는 게.’
아무래도 피로가 쌓인 모양이다.
* * *
“리온, 그게 아니야. 다시.”
나는 허리춤에 손을 올리곤 리온을 향해 엄하게 꾸짖었다.
마나를 아직 잘 다루지 못해 걱정이었다.
“흡수하기만 해선 안 돼. 턱없이 부족해, 그건 너를 방어하지 못해.”
“하지만 난 너만 지키면 되는데.”
리온은 느릿하게 눈을 깜빡이며 나를 보았다.
그런 눈으로 날 보면서 유혹하지 말란 말이야.
그는 알까? 제 눈빛이 어떠한지. 아마도 모를 것이다.
“리온, 내 걱정은 하지 마. 난 늘 네가 걱정이니까.”
리온은 성인이 된 후 문양이 생기게 되고, 각성하게 되면서 마나가 폭발하게 된다.
“내가 마나를 잘 다루게 되면 엘르 너에게 좋은 거지?”
“음, 도움이 되겠지? 리온, 난 네가 좋은 곳에 갔으면 좋겠어. 네 힘을 알아주는 곳 말이야.”
“……나는 이런 힘 필요 없어.”
그는 제 손을 쥐었다 피며 눈을 내리깔았다.
자기 힘이 원망스러울 법도 했다. 하지만 그 힘이 있기에 그가 살아남을 수 있는 것이었다.
“난 다른 사람들이 널 무시하는 게 싫어. 혐오하는 눈빛으로 보는 것도 싫고.”
“…….”
“리온, 그러기 위해선 다른 사람들이 무시할 수 없는 사람이 되어야 해.”
어차피 모든 사람이 네 발아래 무릎을 꿇겠지만.
지금부터라도 그의 여린 마음이 좀 더 단단해질 필요가 있었다.
아 물론. 저한테는 조금은 물러도 괜찮지만.
“그럼 엘르, 네 곁에 있을 수 있는 거야?”
지금이야 이런 말을 하겠지만, 어차피 그는 나를 잊게 될 것이다. 아마도 기억조차 못할지도 모른다.
나는 씁쓸한 미소를 애써 삼키며 모른 척 물었다.
“응?”
“다른 사람이 날 무시할 수 없게 되면 말이야.”
“내 곁에 있는 건 힘이 없어도 가능해.”
그 누구도 날 신경 쓰지 않을 테니까.
지금은 리온에게 큰 힘이 나타난 것도 아니고, 문양이 발현되어 제니스와 운명이 결정된 것도 아니니 괜찮았다.
그가 누구인지, 리온이 어떤 힘을 가지고 있는지 다른 사람들은 몰랐으니까.
나는 그가 누구인지, 누구와 결혼하게 될지는 이미 알고 있지 않은가.
슬프게도 그의 운명은 정해져 있으니까. 내 운명도 정해져 있긴 매한가지였지만.
주인공이 아닌 나의 운명쯤은 조금은 비틀어져도 괜찮지 않을까?
살고 싶어서 이렇게 노력하는데 어쩌면 신이 불쌍히 여겨 살려 줄지도 모른다.
리온은 내게 손을 뻗었다가 금방 거두었다.
“하지만 그때 그랬잖아. 너는 다른 사람과 결혼하게 될 거라고.”
그의 목소리가 물기에 젖어 들어갔다.
정작 슬퍼해야 할 건 나인데, 왜 리온의 눈빛이 흔들리는 걸까.
“그렇겠지? 상대가 누가 될진 모르겠지만.”
그 전에 내가 죽을지도 모르고. 솔직히 내 미래에 대해선 자신이 없었다.
한 치 앞도 모르는 상황에 결혼이라니 우스운 말이다.
나는 망설이며 내게 조심스레 묻는 리온을 쳐다보았다.
뭐가 그리도 궁금한 걸까.
“만약 내가 강해지면, 엘르도 싫어하는 사람과 결혼하지 않아도 돼?”
“음…….”
그건 커 봐야 알지 않을까?
내가 싫어하는 결혼일지 아닐지는 지금 당장 알 수가 없으니 말이다.
일단 반려의 문양이 나타나지 않을 테니 결혼에 대한 생각은 해 본 적이 없었다.
‘요즘 들어 자꾸 이상한 생각을 하는 것 같단 말이야.’
나는 리온의 두 뺨을 찰싹하고 때리며 붙잡았다.
“아야……”
화들짝 놀란 리온의 얼굴이 꽤나 귀여웠다.
쓸데없는 생각이 많아지면 곤란한 법이다.
나는 그가 더 이상 묻지 않았으면 하는 마음으로 물었다.
“리온, 혹시 나랑 떨어지는 게 싫어?”
“어른이 되지 않았으면 좋겠어.”
나는 리온의 어리광에 픽 하고 웃음이 났다.
“나도 그래. 하지만 네가 어른이 된 모습이 궁금하기도 해.”
어른이 된다는 것은 그리 좋은 일은 아니었다.
복잡한 사교계에 발을 들여야 했고, 싫어하는 사람들의 비위를 맞추고 나 자신이 점점 사라지게 될지도 모른다.
실리와 이익을 추구하기 위해 양심마저 버린 내 아버지를 보아라.
그럼에도 불구하고 리온의 어른이 된 모습이 궁금하긴 했다.
“……궁금해?”
“응, 아마도 리온은 근사한 어른이 될 거야.”
상상만 해도 기분이 좋았다.
커다란 키에 훤칠한 외모, 다부진 몸과 그 누구도 범접하지 못할 힘을 가진 리온의 모습이 머릿속에 그려졌다.
‘정말 근사할 거야.’
나는 바람에 흔들리는 리온의 머리카락을 보며 활짝 웃었다.
“그때 돼서 나 잊으면 안 돼.”
“네가 어디에 있든 찾아낼게.”
리온은 내 손을 잡고 손등에 가볍게 입을 맞췄다.
평소와 다른 그의 분위기에 흠칫 몸이 떨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