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47화 (47/120)

제47화

밤낮없이 바빴다.

에드가가 벌여 놓은 일을 처리하는 것도 힘들었다.

“오늘은 꼭 가셔야 합니다.”

“알았어요.”

나는 망토를 뒤집어썼다. 정보상의 큰손과 약속이라 미룰 수가 없었다.

에드가는 여전히 의식이 돌아오지 않았다.

언제까지 저렇게 태평하게 누워 있을까. 괜히 툭 건드려도 봤지만, 여전히 의식이 없었다.

“이유는 아직인가요?”

“네, 안 그래도 요즘 에드가 백작님이 보이지 않는 것에 대해 말이 많습니다.”

협박을 했는데도 아직도 사태 파악이 안 되는 건가?

나는 쯧 하고 혀를 찼다.

“리온에게서 편지는요?”

“아직 오지 않은 것으로 보입니다.”

헤센은 어깨를 으쓱였다.

“이렇게까지 연락이 안 될 줄은 몰랐는데.”

나는 그 뒤로도 리온에게 몇 번이나 서신을 보냈었다.

그래도 그동안의 정이 있는데.

‘이렇게 무시할 일인가?’

내심 서운했던 나는 슬며시 헤센 경에게 물었다.

“그래요, 전쟁 상황이 나쁜가 보네요.”

“한번 연락을 취해 볼까요?”

헤센의 말에 나는 고개를 저었다. 저렇게까지 말할 정도면 정말로 아무것도 안 온 것이 분명했다.

하긴, 내 얼굴도 제대로 기억도 못 할 텐데.

“됐어요. 그냥 가요.”

“네, 준비해 놨습니다.”

헤센 경을 뒤따라 마차에 올라탔다.

창밖을 보니 어느새 눈이 내렸다.

계절이 벌써 겨울이 되었던가?

생각보다 세월이 흐른 모양이다. 워낙 바쁘게 지내다 보니.

“헤센 경, 아버지가 의식을 잃은 지 얼마나 되었죠?”

“두 달 정도 된 것 같습니다.”

“벌써 그렇게.”

리온이 간 지도 두 달이나 되었구나.

“약속은 잡은 거예요?”

“네.”

“좋아요, 일단 귀족들부터 하나둘 쳐내죠.”

말로 안 되니 무력을 행사하는 방법밖에는 없지 않은가.

이렇게 하고 싶진 않았는데.

“그리고 연회 준비는 잘 되어 가는 거죠?”

“네, 진행되고 있습니다.”

“좋아요.”

나는 호흡을 가다듬었다. 정신 바짝 차려야만 했다.

“그런데 아가씨 전부터 여쭤보고 싶은 게 있었습니다.”

헤센 경의 말에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뭐가 그렇게 궁금했기에 뜸을 들이는 걸까.

가만히 그가 입을 떼기를 기다리며 시선을 맞췄다.

“그, 손목에 묶여 있는 리본 말입니다.”

“리본?”

아. 나도 모르게 계속 하고 있었구나.

하도 매일 하고 있어서 그런지 존재조차 까먹고 있었다.

“왜 하고 있는지 궁금해서요. 드레스와 어울리지도 않는데 늘 하고 있으시던데.”

“그러네요.”

나도 왜 이걸 계속 하고 있었지? 리온도 없는데.

하지만 정작 풀지는 못했다. 어쩐지 허전해 견디기 힘들었다.

리온과 마주할 일도 없을 테니 당분간은 둬도 되지 않을까.

나는 괜히 리본을 만지작거렸다.

하지만 풀어내지는 못했다.

* * *

나는 가만히 눈앞의 델테르를 쳐다보았다.

약속 장소인 카페에 왔더니 불청객 하나가 있었다. 큰손을 직접 만나는 것은 처음이기에 신경을 꽤나 썼는데…… 하필이면!

“헤센 경, 가만히 있어요.”

그러곤 헤센을 향해 낮게 속삭였다.

“각 가문에 서신을 보내요. 아무래도 앞으론 그곳에서 만남을 추진해야겠어요.”

“네, 알겠습니다.”

이젠 맘 놓고 다른 곳에서 사람을 만날 수 없을 것만 같다.

‘재수가 없으려니까.’

일이 꼬이려는 모양이다.

저 재수 없는 인간을 마주한 걸 보니.

나는 델테르를 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제가 일전에 경고 아닌 경고를 했었는데.”

