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0화
‘문양……?’
그럴 리가. 벌써 리온에게 문양이 생겼다고?
나는 혼란스러웠다.
“리온.”
내 작은 목소리에 리온의 고개가 내게로 향했다.
시선은 여전히 그의 손목에 둔 채.
그제야 리온이 손을 등 뒤로 감췄다.
“……잘못 본 겁니다.”
“거짓말.”
나의 작은 원망 어린 시선이 그에게 닿았다. 리온이 흠칫 몸을 떨었다.
내 손을 잡고 있던 리온의 손에 힘이 빠졌다.
“두 사람의 문제는 둘이서 해결해.”
나와 리온을 보고 있던 델테르의 억눌린 목소리가 들려왔다.
“시간이 많이 늦었네요. 이만 들어가 보겠습니다.”
나는 델테르와 제니스를 향해 가볍게 인사한 뒤 방 쪽을 향해 걸었다.
리온이 내 뒤를 따라 빠르게 걸어오는 것이 느껴졌다.
조금 가까워지면 거리를 벌리고, 다시 또 가까워지면 거리를 벌리고.
몇 번이나 반복하던 리온의 발걸음에 나는 홱-하고 고개를 돌렸다.
“나 화 안 났어.”
나는 한숨을 내쉬었다.
“……거짓말.”
리온은 내가 내뱉은 말을 똑같이 되돌려 줬다.
나를 제대로 쳐다보지도 못한 채 고개를 푹 숙이고 있었다.
그 모습이 마음에 걸렸다.
“정말 화 안 났어.”
그냥 눈치채지 못한 상황이 당황스러웠을 뿐이지.
게다가 너무 빠르지 않은가.
문양이 생겨나게 되면 곧 떠나게 될 테니까.
공고가 빨리 뜬 것도 신경 쓰였는데, 문양마저 나타나니 정말로 뭔가가 틀어진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괜찮은 걸까.’
끄응.
신경이 쓰여 미칠 것만 같았다.
리온의 풀 죽은 모습을 보니 그냥 넘어갈 수가 없었다.
“따라와.”
나는 리온의 손을 잡아끌고 다른 곳으로 향했다.
* * *
“엘르, 내가 말하지 못한 건.”
“알아.”
내게 말하지 못한 이유를 모르는 것은 아니었다.
내가 리온을 내쫓기 위한 구실을 찾고 있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리온은 늘 불안해했다.
그리고 이번 공고 역시 떠밀리듯 가게 되었고.
그런 상태에서 성인이 되어야 나타나는 문양이 생겼다고 어떻게 말하겠는가.
“정말 나는 괜찮아. 하지만, 내가 걱정하는 건…….”
전쟁이었다.
그곳에 가서 얼마나 많은 상처를 입게 될지 잘 아니까.
제니스와 사랑에 빠지는 것에 초점을 뒀던 스스로가 섬뜩했다.
전쟁이 일어날 곳으로 떠민 내가 잔인하기 짝이 없었다.
“아무것도 아니야.”
그래, 제니스가 있으니 괜찮아. 리온이 다치거나 위험해질 일은 없을 거야.
나는 애써 나를 다독였다.
그래도 미리 제니스를 만나 안면은 텄으니 마음이 조금은 놓였다.
“안 아팠어?”
나는 리온의 소매를 걷어 손목을 매만졌다.
문양이 생긴다는 것은 어떤 느낌일까?
정말 희미하게 보였다. 정말로 나타날 줄이야.
이제 진짜 헤어져야 하는구나.
씁쓸함이 밀려 왔다.
“응, 안 아팠어.”
리온이 나를 향해 웃었다.
그의 입가에 머문 씁쓸한 감정이 고스란히 닿아 다른 말은 하지 못했다.
“내일이지?”
리온이 고개를 작게 끄덕였다.
“……가기 싫다.”
“응?”
“아니야. 엘르, 가기 전에 얼굴은 볼 수 있겠지?”
“그럼, 당연하지.”
나는 환하게 웃으며 리온의 손을 잡았다.
리온이 떠난다고 생각하니 마음이 조금은 복잡해졌다.
가기 전에 작은 선물이라도 주고받으면 좋지 않을까?
리온의 성인식도 있긴 했으니까.
