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2화
으흠, 제법 예쁜 것 같은데. 화려하긴 했지만 나쁘지 않았다.
붉은 머리카락이 잘 드러나는 하늘하늘한 흰색 드레스. 거기에 금빛 자수가 놓여 있었다.
제법 보는 눈은 있나 보네.
“진짜 가서 사고 치는 거 아니야?”
나는 온몸에 솜털이 곤두섰다.
아 허전해.
참, 그걸 안 찼네.
서랍을 열어 잘 놔둔 상자를 꺼냈다. 어김없이 손목에 차던 리본 공단 끈을 꺼내려는데…….
“아, 맞다.”
리온이 가져갔지. 데뷔탕트가 끝나고 주려나.
푸른색 리본을 매면 참 잘 어울릴 텐데.
나는 내심 아쉬운 마음이 들었다. 어쩐지 내 몸의 일부를 떼어 낸 기분이 든달까.
허전한 손목을 만지작거리며 생각에 잠겼다.
리온은 지금 뭐 하고 있을까.
괜스레 혼자 두고 가려니 마음이 이상했다.
“잠시 몰래 보고 갈까……?”
아마도 이 시간이면 훈련을 하고 있을 것이다.
드레스를 잡아 든 나는 조심스럽게 방을 나섰다.
연회장을 가기 전에 돌아다녔다간 어떤 잔소리를 들을지 모르니까.
도둑고양이 소리를 듣다 보니 정말로 그렇게 된 건지
발소리조차 내지 않고 살금살금 걸어 밖으로 향했다.
리온이 어디에 있는지 어떻게 아냐고?
지내온 세월이 몇인데 그걸 모르겠는가.
훈련장이 아닌 정원 안쪽, 사람들이 보이지 않는 곳에서 홀로 수련 중일 것이다.
나는 기분 좋은 풀 내음을 한껏 만끽하며 정원 안쪽으로 들어갔다.
꽃이 활짝 피어 향기가 바람을 타고 코끝을 스쳤다.
“저 꽃은 향이 좋네. 다음에 더 들여와 달라 해야겠어.”
화병에 꽂아 놔도 제법 좋을 것 같았다.
이런저런 생각을 하며 정원 안쪽에 다다른 나는 숨을 죽이고 빼꼼 나무 뒤에서 고개를 내밀었다.
“역시 저기 있네.”
그의 손목에 매여져 있는 푸른 리본이 눈에 들어왔다.
혹시나 잊어버릴까 봐 매고 있는 걸까?
‘어제는 매고 있지 않았는데.’
제법 훈련을 한 지 꽤 시간이 흘렸는지 그의 얼굴에는 송골송골 땀이 맺혀 있었다.
운동하는 남자……. 상상해 보아라. 살짝 벌어진 셔츠 사이로 보이는 탄탄한 가슴 근육.
툭 하고 튀어져 나온 울대의 울렁거림! 땀에 젖어 설핏 비치는 살.
페로몬이 절로 뿜어져 나오고 있었다.
나는 자연스럽게 어제 리온의 모습이 떠올랐다.
가벼운 옷차림, 실크와도 같은 잠옷…….
자, 잠시만. 그러고 보니 나도 잠옷이었지 않아?!
그 차림으로 리옷의 품에 안기고 잠이 들었단 말인가.
별안간 얼굴이 사색이 되었다.
괜찮아 별일 없었잖아. 그러니 된 거야.
나는 황급히 상념을 지워 내기 위해 세차게 고개를 저었다.
“그나저나 정말 열심히네.”
상념이라도 잊으려는 듯 리온은 훈련에만 집중했다.
살짝 일그러진 눈매가 매혹적이게 보였다.
나는 몰래 훔쳐보고 있었던 것도 잊었는지 나무 옆에 쪼그려 앉아 본격적으로 리온을 훔쳐봤다.
‘이제 진짜 다 컸구나.’
왠지 아이를 키운 엄마의 마음이 이럴까?
훌쩍 자라 남성미가 넘치는 리온을 보니 뿌듯해져 왔다.
“언제까지 계속 쥐새끼처럼 숨어서 지켜볼 거지?”
흠칫.
처음 듣는 날 선 목소리에 몸을 웅크렸다.
들킨 건가……? 그런데 지금 나보고 쥐, 쥐새끼라고 한 것 같은데.
나는 당황스러운 표정을 갈무리하지 못한 채 눈을 깜빡였다.
언제부터 알고 있었던 건지 그의 고개가 어느새 내 쪽을 향해 돌려져 있었다.
꼼짝없이 마주하게 된 시선이 허공에서 얽혔다.
훅하고 부는 바람에 머리카락이 흩날리며 둘 사이를 스쳐 지나갔다.
“어…… 리온?”
나는 다리가 풀려 일어서지도 못한 채 그 자리에 굳었다.
떨림이 묻어난 목소리에 리온의 눈동자가 크게 홉 뜨였다.
* * *
리온의 미묘하게 미간이 좁혀지는가 싶더니 안도한 듯 짧게 한숨을 내뱉었다.
“…… 엘르. 너구나.”
아까와는 달리 부드러운 음성이 귓가를 파고들었다.
나를 보며 활짝 웃는 미소가 햇살에 비쳐 눈이 부실 정도였다.
“훈련을 하다 보니 나도 모르게 날이 서서.”
그는 내게로 다가와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입매를 끌어 올렸다.
아 역시. 어제 일은 내 오해였나 보다. 리온이 날 한 번에 알아봤을 리 없는데.
나는 살짝 놀란 가슴을 진정시키곤 옅은 미소를 머금었다.
