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4화
나는 서류를 쳐다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도대체 일 처리를 어떻게 해 온 거예요?”
헤센 경은 슬며시 내 시선을 피했다.
정보상을 물려받지 않기 위해 그렇게 버텼으나 결국은 이렇게 일을 배우고 있었다.
“헤센 경은 제가 잘할 거라 믿어요?”
“저는 그럴 것 같습니다.”
“왜요?”
“그야, 에드가 백작님의 따님시니까요.”
“아…….”
나는 단번에 이해했다.
같은 피를 물려받았으니 일도 잘할 것이라 생각한 모양이다.
‘그건 아닌데.’
사업에 수완이 있어 보인 것은 모든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아! 잘됐네.”
이참에 사업 정리를 좀 해야겠다. 앞날을 위해서니 에드가도 이해해 줄 것이다.
“지금 저희가 하고 있는 사업이 뭐가 있죠?”
“……그게.”
“다 알고 있으니 숨기지 말고 알려 주세요. 마약, 밀매, 밀수, 이런 거 다 처분했죠?”
“……아가씨?”
어떻게 알고 있냐는 눈빛이었다. 말해 뭐하겠는가.
나는 서류를 보다 책상에 머리를 박았다.
“하아…… 헤센 경. 제가 그때 말했잖아요. 사업 제대로 정리하라고.”
“그러려고 했습니다. 마약과 노예는 사업 접었습니다. 손해를 감수하면서.”
“손해?”
나는 고개를 들고 헤센을 노려보았다.
그럴 리가.
내가 손해 보지 않게 각종 사업을 알려 주지 않았던가. 머리가 지끈거렸다.
“제가 만만하죠?”
“……아닙니다.”
“종이부터 광산까지 알려 줬는데 그걸 못 굴려요?”
장부를 보니 생각보다 소득이 없었다.
그도 그럴 게 다른 곳에 퍼다 나르니 그럴 수밖에.
귀족들을 이딴 식으로 회유하니 나중에 뒤통수를 맞지. 갑갑함에 소매를 걷어붙였다.
“여기 리스트에 있는 귀족들과 거래한 장부는 있겠죠?”
“네, 있습니다.”
“가져와요.”
“그건 왜…….”
“써먹어야죠. 지금이 적기구요.”
전쟁이 터졌다면 곧 파벌 싸움이 시작된다.
황실에서 움직이게 된다면 벨루아 가문의 입지가 좁아진다.
나는 초조함에 손톱을 물어뜯었다.
“황실에서 움직일 거예요.”
“그걸 어떻게……?”
“아버지를 저렇게 만든 이들은 알아냈어요?”
“어느 정도 포위망은 좁아진 상태입니다.”
“그러고 보니 공교롭게 아버지가 저렇게 된 날 델테르와 제니스가 백작가를 떠났네요.”
헤센 경의 얼굴이 굳어졌다.
내가 생각한 게 맞는 모양이다.
“잘 생각하셔야 합니다. 자칫하면…….”
“헤센 경. 지금부터 솔직히 저한테 털어놔야 해요.”
저번부터 느낀 건데 에드가가 내게 숨기는 것이 있는 것 같았다.
그리고 그건 황실과 연관된 것임이 틀림없고.
헤센 경은 이 모든 사실을 알고 있는 사람이었다. 이건 내 감이지만, 틀리진 않을 터.
“황실과 벨루아 가문에 있었던 일 하나도 빠짐없이 말해 줘요.”
“그건 곤란합니다.”
탕!
나는 테이블을 내려쳤다.
“헤센 경. 저는 지금 벨루아 가문의 임시 가주로서 명령하는 거예요. 부탁으로 들렸나 봐요?”
자리에서 일어난 나는 헤센 경을 빤히 응시했다.
“……네 알겠습니다.”
그의 표정이 잠시 묘하게 일그러졌다.
“따라오십시오. 이곳에서는 안 될 것 같으니.”
나는 헤센 경을 뒤따라갔다. 이번에는 정말로 알려 줄 요량인가 보다.
* * *
“내가 그리 경거망동하지 말라 일렀거늘!”
황제는 델테르를 향해 호통쳤다.
