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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화 (25/120)

제25화

황후와 마주하고 있는 그녀의 얼굴엔 수심이 가득했다.

나라도 그랬을 것이다.

이제 궁에서 생활을 해야 할 텐데, 매번 마주 봐야 하지 않겠는가.

제니스는 데뷔탕트 전까진 남들의 시선을 피해 황제의 보호를 받아왔다.

정체를 까발렸으니 이제 황실에서 지내게 될 것이다.

어쩌면 나보다 더한 죽음의 공포에서 지내야 할지도 모른다.

독살이 만연할 테고, 그녀와 손을 잡기 위해 은밀한 거래도 오갈 것이다.

과연 그 모든 것을 어떻게 이겨 낼지 궁금했다.

“치사하게 정말 안 알려 줄 거예요?”

“정보가 알고 싶으면 너도 의뢰를 해. 거래의 기본도 모르나? 응당한 대가를 치르던지.”

에드가는 내가 그에게 말했던 것처럼 똑같이 나왔다.

내가 뭘 바라겠는가.

직접 나서서 알아내는 수밖에.

제니스의 인사가 끝남과 동시에 영애들이 우르르 그녀에게로 몰려갔다.

황후에게 미움을 샀다 해도, 황제의 총애를 받는 몸이었다.

나는 팔짱을 끼곤 그들의 모습을 응시했다.

“저는 알아서 눈치껏 있을 테니 아버지도 볼일 보세요. 할 일이 있다고 하셨지 않나요?”

빨리 에드가가 다른 곳으로 갔으면 했다. 같이 붙어 있으면 시선을 더 쏠리게 한단 말이지.

붉은 머리카락을 가진 둘은 멀리서 봐도 시선 강탈일 것이다.

그러니 분산시키는 것이 나을 테지.

에드가는 나를 한 번 쳐다보고는 말없이 다른 쪽을 향해 발걸음을 돌렸다.

이제야 숨통이 좀 트인 나는 숨을 죽이고 다른 사람들의 동태를 파악했다.

이곳에 오기 전 벼락치기로 다른 귀족들에 대한 정보를 습득했다.

‘저기 보이는 노란 드레스가 루핑 가문인가 보네.’

화려한 치장을 좋아하고 부드러운 인상을 가진 갈색 머리카락을 가진 영애였다.

루핑 가문의 이름이 뭐였더라?

부채에 찍힌 공작 가문의 인장이 눈에 들어왔다.

그녀가 제니스에게 다가간 것은 다른 이유는 없었다. 그냥 갑자기 등장한 황녀가 궁금했을 뿐.

“정말 다른 곳에서도 한 번도 못 본 것 같네요. 이런 외모라면 어디에서 봐도 기억했을 텐데 말이죠.”

어디서 굴러 왔냐는 말을 저리도 고상하게 하다니.

나는 사교계의 대화법에 혀를 내둘렀다.

“그랬나요? 저 역시 버츠 영애를 다른 곳에서 봤다면 기억했을 것 같아요.”

제니스는 무덤덤하게 말을 받아쳤다.

“오호호, 그렇군요. 그런데 제니스 아벨 보니타 황녀님의 모친은 어떤 분이셨을까요?”

버츠 영애의 눈이 가늘게 뜨였다. 대놓고 출신을 캐내다니 보통내기가 아닌 모양이다.

“제 어머니에 대한 것은 말하고 싶지 않네요.”

“어머, 숨겨야 할 게 있나 보네요. 기분 상하게 할 생각은 아니었으니 마음 쓰지 마세요.”

버츠 영애의 말에 모두가 풋 하고 웃었다.

아마도 황제가 시녀나 가문도 모르는 여자와 잠자리를 했을 것이라 생각하는 모양이다.

그의 아랫도리는 유명했으니까.

도대체 이곳의 황제가 얼마나 난봉꾼이면 이리도 멸시하는 건지.

황후가 조금은 불쌍하게 느껴졌다. 그런 남편을 옆에 두고 견뎌야 했으니.

어휴, 난 못해.

언제까지 모욕을 주려나.

나는 나서지도 못하고 그냥 가만히 보고만 있었다.

델테르 카베제르가 제니스에게 다가온 순간 잘도 떠들어 대던 목소리가 잦아들었다.

‘어휴, 저게 더 무섭네.’

그 누구라도 델테르의 지금 표정을 본다면 오금이 저릴 것이다.

그의 표정은 배신감을 넘어서서 치욕스러워하고 있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그는 불과 며칠 전에 제니스에게 반했으니까.

“일전에 있었던 일. 의도한 것이었나?”

그의 날 선 목소리에 모두가 숨을 죽였다.

델테르는 전에 마주쳤던 일이 제니스가 거짓으로 만들어 낸 일이라고 생각하는 것처럼 보였다.

그의 입장에선 모든 것이 의심 가는 게 당연했다.

지금 이 상황 자체도 말이 되지 않았으니까.

무슨 일인지 알지는 못하지만 호기심 어린 눈동자가 둘을 번갈아 쳐다보았다.

그래, 나도 궁금한데 다른 사람이라고 다를까?

이렇게 될 줄은 알았지만 실제로 현장을 보니 더욱 긴장감이 감돌았다.

“아니요. 정말 우연이었을 뿐이에요.”

