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3화
“어때요?”
“차도가 있는 것 같습니다.”
주치의의 말에 헤센 경의 얼굴에 안도가 피어올랐다.
나는 팔짱을 끼곤 헤센 경을 빤히 응시했다.
“……리온 님, 죄송합니다.”
“뭘 말입니까?”
리온은 소란스러운 소리에 깨어나 고개를 갸웃했다.
아직 잠이 덜 깼는지 눈을 비비며 나를 보았다.
“엘르, 잘 다녀왔어?”
“응. 아! 리온도 나중에 해 보면 되겠다.”
밖에 하고 다닐 수는 없지만, 유행이 시작되면 문양이 없는 귀족들도 하고 다닐지도 모른다.
“나중에 선물해 줄게.”
나는 리온에게 고개를 저으며 웃었다.
마탑에 갈 때 예쁘게 하고 가면 좋을 것 같았달까.
“아가씨, 저 손님이 왔습니다.”
“손님?”
나는 힐끔 시계를 보았다. 방문하기에는 조금 늦은 시간인데.
“올 사람도 없는데.”
“일단 다녀오십시오. 여긴 제가 지키고 있겠습니다.”
헤센 경이 에드가의 옆에 서며 말했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곤 리온을 보았다.
“리온, 너는 방으로 들어가서 좀 쉬어.”
쉬지도 못하고 에드가의 곁에 있는 게 안쓰러웠다. 그러나 리온은 자리에서 일어나 내 소매를 잡았다.
“따라갈게.”
“응? 아니야. 리온 피곤해 보여.”
나는 고개를 저었다.
리온의 얼굴에 손을 올린 뒤 안색을 살폈다.
“하지만 너무 피곤해 보이는데.”
“엘르, 난 괜찮아.”
눈동자를 보니 꽤 결연했다.
어릴 때부터 리온은 고집이 꽤 있는 터라 한 번 마음먹은 것은 아무리 말해도 들어먹질 않았다.
고로 내가 지금 뭐라 말을 해도 소용이 없을 것이다.
“알았어, 그럼…….”
나는 리온을 보다 이내 손을 거뒀다.
슬쩍 헤센 경을 보니 어깨를 으쓱였다.
아무래도 에드가의 일로 리온에게 신뢰가 생긴 모양이다.
* * *
리온과 함께 응접실로 향했다. 도대체 누굴까.
아무리 머리를 굴려 봐도 딱히 떠오르는 사람이 없었다.
솔직히 말해서 내가 사교계에서 열심히 활동한 것도 아니었기에 친구가 많지 않았다.
없다고 하는 게 더 맞으려나?
나는 짐짓 고민했다.
“엘르, 누구인지 짐작 가?”
그걸 알았다면, 너를 데리고 가진 않았을 거야.
벨루아 가문과 관련된 사람이란 것 말고는 딱히 생각나는 게 없었다.
“음……. 글쎄.”
“네가 예상하지도 못할 이라면, 궁금하네. 친구도 없잖아.”
“……그건 그런데.”
굳이 그렇게 콕 집어서 말해야 했을까.
괜히 이상하게 기분이 나빴다. 친구가 없는 것은 리온도 마찬가지이지 않은가.
그리고 내가 친구가 없긴 왜 없어?
“나 친구 있어.”
“……누구?”
리온은 믿기지 않는 눈빛으로 나를 보았다.
와, 그렇게 보니까 더 상처받아.
내가 친구가 있는 게 그렇게 이상할 일인가.
“제니스 황녀님 있잖아.”
“아…….”
리온의 얼굴이 삽시간에 굳었다.
이상하게 제니스 이야기만 나오면 표정이 좋지 않았다.
“왜 그래? 둘이 좀 친해지지 않았어?”
그럴 수밖에 없는 환경이었는데. 설마 사이가 더 악화된 건 아니겠지.
문양이 생겼으니 서로에 대한 마음이 점점 더 커질 것이다. 원하든 원하지 않든.
그게 둘의 운명이었으니까.
“제니스 황녀님 어때?”
