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3화
왜 입 안이 바싹 타들어 가는 걸까.
정말 이상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원래 해왔던 지극히 자연스러운 행동임에도 묘한 기류가 느껴졌다.
나를 내려다보고 있는 그의 눈빛과 내 손을 잡고 있는 리온의 단단하고도 커다란 손.
땀 내음과 함께 적당히 서늘한 바람의 온도.
서로 마주 하고 있는 간질간질한 느낌이 마치…….
땀을 닦아 주기 위해 바짝 붙어 있던 몸에 닿은 리온의 감촉.
어느새 가까워져 있는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헉. 나는 크게 숨을 들이켰다.
“리, 리온?”
“놀랐어? 미안해. 오늘 이 모습은 눈에 담아 두고 싶어서.”
“난 또 뭐라고. 저녁에 와서 너랑 같이 저녁 먹을 거야.”
내 말에 리온은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이 아니면 잊을지도 모르잖아. 아까 내가 널 못 알아봤듯이.”
“그거야…….”
네게 걸린 저주 때문이잖아.
나는 말끝을 흐리곤 옅은 미소를 지었다.
푸른 리본을 자신이 매고 있으니 날 못 알아보는 것은 당연했다.
그건 나도 알고 리온도 아는 사실이었다.
“신경 쓰지 마. 난 괜찮아! 다 알고 있는데 뭐.”
나는 리온의 어깨를 퉁퉁 치며 웃었다.
에이, 뭐 그런 걸로 시무룩하고 그래. 몰랐던 것도 아니고 못 알아볼 수도 있지.
솔직히 나를 알아봤다면 더 놀랐을 것이다.
리온이 나를 알아보는 일은 없어야 했다.
“내가 괜찮지 않아. 엘르, 난 널 잊고 싶지 않아. 넌 내 하나뿐인…… 친구잖아.”
친구라 말하는 리온의 얼굴이 왜 그리도 슬퍼 보일까.
“그건 그렇지……?”
하긴 친구의 얼굴도 못 알아보면 슬플 것 같긴 했다.
나는 리온의 얼굴을 양손으로 부여잡아 들어 올렸다.
“널 두고 가고 싶지 않아. 하지만 같이 갔다가 네가 위험해지는 건 더 싫어.”
리온은 내 말에 미소를 그려 넣었다. 살며시 자신의 손을 들어 내 손 위로 포갰다.
“알아. 그냥, 단지 심술이 좀 날 뿐이야.”
그가 알 수 없는 미소를 띠며 손바닥에 진하게 입을 맞췄다.
“잘 다녀와.”
나는 얼빠진 얼굴로 리온을 쳐다봤다.
“이거…….”
무슨 뜻이야?
리온에게 채 묻기도 전에 저 멀리서 나를 찾는 소리가 들렸다.
“아가씨! 어디에 계세요? 엘르 나타시아 아가씨!”
디리아의 다급한 외침에 고개가 돌아갔다.
이내 내 손에서 빠져나온 리온이 두어 발 물러서더니 어깨를 으쓱였다.
“어서 가 봐, 널 찾고 있잖아.”
“알았어. 나중에 봐!”
나는 황급히 붉어진 얼굴을 가리곤 디리아를 향해 뛰었다.
아무래도 리온이 자꾸만 이상한 걸 배워오는 것만 같다.
* * *
“날씨가 추운 것도 아닌데 얼굴이 왜 그리 붉지?”
“신경 끄세요. 궁금하지도 않으면서.”
나는 나를 빤히 쳐다보며 묻는 에드가의 말에 고개를 돌렸다.
아니, 왜 내가 마차도 같이 타야 해?
돈 많으면서 왜 이럴 때 아끼는 거람. 정말 알 수가 없는 사람이다.
“사고 치실 생각은 아니죠?”
“가만 보면 너는 나를 아주 망나니로 생각하고 있는 것 같은데.”
“제 속마음이 그대로 전달되었나요? 백작님 혹시 사람 마음을 읽는 재주라도 있는 거 아니죠?”
나는 몹시 놀란 표정으로 에드가를 보았다.
이거 지금 내 머릿속까지 읽고 있는 거 아니겠지?
그의 능력은 스스로의 마나를 보호하는 것뿐이었다.
그것만 해도 어디야 하겠지만, 역시 악역이니 마음을 놓아선 안 될 것 같다.
“그곳에 가면 황태자와는 마주하지 않는 게 좋을 거다.”
에드가의 입에서 나온 말에 고개가 훽 하고 돌아갔다.
황태자라면…… 델테르 카베제르 말인가?
나는 정처 없이 흔들리는 동공을 애써 진정시키며 주먹을 쥐었다.
“델테르 카베제르 황태자 말인가요?”
“그래, 그놈도 오늘 온다더군. 황제가 뭔가를 발표한다고 하던데.”
에드가의 말에 나는 머리를 빠르게 굴렸다.
아무리 생각해봐도 떠오르는 것이 없었다.
발표할 거? 혹시 계승자 발표라도 할 셈인가.
하지만 생각보다 이른 시기이지 않은가.
그거 말고 또 뭐가…….
“다른 이들 역시 모르는 눈치라 기대가 되는데. 무슨 개소리를 할지 말이야.”