“그런데 왜 리본을 매고 있는 거야?”
나는 리온의 손목을 가리키며 물었다.
“잊어버릴까 봐. 이건 엘르 네 거니까.”
“으응. 그렇구나.”
하지만 잊어버리면 또 비슷한 걸 만들면 되는데…….
리온의 말에 나는 어깨를 으쓱했다.
그제야 안도한 듯 리온이 해사하게 웃었다.
“아……! 맞아. 리온이 나를 방에 데려다준 거야?”
“놀랐는지 갑자기 쓰러졌어. 걱정 마. 우리 걸리진 않았어.”
리온은 주변의 기사들을 훑으며 어깨를 으쓱였다.
“뭐…… 리온이 그렇게 말한다면 안심이지만.”
하긴, 연회 때문이라기엔 너무 오바였다.
이리저리 바쁘게 움직이고 경비가 삼엄해진 느낌이 들었으니까.
“얼굴 봤으니 됐어! 이만 가 봐야겠다.”
“벌써……. 가려고? 아, 시간이 되었나 보네.”
“응 진짜 잠깐 시간 내서 온 거야. 그러니까 나 올 때까지 쿠키 먹으면서 있어. 빨리 올게.”
연회에 계속 있을 생각은 없었다.
황제에게 인사만 하고 오면 된다. 벨루아 가문은 여전히 건재하다. 뭐 이런 게 목적인가?
진짜 에드가가 무슨 생각인지 알 수가 없으니 장단을 맞춰 주기도 어려웠다.
‘나중에 한번 떠봐야겠어.’
나는 내 목을 매만지며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내 불안한 눈빛을 알아차렸는지 리온이 부드럽게 내 얼굴을 감싸 안았다.
“미안해 못 알아봐서. 내 눈에 이렇게 예쁜 건 너밖에 없는데.”
갑자기 이 상황에 저런 달콤한 말이라니.
리온답다고 해야 할지.
“정말인데.”
나는 결국 리온의 말에 웃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푸흡. 그게 뭐야.”
저렇게 천진난만한 얼굴로 능글맞은 말을 잘도 내뱉지 않은가.
“정말 점점 더 능글맞아지는 것 같단 말이지.”
자연스레 내 얼굴을 잡은 그의 손을 떼어 내곤 어깨를 들썩였다.
“정말이야. 너무 예뻐서 아무 데도 보내고 싶지 않을 정도야.”
리온의 눈이 나른하게 가라앉았다.
그는 쪼그려 앉아 있는 나와의 시선을 맞추기 위해 몸을 숙였다.
길게 내려온 내 머리카락을 뒤로 넘기며 그가 더할 나위 없이 해사한 미소를 지었다.
앞으로도 저렇게 웃을 일만 있으면 좋을 텐데.
리온의 앞길에 있을 고난이 떠올라 입가가 썼다.
“정말 예뻐, 엘르. 특히 이게 마음에 들어.”
내 왼쪽 가슴팍에 달린 것은 리온이 선물해 준 붉은색 루비 브로치였다.
정말 이럴 때마다 양심이 콕콕 찔린단 말이지.
어떤 표정으로 리온을 보고 있을지 예상이 가지 않았다.
거울이 있다면 참 좋을 텐데.
나도 모르게 멍한 표정으로 리온을 응시했다.
그는 계속해서 내게 시선을 거두지 않았다. 마주한 얼굴에 얽혀 들어가는 시선이 간질거렸다.
그러나 곧이어 내게로 뻗어진 손길에 나는 몸을 움츠렸다.
“리온?”
나는 저렇게 가끔 리온의 눈동자가 가라앉으면 불안하단 말이지.
그리고 내 예상은 맞아떨어졌다.
리온이 조심스러운 손길로 브로치를 가슴에서 떼어 냈으니까.
“엘르, 이건 빼놓고 가는 게 좋을 것 같아.”
“어?”
깜빡깜빡.
이번에도 여전히 당황한 내 눈은 아무것도 하지 못한 채 눈만 깜빡였다.
“혹시 모르잖아. 내가 따라가서 너를 찾아낼지도.”
나는 가만히 손에 쥔 붉은 브로치를 응시했다.
“물론, 그런 일은 없겠지만.”
나는 곧바로 고개를 끄덕였다. 왠지 그래야 할 것 같은 느낌이랄까.
“그런데 리온 너 꽤 많이 컸네.”
시선을 맞추기 위해 몸을 숙인 그는 구기다시피 한 자세가 되었다.
정말 많이 컸네.
“그런가? 난 네 눈에는 처음처럼 어린애로 보였으면 하는데.”
낮은 음성이 기분 좋게 울렸다.
바람에 나뭇잎이 바스락거리는 소리와 함께 어우러져 더욱 좋았다.
“리온은 어린아이였으면 좋겠어?”
난 아닌데.
하루빨리 커서 내 손에 힘이 들어왔으면 하는 마음이었다.
그 망나니 에드가의 밑에서 언제까지 있을 수도 없는 노릇이고.
성년이 되어야 나도 벗어날 수 있을 것 같았다.
나는 눈을 느릿하게 깜빡이며 손을 뻗어 리온의 이마에 맺힌 땀을 닦아 주었다.
“여전히 어린애 같아.”
내 손길을 거부하지 않고 가만히 받아들이고 있지 않는가.
순한 아기 고양이처럼 느껴졌다.
“여기도 닦아 줘.”
리온이 내 손을 잡아 제 목 쪽으로 가져갔다.
턱선을 타고 흘러 목에 맺힌 땀을 닦아 내던 나는 문득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