“엘르, 네가 뭘 묻는 건지 모르겠어.”
“황녀님에게도 문양이 있잖아.”
내 말에는 많은 의미가 함축되어 있었다.
그걸 리온도 모르는 건 아닐 터.
그러나 그는 끝끝내 입을 열지 않았다. 내가 듣고 싶은 이야기가 무엇인지 알고 있는 눈치였다.
‘역시, 뭔가 있긴 있었구나.’
나는 어색하게 웃으며 응접실로 들어섰다.
누굴까.
누가 날 찾아온 거지?
내 호기심은 의자에 앉아 기다리고 있던 센 공작의 모습에 끝이 났다.
“……센 공작님?”
그가 왜 하필이면 지금 찾아온 것일까.
나는 당혹스러운 표정을 감추지 못하고 리온과 센 공작을 번갈아 보았다.
‘리온에 대해서 물으면 곤란해.’
벨루아 가문의 일원이라 하기에도 그렇고 아니라고 하기에도 이상해 보일 것이다.
헤센 경 외에 정보원들과 매번 동행했으니 새로운 인물에 대한 경계는 당연할 터.
“아, 엘르 영애. 갑작스런 방문에도 응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아닙니다. 그런데……. 무슨 일로 오신 건가요?”
“다름이 아니라, 요즘 다시 그자가 활동을 시작한 것 같습니다.”
센 공작의 말에 나는 흠칫 몸을 떨었다.
잠잠하더니 대체 왜?
게다가 시기가 묘했다. 하필이면 리온이 돌아오고 난 후부터 다시 시작되었다라.
나는 힐끔 리온을 보았다.
그는 아무것도 모르는 표정으로 센을 응시했다.
“그런데 저분은…….”
리온의 시선을 느낀 센 공작이 내게 물었다.
“아, 제 호위 기사예요. 잠시 머물다 갈 것이니 신경 쓰지 않아도 됩니다.”
“그렇습니까? 믿어도 되는 자일지…….”
“그럼요, 그 부분은 걱정하지 않으셔도 돼요.”
나는 어깨를 으쓱이곤 이야기를 이어 나갔다.
“혹시 센 공작님도 문양이 발현되신 건가요?”
“……그렇습니다. 아직 희미하긴 하지만.”
“반려는 찾아내셨나요?”
센 공작은 고개를 저었다. 아직 찾지 못한 모양이다.
나는 순간 액세서리가 생각났다. 센 공작이 착용해 본다면 어떨까.
샘플을 한 개 챙겨 오긴 했지만, 내일이면 몇 개 더 받을 수 있을 것이다.
“혹 걱정이 되신다면 제가 가릴 것을 준비해 드려도 될까요?”
“어떤 것인지…….”
센 공작은 호기심 어린 표정을 지었다.
“내일 저택으로 보내 드릴게요. 이번에 벨루아 가문에서 준비한 상품이 있거든요. 꽤 마음에 드실지도.”
“문양을 가리는 상품이라. 신선하긴 하군요.”
다행히 반응이 나쁘지 않았다. 센 공작이 관심을 가져 준다면 조금 더 사업이 번창하기에는 쉬울 터.
“문양 사냥꾼은 저희도 열심히 찾고 있습니다. 그러니 좀 더 기다려 주세요.”
“엘르 님, 문양 사냥꾼은 뭡니까?”
리온이 슬쩍 센 공작의 눈치를 살피곤 내게 물었다.
존칭을 쓰는 게 어색하긴 했지만, 남들 시선이 있을 땐 이게 최고였다.
“그때 황태자 전하와 황녀님께서 저택에 방문했을 때 그 일로 오셨잖아.”
나는 리온에게 귀띔해 줬다. 그러자 기억났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 그 사람을 문양 사냥꾼이라 부르는 겁니까?”
“뭐, 그렇더라고.”
문양을 가진 이들만 습격했으니 그리 불릴 법도 했다.
리온의 입꼬리가 씰룩였다.
나는 잘못 본 건가 싶어 고개를 갸웃했다.
“거창한 것 같아서요.”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리온의 말을 듣고 있던 센 공작이 동의했다.
