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4화
“아버지, 저희 저녁엔 돌아가요.”
나는 내게서 몇 발자국 멀어진 에드가를 향해 말했다.
리온이 기다릴 테니 적당히 하고 가자는 의미가 담겨 있었다.
흠칫하고 그의 발걸음이 멈췄다.
“……아버지?”
그가 낮게 중얼거렸다.
갑자기 아버지라고 한 것이 꽤나 거슬리는 모양이다.
그럼 다들 보고 있는데 우리 사이 너무 나빠요! 하고 광고할 일 있는가?
어디까지나 남에게 보이기 위함이지 다른 뜻은 없었다.
주변을 둘러보니 모두가 새로운 친구를 사귀기 위해 바쁘게 움직이고 있었다.
인사를 하며 가볍게 수다를 떨고, 꺄르르 웃기도 했다.
댕댕댕.
시간을 알리는 종소리와 함께 사람들이 다소 소란스러워졌다. 아무래도 곧 시작하려는 모양이다.
에드가가 사라진 곳을 보니 어딜 갔는지 보이지 않았다.
‘거 참. 지켜봐 주기라도 하지.’
섭섭한 마음이 밀려왔다. 하지만 원래 혼자 살아남아 왔지 않았던가.
결국 나는 될 대로 되란 심정으로 멍하니 내 순서를 기다렸다.
한 명씩 이름이 거론되어 황제의 앞으로 나갔다.
문이 열리고 긴장감이 맴도는 가운데 사람들의 시선이 등장하는 이에게로 쏠렸다.
‘어휴, 숨 막혀.’
심호흡을 하는 이들이 있는가 하면 당당하게 가슴을 펴고 입장하는 이도 있었다.
각자 나름대로 오늘 일을 기다렸을 터.
반면 나는 기대는커녕 날 죽일 사람을 마주해야 한다는 사실이 불쾌했다.
물론 일어나지 않은 일이라 해도 미래를 알고 있는 내 표정이 좋을 리 있겠는가.
결혼할 생각도 없고, 반려도 없을 테니 기대한들 뭘 하겠어.
기대가 없으니 긴장도 할 필요 없었다. 흠이라도 안 잡히면 다행이었다.
“벨루아 가문의 엘르 나타시아 양입니다.”
가문의 소개와 함께 사람들의 말소리가 멈췄다.
다들 숨을 죽이고 황제를 향해 일제히 시선을 돌렸다.
그래, 놀랄 법도 하지. 나도 내가 이 앞에 설 줄은 몰랐거든.
나는 천천히 황제의 앞으로 걸어 나갔다.
배운 대로 인사를 올린 나는 황제를 마주 봤다.
황제가 나를 기분 나쁘게 훑으며 입꼬리를 올렸다.
‘기분 나빠.’
하지만 나는 여전히 웃는 얼굴을 유지했다.
그는 턱을 살며시 매만지더니 입을 떼었다.
“오지 않을 것이라 생각했는데, 제법이군.”
그의 옆에서 나를 빤히 응시하고 있는 황후의 시선도 느껴졌다. 알 수 없는 분노, 그리고 경멸.
이해가 되지 않았다.
사이가 좋지 않다고 해도 저렇게까지 싫어할 이유가 있나?
에드가는 내게 자세한 것은 설명해 주지 않았다.
그건 백작가의 모든 이들도 마찬가지였다.
“변방에서 잠자코 있던 벨루아 가문이 참가할 줄은 몰랐네. 에드가가 여기까지 오다니. 참으로 신기한 일이군.”
그렇게까지 에드가를 지켜보고 있을 줄은 몰랐는데.
나는 가만히 황제의 말을 듣고 서 있었다.
“그래, 셀리느 델리샤의 얼굴이 그대로 보이는군…… 꽤나 닮았어.”
마치 내 어머니에 대해서 잘 안다는 말투에 나도 모르게 고개가 올라갔다.
그러나 곧이어 매섭게 변한 황후의 눈빛에 황급히 고개를 숙여야만 했다.
아무것도 안 했는데 미움을 사는 기분은.
정말로 더러웠다.
“폐하께 인사를 드려야 하는 것은 백성으로서 마땅히 해야 할 도리라 생각합니다.”
애써 괜찮은 단어를 골라가며 대답했다. 그는 면전에 대놓고 핍박하고 있었다.
쫓겨난 신세라 해서 오지 않는다면 또 안 온다고 지랄할 거면서!
나는 속으로 온갖 욕을 내뱉었다.
황후는 내 말에 조소를 머금고는 말했다.
“정말로 셀리느를 많이 닮았구나. 소름이 끼칠 정도로 빼다 박았어.”
그녀가 자리에서 일어나 손으로 내 턱을 잡아 올렸다.
“다시 보게 되니 반갑구나. 앞으로도 기대가 된단다.”
황후의 말은 퍽 다정하게 보였지만, 그녀의 날 선 목소리는 그렇지 않았다.
오히려 내게는 앞으로 조심하라는 경고처럼 들렸다.
* * *
살 떨린다, 살 떨려!
나는 최대한 흐트러지지 않기 위해 바짝 긴장한 채 물러났다.
‘우리 가문이 미움을 한 몸에 받고 있는 건 잘 알겠네.’
굳이 황실에게 잘 보여야 할 이유는 없었지만, 척을 지고 싶진 않았다.
무릇 모든 권력의 정점에 있는 사람과는 웬만하면 우호 관계를 유지하는 것이 신상에 이로운 것이다.
다른 영애들은 힐끔 나를 보더니 나와의 거리를 유지했다.
“눈 밖에 완전히 났네요.”
“그러게요, 그래도 꽤 재력이 있는 가문인데…….”