에드가가 허락해 줄지는 모르지만, 그래도 살아온 정이 있는데.
괜찮을 것이다.
“리온! 내일 가기 전에 나 꼭 보고 가! 줄 거 있어.”
나는 황급히 좋은 생각을 떠올렸다.
시험에 다녀와서 줘도 되지만 어쩐지 빨리 주고 싶었다.
“줄 거?”
“응, 그러니까 꼭 가기 전에 나 보고 가.”
리온은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다. 뭔지 궁금할 법도 한데 묻지 않았다.
“그런데 제니스 황녀님은 어떤 것 같아?”
“……궁금해?”
“음, 아니야.”
역시 듣지 않는 게 나을 것 같다. 무슨 이야기를 했든 내가 알게 뭐람.
둘이서 친해지고 마음을 열었으면 된 것이지.
그런데 정말 가까워진 것은 맞나?
아까 나한테 한 행동을 보면 아닌 것 같은데.
“황녀님이랑 친하게 지내. 물어보는 게 있으면 좀 도와주고.”
“……정말 그러길 바라?”
“음, 뭐 황실과 관계가 나빠지는 것보단 낫잖아.”
이미 나빠질대로 나빠졌지만, 더 안 좋아지는 것보단 낫겠지.
게다가 황제는 제니스를 끔찍하게 아끼니까.
그녀와 관계를 좋게 유지한다면 황실에서도 벨루아 가문에 대한 경계를 조금은 낮출지도 모른다.
“네가 원하는 거라면 그게 뭐든.”
리온의 말에 나는 어색하게 미소를 지었다.
어쩐지 그에게 강요하는 느낌이 들었다.
“아니야, 리온 네가 싫으면 그러지 않아도 돼.”
나는 황급히 고개를 털었다. 나도 참 별걸 다 시키네.
“어서 들어가서 자. 내일 시험이잖아.”
“그래, 내일 보자.”
리온과 나는 말없이 별채로 걸어갔다.
* * *
방으로 돌아온 나는 편지를 써 내려갔다.
“음, 보자. 무슨 말을 해야 하지?”
편지를 써 본 게 오랜만이어서 고민이 되었다.
내일 가기 전에 써서 줘야 하는데 이대로 가다간 한 줄도 못 쓸 것 같았다.
[리온에게.]
이 말을 써 놓고 얼마나 노려봤는지 모른다. 뒷말이 떠오르지 않아서.
사실 할 말은 많았는데 그걸 글로 풀어 쓰는 게 힘들었다.
그와 했던 추억들이 하나둘 떠올라 입가에 미소가 번졌다.
“맞아, 어릴 땐 이랬었지.”
정말 별짓을 다 했네.
이렇게 같이 자라왔는데 나한테 설렐 일이 있겠어?
나도 참.
어릴 때 물을 뿌려 리온의 옷이 흠뻑 젖었던 일이 있었다.
사실, 새하얀 옷 사이로 비치는 그의 몸매가 보고 싶어서 했던 일이었지만.
말괄량이가 따로 없었다.
그럼에도 리온은 아무렇지 않게 웃으며 내게 튄 물 몇 방울을 닦아 주었다.
“바보 같은 놈.”
자기는 다 젖었으면서.
어릴 때부터 정말……. 사람을 묘하게 이끄는 매력이 있다니까.
나는 고개를 털었다.
추억을 떠올리다 오히려 심란해졌지 뭔가.
서랍을 열어 손수건으로 잘 싸두었던 팔찌를 꺼냈다.
붉은색이 스며들어 있는 검은색 끈이 교차되어 오묘하게 보였다.
시간 날 때마다 틈틈이 만든 보람이 있었다.
디리아가 좀 많이 가르쳐 주긴 했지만, 제법 그럴싸하게 보였다.
“안 끼진 않겠지?”
나는 빤히 팔찌를 보았다.
리온이 다른 액세서리를 하지 않아 착용할지 확신이 안 섰다.
조금 유치해 보이는 것 같기도 하고.
에잇 모르겠다.
집중해서 스르륵 써 내려갔다.
한 문장을 트고 나니 쭉쭉 써지는 것이 예감이 좋았다.
‘이거 리온이 받으면 좋아하겠다.’