에드가는 뭐가 그리 즐거운지 연신 미소를 얼굴에 띠었다.
그렇게 웃지 말란 말이다, 애비야. 나는 네 미소를 볼 때마다 악몽을 꿀 지경이야.
개소리. 개소리라…….
“헉……!”
그게 오늘이었던가? 나는 불현듯 떠오른 장면에 입을 틀어막았다.
다른 날에 등장할 것이라 생각했는데. 생각해 보니 모두가 모이는 곳이 황제에겐 좋을 것이다.
이렇게 빨리 내용이 진행된다고?
나는 엄청난 속도라며 감탄했다. 마주하자마자 얼마 안 가서 실체를 알게 된다니.
에드가의 눈빛이 차갑게 가라앉았다.
“누가 보면 무슨 소리를 할지 아는 사람이라고 생각하겠군.”
나는 황급히 고개를 저으며 변명했다.
“거, 참! 말조심 좀 하세요. 황족 모욕죄로 잡혀가겠어요. 하마터면 저도 동조할 뻔했잖아요.”
“마차에 너와 나 둘뿐인데. 내가 잡혀간다면 네가 비정하게 아비를 신고했을 가능성이 높겠군.”
“아무리 그래도 제가 신고하겠어요?”
에드가를 매우 많이 싫어하긴 했지만, 그가 잡혀가면 내가 있어야 할 가문 역시 망한다.
“충분히 합리적이지.”
“정말 백작님이야말로 저를 어떻게 생각하시는 거예요? 제가 자폭을 할 것 같아요?”
내가 그런 멍청한 짓을 할 리가 없지 않은가!
이번만큼은 굉장히 억울했다.
나는 굳은 표정으로 에드가를 보았다.
그러나 그는 정말로 그렇게 생각했는지 불신 가득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 * *
우여곡절 끝에 연회장에 도착했다.
한바탕 투닥거린 탓에 나와 에드가의 사이엔 냉랭한 기운이 흘러넘쳤다.
마차에서 내릴 때 에스코트를 해 줬냐고? 물을 걸 물어라.
나는 당당히 내 힘으로 마차에서 내렸다.
기본 매너도 없는 인간 같으니.
아까의 일로 심사가 뒤틀린 게 틀림없다.
“쫌생이.”
“내 따님은 밖에서도 입조심을 해야 할 것 같은데.”
“제가 누굴 좀 닮아서 겁이 없답니다.”
나는 에드가를 보며 활짝 웃었다. 그의 얼굴이 묘하게 일그러지는 것도 놓치지 않고 포착했다.
“얼굴 펴요, 다른 사람들 앞에 처음 서는 건데 무섭게 그러고 들어가실 건 아니죠?”
“누가 쫌생이로 나를 만드는 바람에 정말로 쫌생이라도 될 생각을 하고 있긴 한데.”
“정말 이러실 거예요?”
날 엿 먹이려고 파트너로 온 거 아니야?
이쯤 되니 에드가의 속셈이 뭔지 알 것 같았다.
“좋은 게 좋은 거라고, 우리 사이 좋게 들어가요.”
“인제 와서 사이는 무슨…….”
한 번 더 말하면 입이 아플 것 같아 말없이 에드가의 팔에 손을 끼워 넣었다.
손을 잡아 줄 거 같지도 않으니 팔짱이라도 껴야지.
살포시 팔에 손을 올린 나는 아무 말도 못하게 활짝 웃었다.
분명 길길이 날뛸 줄 알았는데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그 점이 오히려 더 이상하게 느껴졌달까.
나는 어깨를 가볍게 으쓱이곤 힘찬 발걸음으로 연회장으로 들어섰다.
‘어휴, 긴장해서 몰랐는데 노골적이게도 쳐다보네.’
나와 에드가를 향한 시선이 부담스러울 지경이었다.
뭐가 그리고 신기한지, 부채를 들어 수군거리는 영애들부터 에드가를 향한 미묘한 시선들.
하긴, 재수 없긴 해도 참 잘생겼단 말이지.
애써 표정을 감추곤 에드가의 팔을 꾹 잡았다.
“긴장 풀어. 내 앞에서는 긴장하지도 않더니 고작 이들 앞에서 움츠리다니.”
“안 쫄았어요. 단지, 이런 시선이 낯선 거죠.”
그 순간 기분 나쁜 시선이 느껴졌다. 살기에 가까울 정도로 적의가 가득한 했다.
‘어휴, 노골적이다. 이 정도면 숨길 생각이 없는 거네.’
누굴까 싶어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그곳엔 델테르 카베제르가 서 있었다.
절대로 마주치고 싶지 않았던 사람. 그리고 앞으로도 엮이고 싶지 않았다.
금빛 머리카락과 함께 푸른 눈동자가 내게 고정되어 있었다.
‘기분 나빠. 나랑 눈동자 색이 똑같네.’
에잇 퉤.
사파이어를 머금은 눈동자라 해도 믿을 정도로 청량하고 맑은 색이었다.
나의 똥 씹은 표정을 본 건지 델테르 카베제르의 입꼬리가 들썩였다.
‘아, 리온 보고 싶다.’
리온이 함께 있다면 떨림도 줄어들었을 텐데.
나는 괜스레 그의 온기가 그리워져 손을 쥐었다 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