“그런 잔인한 놈들에게 수식어를 붙이다니.”
“놈들이라고 하기엔 아직 이른 감이 있어요. 센 공작님.”
나는 단호히 그의 말을 정정했다.
워낙 많은 사람들이 피해를 봤기에 한 놈이 아닐 것이란 말이 있었지만, 내 생각은 달랐다.
“어쩌면 한 사람일지도 몰라요.”
“하! 그렇다면 더 문제가 될 것 같은데……. 황실에선 아직입니까?”
“네, 그쪽도 별반 다른 수가 없는 것 같아요.”
센 공작도 그 부분을 알고 있으니 내게 찾아온 것이지 않은가.
모르는 척하며 능글맞게 떠보는 것을 보니 귀족은 귀족이었다.
“그럼 내일, 함께 있어야 하니 또 남들의 눈을 속여야겠군요.”
“아……. 그런가요? 그럴 필요는 없을 것 같긴 한데.”
나는 눈을 굴렸다.
다른 이들이 묻지만 않는다면 굳이 센 공작과 나 사이에 대해서 거짓을 늘어놓지 않아도 되었다.
“데이트란 명목으로 함께 있으면 편할 겁니다.”
부탁한 일 때문이구나.
센 공작은 제법 그 일이 신경 쓰이는 모양이었다.
하긴 벨루아 가문에 의뢰를 한 사실이 알려지면 센 공작도 곤란할 것이다.
합법적인 루트는 아니었으니까.
센 공작의 말에 리온의 눈이 가늘게 뜨였다.
“내일은 저도 함께 동행하겠습니다. 그 문양 사냥꾼이란 자를 찾으려 움직이시는 거라면.”
“리온 경. 나는 괜찮아요.”
나는 서둘러 거절했다. 리온도 문양이 있기에 위험하지 않은가.
다른 이들의 눈에 띄어서 좋을 게 없는데 왜 자꾸 밖으로 나오려는 거람.
“아가씨가 위험해지시면 제가 곤란합니다.”
“……그, 그런 그렇지만.”
“내가 있으니 그대는 오지 않아도 될 것 같네만.”
센 공작이 리온을 저지하고 나섰다. 자꾸만 제 일에 끼어드는 모양새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이 정보만 알게 된다면, 떼돈을 벌 수 있을 것이다. 황실에 고해다 바치면 엄청난 수배금을 받을 테니까.
게다가 저 역시 문양 보유자로 걱정이 되었다.
“저는 엘르 아가씨의 말만 듣고 따릅니다.”
리온이 센 공작을 보며 눈을 내리깔았다.
그의 눈빛을 본 센 공작의 입매가 비뚜름하게 올라갔다.
“그렇게 원한다면 같이 가셔도 됩니다. 다만, 우리 연인 사이를 방해하는 것처럼은 보이지 않는 게 좋을 겁니다.”
나는 화들짝 놀라 센 공작을 보았다.
이렇게까지 몰두할 일인가?
당혹스러움은 쉽게 사라지지 않았다. 빠르게 시선을 돌려 리온을 보니, 생각보다 다른 반응은 없었다.
“시간이 늦었으니 빨리 돌아가시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문양 사냥꾼이 활동하고 있을지도 모르지 않습니까?”
리온의 말에 센 공작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과연 그럴까요.”
이내 차분한 모습으로 돌아온 그가 자리에서 일어나 리온 앞에 섰다.
“엘르 영애께선 참으로 든든한 호위 기사를 두셨군요.”
“아, 감사합니다.”
나는 얼떨결에 대답했다. 어쩐지 비꼬는 말투였지만, 지금은 빨리 이곳에서 그를 내보내는 게 먼저였다.
리온과 같이 있어 봤자 좋을 게 없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저, 그럼 센 공작님. 오늘은 이만 돌아가 주세요. 내일 서신과 함께 찾아뵐게요.”
“……그러도록 하죠.”
마치 리온에게 보란 듯이 센 공작은 내 손을 잡아 손등에 가볍게 입 맞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