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43화 (43/120)

제43화

리온은 사람들 사이에서 멍하니 하늘을 보았다.

“다 죽여 버렸어야 했는데.”

어쩐지 기분이 별로였다. 자신이 왜 이곳에 와 있는지도 파악이 되지 않았다.

‘엘르…….’

벌써부터 보고 싶어 눈앞에 어른거렸다. 자고 있는 모습만 보고 온 게 너무 아쉬웠다.

엘르는 분명 아침에 일어나 저를 찾았을 것이다.

원망하는 두 눈동자가 선명히 떠올랐다.

하지만 리온의 입장에선 어쩔 수 없었다.

그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곤 엘르가 준비한 선물을 챙기는 것이었으니까.

게다가 답장도 했지 않은가.

곁으로 가려면 조금 시간이 걸릴 것 같았다. 어쩌면 생각보다 훨씬 더.

모든 것이 끝나면 널 찾으러 갈 테니.

그러나 리온은 꿈에도 몰랐다.

전쟁이 곧바로 터져 곧장 전쟁터로 오게 될 줄은.

다시 인사하지 못할 것이라고 예상은 했지만, 이런 식은 아니었다.

그는 제 손목에 있는 팔찌를 보며 눈을 감았다.

“어……? 리온 경?”

익숙한 목소리에 스르륵 눈이 떠졌다.

마주치고 싶지 않았던 사람이 저를 향해 활짝 웃고 있었다.

그는 엘르가 아닌 다른 이들을 기억하지 않았다. 그럴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었으니까.

그러나 엘르를 제외한 단 한 명.

제니스는 잊을 수 없었다.

그녀의 손목에 그려진 문양. 그리고 알 수 없는 감정의 소용돌이가 각인되듯 머릿속에 남았다.

리온은 다가오는 제니스를 보며 인상을 찌푸렸다.

‘왜 저 여자가?’

공고에 지원한 것은 알고 있었지만, 같은 곳에 배정될 거라곤 예상하지 못했다.

제니스가 제게로 다가올 때마다 심장이 욱신거렸다.

기분 나쁜 동요는 아니었으나, 달갑진 않았다.

“여기서 뵐 줄은 몰랐습니다.”

백작저에 머무르는 것이 아니었던가?

리온은 묻고 싶었지만 입을 닫았다.

델테르가 보이지 않는 걸로 봐선, 제니스 역시 연유도 모른 채 온 것이 분명했다.

황녀였지만, 실상 아는 게 없지 않은가.

“저도 놀랐어요. 게다가 전쟁이라니.”

오늘은 한 번에 알아봐 주시네.

제니스는 내심 기분이 좋았다.

이번에도 다른 사람으로 착각하거나 모른다고 하면 어떻게 해야 하나 고민하던 찰나였다.

“제가…… 누구인지 아시는 거죠?”

그녀는 혹시 몰라 물었다. 아는 척하는 것일지도 모르니까.

“제니스 아벨 보니타 황녀님 아니십니까?”

리온은 그녀를 자세히 보기 위해 눈을 찡그렸다.

제대로 기억나진 않았지만, 분명 그녀가 맞았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게 엘르 말고 제가 인지할 수 있는 사람은 없었다.

“네, 맞아요. 기억해 주셨네요.”

제니스는 손뼉을 치며 또다시 환한 미소를 지었다.

리온은 이곳과 참으로 어울리지 않는 사람처럼 느껴졌다.

“그래도 아는 사람이 있어서 다행이에요.”

그녀는 안도의 숨을 내쉬며 리온에게 다가왔다.

생각지도 못한 일이었다.

제니스 역시 인정받기 위해 제 의지가 아닌 권유로 이번 공고에 참여했다.

그녀의 힘을 인정받아야 다른 이들이 트집을 잡지 않을 테니까.

심지어 그녀의 몸에는 치유할 수 있는 신성력까지 있었다.