가만히 있어도 도움이 될지 안 될지 판단이 안 서는데 사고까지 쳐 왔다.
제니스가 전쟁에 차출되어 신경이 예민해진 상태였다.
“……죄송합니다. 하지만 저는 기회라고 생각을 해서.”
“기회? 그걸 네가 판단해도 된다고 허락했느냐?”
“그렇지만 아멜란 가문은 황실과 우호적인 관계였지 않습니까.”
“그건 바라는 바가 있었기 때문이지. 지금은 쓸모없는 존재가 되었고.”
황제의 목소리는 차갑기 짝이 없었다.
얼어붙은 눈빛과 정이라곤 느껴지지 않는 어투까지.
델테르는 으득 이를 갈았다.
‘그럼 대체 왜 나를 벨루아 백작가에 보낸 거지?’
그날 밤 에드가가 누군가의 피습을 받고, 다친 채로 왔었다.
마주한 델테르는 모른 척 넘어가지 못했다.
“설마 했는데 정말 백작 당신이?”
“……무슨 말인지 모르겠군.”
에드가는 한 치의 흔들림이 없었다. 하지만 피를 뚝뚝 흘리고 있는 모습은 누가 봐도 오해를 사기 충분했다.
무슨 생각이었는지 모르겠지만, 델테르는 그 순간을 놓치지 않았다.
에드가가 소문의 범인이든, 방금 소식을 전해 들은 아멜란 가문의 자객이든.
둘 중에 뭐가 되었든 간에 델테르에겐 좋은 핑계가 될 것이라 여겼다.
밤이 늦었고, 그 주변에 다른 이들은 없었다.
그래서 아무 생각 없이 에드가를…….
“죄송합니다.”
“멍청한 것! 중요한 물품은 손에 넣지도 못했는데 일을 그르치다니.”
“도대체 무슨 일이 있으셨던 겁니까?”
“네 녀석이 알 거 없다.”
황제는 딱 잘라 말했다.
델테르는 주먹을 꽉 쥐곤 고개를 숙였다.
‘제길, 제기랄!’
아직은 숙여야 한다.
황제의 권위는 여전했고, 자신은 그의 총애를 받지 못하고 있었다.
“제니스가 전쟁에 차출되어 갔으니, 조만간 네가 가 보도록 해라.”
“……폐하!”
황후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자신의 아들이 당하는 모욕은 어느 정도 참을 수 있으나, 전쟁이라니.
그 어느 누구도 자신의 차기 황제를 위험한 곳에 보내지 않았다.
정말로 뒤를 잇게 할 생각이라면 말이다.
“황후, 그대가 나설 자리가 아니오.”
“하지만, 델테르는 황태자입니다.”
“제니스도 황녀지.”
황제의 말에 황후가 헛웃음을 내뱉었다.
‘그놈의 계집.’
갑자기 나타난 것도 모자라 기억하고 싶지 않았던 여자까지 떠오르게 만들었다.
갑자기 델테르의 입지가 좁아진 것도 제니스 때문이지 않은가.
황제가 사랑한 여자의 아이.
게다가 신성력까지 지니고 있었으니 다른 귀족들에겐 만약의 대비로 쓰일 패로 적합했다.
제국엔 꼭 남자가 황위를 이어야 한다는 법이 없었으니까.
벨루아 가문도 눈엣가시였는데 제니스까지.
화병이 날 지경이었다.
“저는 괜찮습니다. 다녀오겠습니다.”
아버지가 원하는 것이 제니스 곁에 있는 것이라면 들어주는 게 나았다.
저가 받은 만큼 그녀에게 되돌려 주면 그만이니까.
델테르는 입꼬리를 끌어 올렸다.
입가가 파르르 떨리며 핏대가 섰다.
* * *
“이게…… 뭐죠?”
나는 그때 리온과 들어가지 못했던 비밀 장소에 도착했다.
헤센 경이 건넨 회중시계를 보며 물었다.
굉장히 오래되어 보이는데 핏자국이 여기저기 있는 게 사연이 깊어 보였다.
“셀리느 델리샤. 백작 부인이 가지고 계시던 유품입니다.”
“……내 어머니의 유품?”