“하, 잘도 거짓말을 내뱉는군.”

델테르는 제니스의 어깨에 손을 올리곤 꾹 내리눌렀다.

“지금부터 거짓말을 내뱉으면 네 혀가 잘려 나갈 거야.”

그의 살벌한 말에 지켜보고 있던 모든 이들이 침을 꼴깍 삼켰다.

제니스는 흔들림 없는 눈동자로 델테르를 응시했다.

“달라질 건 없잖아요. 어차피 저는 환영받지 못할 사람인 걸요. 없는 사람으로 치세요.”

그녀는 델테르의 손을 잡아떼어냈다.

델테르의 표정이 한없이 일그러지는 것을 보고도 두려워하지 않았다.

하지만 나는 드레스 자락을 꽉 쥔 한 손을 보았다.

그녀는 지금 겨우 참아 내고 있는 것이다.

* * *

델테르의 시선이 흔들렸다.

오호, 제니스의 당당함에 당황했나 보네.

그것도 아니면 자신이 반했던 여자가 배다른 형제인 것을 알고 스스로에게 화가 났거나.

나는 살벌한 두 사람의 기운에 몸을 떨었다.

역시 벗어나는 게 좋겠어.

이대로 있다가 불똥이 튈 것만 같았다.

‘내가 저놈의 손에 죽는단 말이지?’

그때 봤던 상황과 비슷했지만, 상반된 분위기였다.

이래서 사람이 다음 날은 어떻게 될지 모른다고들 하는 거구나.

모두가 부채를 들어 힐끔힐끔 둘을 보았다. 그에 비해 나는…….

아, 부채를 가져온다는 게 깜빡했네.

손에 뭐 들고 다니는 걸 좋아하지 않아 부채를 놔두고 온 것 같다.

그리고 무엇보다 내 머리카락은 유독 튀는 색이지 않은가.

궁금함을 참지 못하고 이리저리 고개를 움직이며 둘을 보는 통에 델테르의 시선에 걸렸나 보다.

그의 고개가 내게로 잠시 향했다.

“헉.”

델테르와 시선을 마주한 순간 나는 황급히 시선을 돌렸다.

역시 구경하지 말고 다른 곳으로 갔어야 했는데……!

그의 시선이 내게로 향하자 관심 없던 이들조차도 눈을 반짝였다.

‘어 이러면 곤란하지. 제니스에게서 내게 관심이 쏠리면…… 나도 그걸 받아쳐야 하잖아.’

피곤해.

생각만 해도 피로가 몰려왔다.

그것만큼은 사절이었다.

나는 황급히 그들의 시선에서 벗어나기 위해 테라스 쪽을 향해 몸을 돌렸다.

“엘르 나타시아 드 벨루아.”

나지막하게 들려오는 목소리에 내 발걸음이 멈췄다.

제길, 제길!

무려 황태자가 나를 부르는데 무시할 수는 없었다.

하는 수 없이 몸을 돌려 델테르 카베제르를 마주했다.

“음침하게 멀리서 지켜보고 있는 꼴이 웃겨서 말이지.”

음침……?

그럼 뭐 가까이 가서 얼굴을 들이대고 쳐다보길 바랐던 거니?

나는 헛웃음이 나오는 것을 겨우 참으며 얼굴에 미소를 띠었다.

“황태자 전하를 뵙습니다. 엘르 나타시아 드 벨루아 인사드립니다.”

“그대의 인사나 받자고 불렀다고 생각하나?”

그럼 뭐 어쩌라는 거야.

하지만 속마음과 달리 사고를 칠 수는 없었기에 아무 말 없이 활짝 웃었다.

“그저 멀리서 지켜보고 있었을 뿐입니다. 저를 반기는 이들은 없을 테니까요. 이러한 제 태도가 불쾌하셨나요?”

최대한 부드러운 목소리로 황태자에게 말했다.

그와 대화를 나누는 것도 그리 달갑지 않은데 말이다. 게다가 에드가가 이걸 본다면 필시 집으로 돌아갈 때 캐물을 것이다.

나는 아무것도 안 했는데! 나보고 또 뭔 짓해서 눈에 띠었냐고 하겠지.

으으으. 생각만 해도 속이 터진다.

그러나 속마음과는 달리 델테르를 향해 계속해서 생글생글 웃었다.

그냥 조용히 넘어가자.

왜 제니스한테 화가 난 걸 나한테 풀고 그래.

진짜 서러워도 너무 서럽지 않은가.

무엇보다 내게 관심이 없었던 이들마저도 수군거리며 이야기를 이어 나갔다.

“그러고 보니 방치되었다고 들었는데 에드가 백작님과 사이좋게 대화하지 않았어?”

“맞아, 나도 본 것 같아. 꽤 친밀해 보였거든.”

모두 황녀가 아닌 나에게 흥미를 보이기 시작했다. 버림받았단 소문만 가득하던 악당 백작의 딸.

권력의 힘이란.

갑자기 내게로 관심이 쏠렸잖아. 이게 다 델테르 때문이겠지.

“재밌군.”

“제 존재가 황태자 전하께 불쾌하다면 사라져 드리겠습니다.”

안 그래도 지금 가려던 참이거든.

나는 뒤로 조금 물러나며 델테르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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