황제는 황실에 있을 더할 나위 없는 구실이 되리라 생각한 것이다.

그러나 그 의도와는 달리 전쟁이 발발하여 차출될 수밖에 없었다.

치유의 힘을 가진 이들은 극히 드물었으므로.

“……많이 당황스러웠죠?”

다른 이들 역시 곧바로 전쟁터로 오게 될 줄은 몰랐으니 저와 같을 것이라 생각했다.

그러나 예상과는 달리 리온은 차분해 보였다.

오히려 지루한 얼굴을 하고 있달까.

“그렇습니까? 전쟁이란 언제나 일어날 수 있는 법이죠.”

사람의 욕심은 끝이 없었으니까. 게다가 지금의 현 황제 역시 선정을 베푸는 위인은 아니었다.

엘르가 화를 냈던 게 생각나 픽 하고 웃음이 났다.

‘아, 이런.’

다른 이들의 앞에서 웃는 것은 자제해야 했는데.

저를 보고 있던 제니스의 눈에 이채가 서렸다.

눈을 반짝이는 게 꼭 아기 새 같았다.

“황녀님께선 다시 돌아가셔야 하는 거 아닙니까?”

같이 있으면 불편할 일만 있을지도 모른다.

아직 반려인지 확실하지 않으니 제거하는 것도 일렀다.

‘이걸 엘르가 알았다면 운명이니 뭐니 하면서 떠들었겠군.’

쯧.

절로 혀가 차였다.

운명이란 말을 만들어 낸 작자를 잡아 없애야 속이 시원할 것 같았다.

리온은 차분하게 응답했다. 두고 온 엘르가 걱정될 뿐이었다.

“황태자 전하가 안 보이시는데 혼자 오신 겁니까?”

그 귀찮은 존재를 떼어 내다니. 황제가 부러 떨어뜨려 놓은 걸지도 모른다.

델테르가 제니스의 존재를 기꺼이 받아들이진 않았으니.

그 점이 내심 아쉬웠다.

“아, 네……. 아마 알면 안 보냈을 거예요.”

그것까진 예상하지 못했는데, 몰래 온 모양이다.

“두 분 꽤 친해 보이셨는데 아닌가 봅니다.”

“그랬나요?”

제니스가 어색하게 웃어 보였다.

델테르는 삐뚤어진 말과는 달리 제법 저를 아꼈다.

저를 괴롭히는 것은 사실이었지만, 그렇다고 못 견딜 정도는 아니었다.

“그런데 정말 괜찮을까요?”

“무얼 말입니까?”

리온은 슬슬 제니스가 귀찮아졌다.

한두 번 대답해 주면 될 것이라 생각했는데, 아닌 모양이다.

눈치가 없는 것인지 모른 척하는 건지.

리온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도통 알 수가 없군. 굳이 알고 싶지도 않지만.’

그는 제 손목의 팔찌를 매만졌다.

하루빨리 엘르를 보고 싶은 마음밖에는 없었다.

“사실 저는 좀 무서워서요. 아는 분을 만나서 마음이 한결 편해졌어요.”

제니스의 해사한 웃음에 리온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왜?’

그는 머릿속으로 물음표를 띄웠다.

이해가 되지 않았다.

어째서 그녀의 웃음에 제 심장이 반응하는 걸까.

이럴 순 없다.

그는 황급히 고개를 돌렸다.

“그럼, 저는 이만 가 보겠습니다.”

함께 있을수록 제겐 더 안 좋게 작용할 것이다.

리온은 제 몸은 어찌 되든 관심도 없었다.

하지만 제 문양으로 인해 마음이 동하는 것은 문제가 된다.

“저, 저기!”

제니스가 황급히 리온을 불러 세웠다.

그녀는 힐끔 주변을 보곤 리온에게로 걸어와 옷깃을 잡았다.

“잠시만 같이 있어 주면 안 될까요?”

“……제가 왜.”