나는 회중시계를 꽉 쥐었다. 이걸 왜?
헤센 경은 가만히 나를 보다 이야기를 늘어놓았다.
“지금부터 하는 이야기는 굉장히 중요한 일입니다.”
“네, 말씀하세요.”
“셀리느 백작 부인의 언니이자 현 황제의 정부이셨던 데펠로아 님에 대한 것이니까요.”
황제의 정부가, 우리 엄마의 언니였다고?
그 많은 사생아 중에 제니스만 황실에 데려온 게 이상하긴 했다.
“에이, 설마 아니죠?”
제니스가 데펠로아의 딸 일리가 없잖아.
만약 그게 맞다면……?
제니스가…… 내 사촌인 셈이다.
믿을 수 없는 일이었다.
헤센 경이 늘어놓은 이야기를 들은 나는 얼빠진 얼굴을 했다.
어떻게 믿을 수 있겠는가.
“말도 안 돼.”
나와는 상관없다고 생각한 인물들이…….
“잠시, 잠시만요.”
나는 손을 들어 헤센 경의 말을 가로막았다.
“그래서 그렇게 황실이…… 벨루아 가문을.”
이제야 이해가 되었다.
“이러면 안…… 되는 건데?”
그러면 리온과 또 볼 수밖에 없는 상황이 생긴다.
전쟁에 간 후, 이제 다시 보지 않을 거라 생각했다.
그게 리온에게 좋은 것이라고.
애써 그렇게 여겼다. 제니스와 이어지는 것이 맞았으니까.
에드가가 방해만 하지 않는다면, 내 목숨도 괜찮았다.
“설마, 우리 반, 반역할 생각이었어요?!”
반역을 하게 되면 황제는 내 아버지가 된다는 거고, 그 말은 리온과 적으로 마주 보게 된다는 뜻이다.
리온은 제니스와 사랑에 빠져 그녀의 편에 서게 될 테니까.
과정은 다르지만 결과는 같았다. 역시 피할 수 없었던 걸까?
아, 진짜 다 때려치우고 싶다.
“아가씨 목소리가 너무 큽니다.”
“하아……. 진짜 사고 안 친다고 했잖아요. 반역이라니.”
에드가가 누워 있는 이상 그 모든 책임은…… 나?
세상이 무너져 내렸다.
“반역은 아닙니다. 그저 억울하게 죽은 백작 부인을 위한 복수를 생각했을 뿐이니까요.”
헤센 경의 말에 안도하는 것도 잠시 다시금 고개를 갸웃했다.
아니, 그게 그거 아닌가……?
“아무래도 델테르 카베제르. 그놈이 범인인 것 같네요.”
“확신하십니까?”
“네, 거의 99% 확신해요.”
너무 잘 맞아떨어지니까.
앞으로 황실에서 어떻게 나오는지 두고 봐야 하겠지만.
아마도 예상을 빗나가진 않을 것이다.
“델테르 카베제르를 주시해 주세요. 아버지가 움직이던 비밀 기사들 있죠?”
“……네 있습니다.”
나는 어머니의 회중시계를 꽉 쥐었다.
황실과 틀어진 이유를 알게 되었으니 가만히 있을 순 없다.
억울하게 죽은 내 어머니의 한은 풀어 줘야 하지 않겠는가. 에드가가 누워 있는 이상 내가 움직여야 했다.
현 황후, 그리고 황제까지.
그들이 벨루아 가문에게 저지른 일을 생각한다면, 이대로 묻고 넘어갈 만큼 성격이 좋지 못했다.
나는 집무실로 돌아와 잠들어 있는 에드가를 보았다.
“알았으니까 빨리 회복해요. 정보상 이어받을 테니까.”
이젠 혼자서 애쓰지 않아도 돼.
창백한 에드가의 손을 잡고 얼굴을 묻었다.
나를 미워한 게 아니란 사실이 더 충격이었지만, 기분이 좋지도 않았다.
나를 보면서 얼마나 괴로웠을지 가늠이 갔으니까.
“이제 쫌생이라고 안 할게. 못돼 처먹어도 이해해 줄게.”
구박해도 좋으니 눈이라도 떴으면 했다.
뒤통수라도 한 대 후려갈기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