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8화
문 앞에 선 나는 눈을 감고 곧이어 펼쳐질 상황을 상상했다.
“아! 진짜. 되는 일이 없네.”
그놈의 델테르 때문에 변명도 생각해 내지 못했다.
“으음, 일단 생각을 해 보자.”
나는 문 앞에 서서 흘깃 나를 보고 있는 시종에게 잠깐 웃어 보였다.
“저도 마음의 준비는 좀 해야 하니까요.”
“……알겠습니다.”
시종은 흔쾌히 기다려 줬다.
그사이 에드가의 반응을 생각해 보았다. 뭐라고 해야 잔소리를 덜 들을 수 있을지…. 아무리 생각해도 답이 없었다.
“역시 이래저래 생각해도 결론은 똑같네.”
나는 축 고개를 늘어뜨리곤 시종을 향해 손짓했다.
그제야 그가 에드가에게 내가 왔음을 알렸다.
“들어와.”
다소 귀찮음이 묻어나는 어투에 울컥하고 억울함이 치솟았다.
‘누군 오고 싶어서 이렇게 왔다 갔다 하는 줄 알아?’
안 그래도 델테르랑 제니스 때문에 머리가 아파 죽겠는데!
그놈의 일은 왜 만들어서 내 인생을 복잡하게 만든단 말인가.
끼이익-
문이 열림과 동시에 나는 썩어 들어간 표정을 활짝 피며 웃어 보였다.
“아버지! 절 부르셨다고요?”
더할 나위 없이 해사하게 웃었다.
그런 내 표정을 본 에드가의 얼굴은 굳어 갔지만.
“뭐 잘못한 거라도 있나 보군.”
에드가의 말에 스스로 찔려서 그만 시선을 피했다.
‘아, 이러면 안 되는데.’
하지만 에드가는 아무것도 모르고 있다.
테이블을 위를 보니, 아멜란 가문에서 온 서신도 없어 보였다.
“내게 할 이야기가 있지 않나?”
그는 곧장 내게 용건을 말했다.
정말 돌려 말하지를 않는다니까.
“말을 잘 안 하더라고요.”
“그래서 아무런 소득도 없이 어렵게 잡은 만남을 그리 빠르게 파했나?”
“아무런 소득도 없다고는 안 했어요.”
나는 의미심장하게 웃으며 소파에 앉았다.
책상에 널브러져 있는 것을 보니 뭔가를 찾고 있는 모양이다.
“경매.”
“경매?”
에드가는 다소 짧은 말에 눈썹을 들썩였다.
나는 내가 알아야 할 게 있다는 생각에 에드가를 향해 물었다.
“경매에 관해서 내가 알아야 할 게 있을까요.”
나는 가만히 에드가의 행동을 살폈다.
에드가는 오히려 차분한 태도로 나를 대했다.
조금은 미소를 머금은 것 같기도 하고?
‘저 사람은 저렇게 웃을 때면 무섭더라.’
그런 표정이 내겐 공포로 다가왔다.
“알 필요가 없다면 굳이 말 안 해 주셔도…….”
내 말에도 에드가는 시선을 거두지 않았다. 오히려 여전히 다리를 꼬고 앉아 나를 응시했다.
“뭐가 궁금하지? 내 따님께선.”
따님이라니. 제발 그 단어 좀!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팔을 매만지던 것을 멈추고 의심 가득한 시선을 뒀다.
“그렇게 말하니까 더 궁금하네요. 일적으로 만나라고 하셨잖아요. 뭐예요?”
에드가는 몰랐겠지만, 우리 가문이 사기를 당한 거나 다름없었다.
문양이 있었다고! 문양이!
아무리 결혼하지는 않는다고 해도 사람을 가려서 만나라 해야 할 거 아닌가.
“경매에서 구해야 할 물건이 있구나, 그죠?”
나는 확신에 찬 목소리로 말했다.
아멜란 공작저에서 물건을 내놓는 것이든 정보가 있든 둘 중 하나일 것이다.
아무래도 전자일 확률이 높지만.
“맞아.”
“그리고요?”
왜 그 말만 하고 마는 거야.
조금 더 에드가의 입이 열리길 기다렸다.
그는 턱을 매만지더니 아까보다 더 짙은 미소를 머금었다.
“그리고 백작가에 그렇게 싫어하는 황자와 황녀를 계속 두시는 것도 이해가 안 가요.”
못 죽여 안달인 둘이 이곳에 돌아다니게 두지 않는가.
둘 때문에 리온이 맘대로 돌아다니지도 못하고 정말 뭐람.
“아, 그게 제일 마음에 안 들었나 보군.”
에드가는 이제야 내 행동을 이해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이게 본론은 아닌데.
“딸을 팔아넘길 정도로 중요한 일이 아니기만 해요.”
나는 눈을 부릅떴다. 그렇게 제대로 된 정보를 주면 뭐하나.
자꾸 암흑에서 나올 생각을 하지 않는데.
델테르가 내게 말한 경매는 아마도 합법적으로 진행되는 것은 아닐 확률이 높았다.
벨루아 가문은 뒤에서 일하는 것이 많았으니까.
황실에 책잡힐 만한 사업은 조금 접은 모양이지만, 여전히 세력은 남아 있었다.
“중요해. 아직 네게 말을 못할 뿐이지만. 그래서 경매는 언제 열린다고 했지?”
“그건.”
모르는데.
치사한 델테르가 거기까진 알려 주지 않았다.
나는 눈을 번뜩이곤 자리에서 일어나 소리쳤다.
“그런 거까지 알려 드려야 해요? 벨루아 가문의 정보도 별거 없네요. 그러면서 저한테 물려줄 생각을 했다니.”
뻔뻔하게 팔짱을 끼곤 에드가를 응시했다.