“그럼 나야말로 묻지. 여기서 뭘 하려 했지?”

제 앞을 막고 선 델테르는 팔짱을 낀 채 버텼다.

“그러는 전하께서는 여긴 무슨 일로 오셨는지요. 남자와 만나서 뭘 하겠어요? 데이트지.”

“데이트…… 네가? 센 공작과?”

델테르가 고개를 돌려 뒤를 보았다.

‘센 공작이 큰손일 줄이야.’

나는 큰손이 남자인 것을 지금 알았지만, 아무렇지 않게 손을 들어 방긋 웃었다.

“저는 뭐 남자가 없는 줄 아셨나요?”

“뭐, 그렇긴 했지.”

아니 대체 나한테 왜 이러는 거야?

황당함에 뒷목이 저려 왔다.

“영양가 없는 소리는 그만하시고 이쯤 가 주시겠어요? 방해받고 싶진 않거든요.”

나는 델테르를 향해 고개를 까딱였다.

“그것도 아니면 눈치 없이 남의 데이트에 같이 가실래요? 할 일 없어 보이긴 하네요.”

설마 같이 가겠어? 어떻게 만난 큰손인데.

“내가 그렇게 한가해 보이나?”

“네, 제 뒤만 졸졸 따라다니잖아요? 당연히 그렇게 보이죠.”

델테르는 내 말에 인상을 와락 구겼다.

하긴, 최근 들어 황제의 명령으로 원치도 않은 미행을 했다.

그러나 정말로 놀라울 만큼 꼬투리 잡을 것이 없었다.

“정말 전하 제게 마음이라도 있으세요? 이거 원, 스토커가 따로 없네.”

“저번부터 느낀 거지만, 그대가 단단히 미친 모양이군.”

“건들면 문다고 했을 텐데요.”

나는 앞에 선 델테르를 올려다보며 히죽 웃었다.

“뭐, 옷을 보니 그대의 말이 맞는 것 같군. 초대를 받았으니 응해 볼까나.”

허? 이 미친 인간이…….

델테르는 능청스럽게 테이블을 향해 걸었다.

하아. 아무래도 오늘 일은 튼 것 같다.

나는 하는 수 없이 나를 보고 있는 센 공작을 향해 쉿 하고 입 모양을 했다.

‘황태자니 쓸데없는 소리라도 하면…….’

그렇게 되면 일이 복잡해질 테니까. 센 공작이 아무리 큰손이라도 뒤끝이 없게 처리해야 했다.

이거 원.

에드가 때문에 악역은 내가 다 하고 있는 기분이란 말이지.

이젠 이런 협박쯤은 아무렇지 않았다.

“뭐 하나? 차 식겠군.”

그 순간 돌아보는 델테르로 인해 나는 목을 긁적였다.

“네, 가요. 목이 좀 간지러워서요. 흠흠. 공기가 안 좋은가? 아, 공기를 흐린 놈이 와서 그런 거구나.”

“뭐라고?”

“아무 말도 안 했어요.”

나는 어깨를 으쓱이곤 테이블로 가서 앉았다.

* * *

셋 사이에 적막이 흐르는 것도 잠시, 센 공작이 입을 열었다.

차를 호록 마시던 그가 슬쩍 황태자의 눈치를 살폈다.

“전쟁이 생각보다 길어지네요. 전하께선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보테미로 얀 센.

센 공작은 자본이 많아 사업에 능하다고 알고 있었다.

그런 사람이 정보상의 큰손일 줄은 몰랐다.

아, 아버지도 알고 헤센 경은 알고 있었겠지만.

“안 그래도 조만간 그곳에 갈 예정입니다.”

황태자가 전쟁터에 간다고? 그럼 안 되는데.

그렇게 되면 내가 단서를 잡기 어려워질 것이다.

“아, 그렇군요.”

“그나저나 여기서 센 공작을 만나게 될 줄은 몰랐습니다.”

나는 미간을 좁히곤 되물었다.

“전쟁터에 가신다고요?”

“그래, 뭐 잘못되었나? 당연히 내가 가 봐야 하는 일인데.”

“그렇죠. 근데 왜 이제야 가실까.”

나와 델테르의 신경전에 센 공작의 얼굴에 흥미가 서렸다.

“뭐, 역시 황제께서는 델테르 전하를 믿고 계시나 봅니다.”

“당연한 말입니다.”