리온은 잘게 떨리는 제니스의 손을 보았다.

뭐가 그리도 무서운지 겁에 질린 초식 동물처럼 느껴졌다.

가녀리고, 한없이 약한.

“옆에만 있을게요.”

제니스는 애처로이 말했다.

아까부터 저를 쳐다보는 무리들의 시선이 한결 노골적으로 다가왔다.

리온 역시 시선을 느끼지 못한 것은 아니었다.

그냥 함께 있어 줄 필요성이 없다고 판단했다.

저가 할 일은 아니었으니까.

‘엘르가 잘 지내라고 했었던가.’

벨루아 가문을 위해서였겠지만, 리온은 잠시 망설였다.

그 누구도 아닌 엘르의 부탁이지 않은가.

혹시 이곳에서 잘 말한다면 황실에서 벨루아 가문을 좋게 볼지도 모른다.

그녀가 걱정하는 것이 무엇인지 명확히 알지는 못해도 어렴풋이 예상은 했었다.

‘죽음, 그래 엘르는 그걸 두려워했었지.’

누군가로 인해 자신이 죽을지도 모른다는 공포를 늘 지니고 있었다.

그중에 델테르를 만났을 때 더 가중되는 듯 보였지만.

“일행이 없습니까?”

“있어요. 잠시 자리를 비웠어요. 그러니까…….”

“알겠습니다.”

제니스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리온이 말했다.

그의 반응에 놀라 제니스의 눈이 커다랗게 뜨였다.

“다행이에요. 있어 준다고 하셔서.”

그녀는 긴장이 풀려 리온에게 툭 얼굴을 기댔다.

리온은 가만히 제게 기대는 제니스를 내려다보았다.

엘르와 겹쳐 보이는 것은 제 감정이 만들어 낸 망상일 것이다.

그는 으득 이를 깨물었다.

‘아무래도 빨리 끝내 버려야겠어.’

엘르와 떨어지는 시간이 길수록 그녀에겐 도망갈 시간을 벌어 주는 것이었으니까.

리온은 품속에 넣어 둔 편지를 떠올렸다.

[조심히 잘 다녀와.]

분명 엘르는 제게 다녀오라고 말했다.

위에 다른 내용은 기억나지 않았다. 중요한 것만 기억해도 무방했으니까.

‘안녕’이나 ‘잘 가’라는 말이 아닌 ‘다녀와’가 쓰인 편지는 리온에겐 뜻깊었다.

그건 돌아오라는 말도 내포되어 있다 판단했다.

엘르가 무슨 생각으로 썼든 그건 중요치 않았다.

“같이 있어 줄 수는 있지만, 이건 곤란합니다.”

리온은 제니스의 머리를 밀어내며 뒤로 물러섰다.

“제게 기댈 수 있는 사람은 오직 한 사람뿐입니다.”

엘르 나타시아.

리온이 모시고 있는 주인이자 벨루아 가문의 사람.

제니스는 그날 정원에서 보았던 두 사람의 모습이 잊히지 않았다.

저와는 상관없는 사람이었는데 자꾸만 눈에 밟혔다.

리온이란 사람이 궁금했고, 조금 더 가까워지고 싶었다.

그러나 그는 계속해서 저를 밀어냈다.

아니 밀어낸다고도 말할 수 없을 정도로 무신경하기 짝이 없었다.

“그러니 떨어지십시오.”

그의 가라앉은 목소리에 제니스가 당황한 듯 허둥거렸다.

“아, 죄송해요.”

왈칵 저도 모르게 눈물이 흘러나왔다. 제니스는 몸을 돌려 눈물을 닦아 냈다.

“이제 괜찮은 것 같으니 가 볼게요.”

그녀의 물기 어린 목소리에도 리온은 아무런 반응도 하지 않았다.

“……윽.”

리온은 짧게 신음했다.

심장에 통증이 느껴져 호흡이 힘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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