이럴 때 나의 연기는 참 쓸 만하단 말이지.
“제법이네.”
에드가는 의자에 몸을 기대곤 나를 쳐다보았다.
“그러니까 두 번 다신 이런 일을 처리하게 하지 마세요.”
“그저 만나서 정보를 주고받는 자리일 뿐이었을 텐데, 왜 이리 화가 났을까.”
나는 에드가의 말에 입을 꾹 다물었다.
그건 말 못 해.
적어도 약속은 약속이니 말이다.
“그렇군, 말 못 할 이야기라도 나눴나 보군. 이 역시 내가 알아내야 할 일인 것 같으니 이만 가 봐.”
나는 그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자리에서 일어났다.
“리온이 시험 보는 날에 같이 가도 되겠죠?”
“내가 허락하지 않는다 해서 안 갈 성격도 아니지 않나?”
하긴 그건 그래.
괜히 물었네.
나는 방금 그 말을 꺼낸 걸 후회 했다.
“그럼 이만 가 볼게요.”
다행히 별일 없이 무사히 대면을 끝마친 것 같다.
뭔가 일이 벌어질 거 같은 느낌이 들었지만, 별일이야 있겠는가.
그럼에도 왠지 모르게 찝찝한 마음이 든 채로 집무실을 나왔다.
* * *
에드가는 엘르가 나간 문 쪽을 응시하다 고개를 돌렸다.
“아멜란 공작가에서 참여하는 경매에 물건이 뭐가 나오는지 알아봐.”
“안 그래도 듣자마자 바로 지시했습니다.”
보좌관의 빠른 일 처리가 오늘따라 더 마음에 들었다.
“그리고 한 가지 더.”
마음에 걸리는 것이 있지 않던가.
혼처가 들어왔지만 그저 일적으로 만나라고 말했던 그였다.
그런데 왜 저리도 뿔이 나 있는 건지.
“아멜란 공작가의 아들이…… 세드릭이었던가?”
“네, 세드릭 아멜란입니다.”
“그놈이 어떤 놈인지도 좀 알아봐.”
“갑자기 그건 왜……?”
경매에 나온다는 것도 얼추 알아냈고, 일도 마무리가 곧 될 것이다.
굳이 얽힐 일도 없는 공작가에 대해 알아본 들 무엇 하겠는가.
“아무래도 뭔가 화날 일이 있었던 것 같은데. 그게 뭔지 나도 알아야겠다.”
“걱정하시는 겁니까?”
“내가?”
에드가의 되물음에 보좌관이 어깨를 으쓱였다.
그럼, 나겠어?
다 알면서도 묻는 것은 수줍거나 자신이 하는 행동이 다른 사람의 눈에 어떻게 보이는지 몰라서거나.
뭐든 에드가에게는 둘 다 아니겠지만.
“확실히 오늘따라 유독 날이 서 보이긴 하네요.”
평소와 다를 거 없으면서도 에드가에게 툴툴거리는 것이 찝찝하긴 했다.
뭔가 긴장하고 있으면서도 말을 조심하는 느낌이랄까.
“말을 가려서 하시는 분은 아니니까요.”
“그건 자네인 것 같은데.”
에드가의 눈이 가늘어졌다.
엘르가 저에게 대들며 지지 않고 말을 이어 나가는 것이야 익숙했지만.
숨기는 게 있다는 느낌은 받은 적이 없었다.
그런데 오늘은 이상하게 뭔가가 걸렸다.
“분명 뭔가가 있어. 그러니까 알아내.”
“알아내는 거야 가능하지만. 모르는 게 나을 것 같다고 제 촉이 말하고 있습니다.”
아무래도 엘르가 숨기는 거라면 에드가가 알아서 좋을 게 없을 테니까.
무슨 이유에서든 그가 가만히 있지는 않을 것 같다.
“오늘까지 알아내서 보고해.”
“백작님. 저는 뭐 다른 일은 안 하는 사람처럼 보이십니까?”
“오늘부터 다른 일을 못 하고 싶나?”
“아닙니다.”
보자관은 곧바로 태도를 바꿨다.
에드가의 심기를 거스르는 것은 한 번이면 되었다.
그는 오래 살고 싶었다.
“까라면 까야죠.”
“경매에 그 물건이 나오는지 꼭 확인하고. 원래 먼저 입수하려 했는데 그건 물 건너간 것 같군.”
“줄 생각도 없었을 겁니다.”
“뭐, 그럴 수도 있지.”
에드가는 책상에 놓인 서류를 넘기며 경매 물건을 살폈다.
회중시계.
백합 문양이 그려져 곳곳에 다이아몬드가 박혀 시선을 사로잡는 시계였다.
바로 그가 원하는 것이었다.
그것은 다름 아닌 제 부인이 어릴 적 가지고 있었던 것이었으니까.
그리고 그것에는 아주 중요한 단서가 숨겨져 있었다.
다른 이들은 모르는 매우 중요하고도 저에게 필요한 증거 말이다.
“회중시계만 찾으면 승산이 있을까요?”
“아니, 이제 시작일 뿐이겠지.”
조금씩 실마리를 잡아가고 있다는 생각에 마음이 초조했다.
“전쟁이 일어나기 전에 구해야 하니 명심하고.”
“네, 잘 알고 있습니다. 마님께서 어떻게 지켜 낸 증거인데요.”
보좌관은 서류에 그려진 회중시계를 주의 깊게 바라보았다.
그토록 찾아 헤맨 것이 고작 망해 가는 공작가의 손아귀에 있었을 줄이야.
황실이 알기 전에 손에 넣어야 한다.
다른 이들의 입에 오르내리는 순간 회중시계의 존재는 사라질지도 모르니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