센 공작의 말에 델테르가 웃으며 말했다.

웃기시네. 믿기는? 그랬다면 진즉 보냈을 테지.

이제와 가 보라 한 것은 제니스 황녀의 안위가 걱정되어서 일 것이다.

나는 턱을 괸 채 델테르를 보았다.

저 나불대는 입을 찢어 버리고 싶었다.

아버지가 깨어나지 않았다는 것을 알고 있을 텐데.

“황태자 전하께선 특별한 힘이 있다고 했었죠?”

“뭐……. 그렇지.”

“황녀 전하께는 신성한 치유의 힘이. 황태자께는 어떤 힘이 있을까요?”

“그걸 왜 묻는 거지?”

“궁금해서요. 황실에서 귀족에게 위협을 가할 수도 있잖아요.”

“그럴 리가.”

“그렇죠? 그럴 리가.”

델테르는 내 시선을 피했다. 불편한 것이 분명하다.

자기가 한 짓이 있으니 그럴 테지만.

나는 더욱 몸을 바짝 테이블에 붙이며 물었다.

“어떤 능력을 가지고 계실까나. 전시에 투입이 되지도 않고. 황녀 전하를 보고 오긴 했어요?”

“네가 제니스의 안위를 궁금해하다니. 아, 그 호위 기사 놈이 궁금한가?”

나와 델테르의 이야기에 센 공작의 눈이 게슴츠레 뜨였다.

‘아, 이런. 다른 사람이 리온에 대해서 알게 되면 곤란해.’

리온이 저주에 걸린 사람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면, 우리 가문은 물론 리온도 무사하지 못할 것이다.

무엇보다 리온을 아끼는 내 입장에서는 큰 약점이었다.

그래도 다행인 것은 델테르 역시 함부로 다른 이야기는 하지 못할 것이다.

내가 입만 열면 나와 황실 둘 다 곤란해질 테니까.

“저택을 나갔으니 호위 기사는 아니죠. 잠시 머물다 간 사람일 뿐인걸요.”

“그래? 이상하군. 꽤 사이가 돈독해 보였는데.”

델테르의 말에 센의 눈이 가늘게 뜨였다.

“아, 지금 만나고 있는 센 공작에겐 실례가 되는 말이겠군.”

허, 그런 건 신경 안 써 줘도 되거든?

실제로 만나는 것도 아니기에 상관없었다. 하지만 의심을 살 수는 없으니 애써 연기했다.

“어머, 센 공작님께선 그렇게 속이 좁지 않으셔서요.”

내가 연인 연기라니.

나는 호호호 웃으며 센 공작의 팔을 살짝 쳤다.

“그럼 다행이군.”

“전하께선 누구와 친하게 지내본 적이 없나 보네요.”

겨우 그런 걸로 돈독한 사이라고 칭하다니.

나는 안타까운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살며시 저었다.

“전하께서도 교우 관계가 좋아야 할 텐데. 제니스 황녀님과 아직도 사이가 좋지 않다면서요?”

“내가?”

“네, 저번에 제 저택에 머무르셨을 때 화만 내셨잖아요. 그게 아니면 불안하신 건가?”

“엘르 나타시아 영애.”

“화나셨어요? 그냥 본 걸 그대로 말한 건데.”

델테르의 굳어진 얼굴에 속이 시원했다.

나는 씨익 입꼬리를 올리며 눈을 접었다.

“아, 이번에 저희들과 인연을 텄으니 그래도 친구가 없는 건 아니시네요.”

“그쯤 하지.”

“그럴까요? 뭐 재미있는 이야기라도 하실 줄 알았는데. 지루하네요.”

계속된 도발에 델테르가 눈썹을 긁어 올렸다.

“아, 그래서 말이야. 자네도 함께 갈까 해.”

“어딜 말인가요?”

나는 고개를 모로 기울였다.

“어디긴, 내가 가려는 곳이지. 그대가 궁금해하는 사람이 있는 곳 말이야.”

“말씀은 고맙지만, 지금 저는 가업으로 바빠서요. 잘 아시잖아요? 누구 때문에 이렇게 되었는지.”

“황제 폐하께서 명령하신 거니 이의가 있다면 직접 고해.”

“뭐, 그런!”

하. 황당함에 웃음조차 나오지 않았다.

나를 보고 있는 델테르의 입꼬리가 끝을 모르고 치솟는 느낌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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