“예전에 황실과 틀어진 후로 찬밥 신세잖아요? 우리도 멀리하는 게 좋을 것 같아요.”
나는 귓가에 때려 박는 영애들의 목소리를 고스란히 들으며 시선을 돌렸다.
‘그렇게 말 안 해도 친해질 생각도 없네요.’
다른 이들과 친해져 본들 앞길이 막막한 나에겐 어떻게 작용할지 모른다.
그러니 그냥 홀로 살아가는 것이 편할 것이다.
‘그나저나 언제쯤 나오려나?’
나는 빨리 오늘의 하이라이트가 궁금했다.
갑자기 이렇게 큰 곳에서 연회를 연 것도 다 이것 때문이었다.
어쩐지 황실에서 주최하여 데뷔탕트를 연다 했어.
오늘이 바로 제니스 아벨 보니타의 모습을 제대로 볼 수 있는 날일 것이다.
에드가와 이야기를 하다 놀란 것도 그 이유 때문이었다.
솔직히 궁금했다.
리온과 운명적인 사랑에 빠지게 될 여주인공.
다들 한바탕 소란이 일겠어.
알다시피 제니스 아벨 보니타는 황제의 사생아였다.
나는 슬며시 델테르 카베제르를 보았다.
저 얼굴이 어떻게 일그러질까.
델테르는 이미 시내에서 제니스를 본 적이 있다.
훗날 그녀를 사랑하게 된 것을 증오하게 된다. 그로 인해 고통받는 것은 제니스였지만.
갑자기 출신도 모르는 아이가 나타나 내가 황녀요! 하면 나라도 황당할 것이다.
그와 별개로 델테르는 제니스에게 한눈에 반했지 않았던가.
“제, 제니스 아벨 보니타 황녀 입장하십니다……!”
우렁찬 목소리에 모두의 시선이 쏠렸다.
‘오, 드디어 나오는 건가.’
마지막을 장식할 생각이었는지 드디어 그녀가 모습을 드러냈다.
“황녀? 지금 황녀라고 하지 않았어……?”
“황태자 전하만 계시는 걸로 아는데?”
“세상에 그럼 떠도는 소문이 진짜였나 봐…….”
사람들이 동조하며 수군거렸다.
황제의 정숙하지 못한 사생활을 모두가 알고 있었지만, 사생아를 황실로 들일 줄이야.
황후가 두 눈을 시퍼렇게 뜨고 있는데 사생아를 데리고 오는 황제도 참 대단했다.
‘뭐야, 모두 어렴풋이 알고 있었던 모양이네?’
아마도 그건 사교계에서는 유명한 신문 때문이리라.
나는 받아 보지 못했지만, 종종 들리는 이야기로는 별 내용이 다 쓰여 있다고 했다.
아무래도 제니스에 대한 내용도 흘러 나간 모양이다.
나만 몰랐지. 또 나만.
변방에 처박혀 있는 벨루아 가문까지 그 소식이 올 리가 없었다.
내가 알았다면 에드가도 알았을 터.
하지만 마차에서 봤을 때 에드가는 아무것도 모르는 눈치였다.
수도에 있었어야 최신 이야기에 뒤처지지 않는 건데!
소설 속 내용이 아니었다면, 몰랐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미리 알고 있었지 않은가? 그나마 다행이었다.
사람들 사이에서 조용히 제니스를 보았다.
실처럼 가느다란 은빛 머리카락은 하늘거렸고, 제비꽃처럼 선명한 보랏빛 눈동자는 우아하게 보였다.
제니스는 사람들의 시선을 한눈에 사로잡는 매력이 있었다.
그녀가 걸을 때마다 굽이치는 드레스의 풍성한 주름은 외모를 더욱 돋보이게 했다.
‘기억할 만하지. 나도 못 잊을 얼굴이었으니까.’
그때 보았던 것처럼 그녀의 외모는 입댈 곳이 없었다.
리온이 아무리 안면 인식 장애가 있다고 한들 제니스의 얼굴이라면 필시 기억하리라.
“어머, 세상에. 출신도 모르는 여자의 딸일 거라 생각했는데 그건 아닌가 봐요.”
“그러네요, 딱히 트집을 잡을 곳이 안 보이는 게…… 헛.”
제니스를 보며 이야기를 나누던 영애들이 황후의 시선을 느끼고 입을 꾹 닫았다.
아마도 황후는 상상도 못했으리라.
황제가 자신의 사생아를 이곳에 불러들였을 것이라곤 말이다.
“제법 재미있는 일을 벌였네.”
어느새 내게로 다가온 에드가가 나를 향해 속삭였다.
“아버지, 인기척 좀 내시면 안 될까요?”
“……이런 기척도 느끼지 못하다니.”
에드가에게 배려를 바란 것이 잘못이지. 나는 고개를 살짝 젓고는 제니스를 응시했다.
그녀를 쳐다보고 있는 황후의 두 손이 부들부들 떨렸다.
‘많이 화가 나신 것 같은데 대단하네.’
얼굴은 덤덤하기 짝이 없었다. 다른 이들이 보기엔 티가 하나도 나지 않는다는 소리다.
저렇게까지 표정을 감추려면 얼마나 많은 노력을 했을까.
“누구의 딸일까요?”
여주인공에 대해선 그저 황제의 사생아인 것밖에는 알지 못했다.
그녀가 가진 힘도 잘 모른다. 나는 그저 리온의 반려라는 것만 강렬하게 기억했으니까.
그게 제일 나에게 중요한 부분이기도 했다.
“글쎄.”
에드가는 내게도 알려 주지 않을 생각인지 말을 아꼈다.
분명 우리 정보상에서 저 정도의 거물급 정보를 모를 리가 없을 텐데.
나는 입맛을 다시며 제니스를 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