생각만 해도 뿌듯했다.
빨리 다음 날이 왔으면 하는 마음에 편지를 봉투에 넣고 테이블 위에 올려 두었다.
“음, 그럼 허락을 맡으러 가 볼까나.”
내키진 않았지만, 미리 말하지 않으면 뒤탈이 생길지도 모른다.
시간이 늦었으니 자고 있으면 돌아와야지.
나는 방을 조심스레 나섰다.
밤이 내려앉은 백작저를 홀로 걸으니 기분이 이상했다.
“오늘도 참 일이 많은 하루였어.”
터벅터벅 걸으며 곰곰이 하루를 되짚었다.
“내일 리온이 잘했으면 좋겠다.”
다치진 않겠지? 문양이 생겼으면…… 각성도 했겠는데?
나는 문득 발걸음을 멈췄다.
“세상에, 떨어질 일은 없겠네.”
무슨 걱정을 한 거람.
에잇. 고개를 휘휘 저었다.
에드가의 방 앞으로 다다른 나는 잠시 고민했다.
‘이 시간에 자진 않겠지?'
그러나 문틈 사이로 빛은 새어 나오지 않았다.
“엘르 아가씨.”
익숙한 음성에 고개를 돌렸다.
“어! 헤센 경!”
아니, 이 사람도 왜 안 자고 이러고 있지?
“백작님을 찾아오셨습니까?”
에드가 옆에 딱 붙어 있던 보좌관인 헤센을 따로 보니 기분이 이상했다.
“네. 할 말이 있어서요. 어디 가셨어요?”
“뭐, 모르시는 게 낫습니다.”
“왜요? 설마 사고 치러 간 건 아니죠……?”
어쩐지 오싹했다.
헤센 경이 내 시선을 피하는 것 같은데?
에이, 무슨 또 사고를 치겠어.
“왜 아무 말도 안 하세요?”
“하하. 아닙니다. 오늘은 늦으실 것 같으니 내일 이야기하시는 건 어떨까요?”
“그럼 좀 전해 주세요. 내일 리온 시험 보러 가는 거 함께 가려고요.”
“함께 말입니까?”
내 말에 헤센 경이 곤란한 표정을 지었다.
그래, 에드가가 허락할 리 없긴 하지. 하지만 물러설 생각은 없었다.
나는 내 나름대로 마지막 인사라고 생각하니까.
“공고에 떨어질 리 없으니 인사할 시간도 없어요.”
“……어떻게 확신하십니까?”
“뭐, 리온이니까요.”
나는 활짝 웃으며 어깨를 으쓱였다.
헤센 경은 이내 검지를 입에 가져다 댔다.
“그럼 저희 둘만의 비밀로 하시죠.”
“뒷일은 헤센 경이 책임지시는 건가요?”
“이런, 그렇게 되는 겁니까?”
그럼 내가 책임지란 건가. 나는 고개를 세차게 끄덕였다.
“저는 아직 어리잖아요. 성인식을 치르긴 했지만, 보호를 받아야 할 나이니까요.”
열네 살. 아직 성인이라고 치기엔 어린 나이였다.
조금 치사하긴 해도 이편이 낫겠지.
“그런데 진짜 에드가, 아니 백작님 사고치는 건 아니겠죠?”
“……뭐, 정확히 말하자면 인과응보죠.”
인과응보? 그렇게 말하니까 더 불안한데.
일단은 원하는 걸 얻었으니 방으로 돌아가서 내일을 위해 푹 자야지.
“고마워요! 그래도 백작님이 너무 미쳐 날뛰지 않는 건 헤센 경이 있기 때문일 거예요.”
“……아가씨.”
헤센 경은 꽤 감동받은 표정이었다.
“그, 그런 표정은 좀…….”
울지 마. 나는 남자가 울면 어떻게 달래야 할지 모르겠단 말이야.
리온이야 우는 것도 잘생겼으니 감상이라도 할 텐데.
헤센 경은 리온 정도는 아니었다.
“그럼 저는 이만 가 볼게요. 울지 마세요. 우는 것도 잘생긴 사람이 울어야 달래 주는 거예요.”
나는 괜스레 쑥스러워 황급히 자리를 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