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6화
나는 베르뎅 쥬얼리 숍에 들어갔다.
베르뎅이 준비한 샘플을 보여 주었다.
“저번보다 훨씬 좋네요.”
“조금 더 신경을 썼습니다.”
제법이었다. 좀 더 섬세한 가공은 물론이거니와 다른 디자인도 있었다.
“이건……?”
“아, 엘르 님께서 자주 착용하시던 리본이 생각나서 접목시켜 봤습니다.”
“예쁘네요.”
액세서리에 끈이 가미되어 조금 더 화려해 보였다. 나는 웃으며 기꺼이 샘플을 받았다.
“그럼, 다녀올게요.”
나서는 발걸음이 가벼웠다. 아무래도 오늘 일이 잘 풀릴 것 같단 말이지.
마차에 올라탄 나는 한참 동안 샘플을 응시했다.
“엘르 님, 그럼 이제 센 공작에게 가는 겁니까?”
“……그래야지. 약속은 약속이니까.”
리온이 한 말이 있긴 했지만, 정말로 잡아 올지는 모를 일이지 않은가.
“리온 님은 언제까지 둘 생각입니까?”
“곧 나갈 거야.”
“……네?”
“마탑으로 가게 될 테니까.“
“어떻게 매번 확신을 하시는 건지 궁금할 때가 있습니다.”
“그냥 촉이 유달리 좋은가 보지.”
나는 어깨를 으쓱였다.
원래 많은 걸 아는 것보다는 적게 아는 것이 나을 때도 있는 법.
“헤센 경. 이번에 맡은 일이 끝나면 센 공작의 일은 더는 받지 않을 거예요.“
“무슨 일이라도 있습니까?”
“……붉은 문양.”
내가 잘못 본 게 아니라면 얽히지 않는 것이 상책이었다.
“설마, 붉은 문양을 가지고 있었다는 겁니까?”
“아마도요.”
확실하진 않았다.
“주시하겠습니다.”
이럴 땐 눈치가 빨라서 좋단 말이야. 헤센 경의 눈빛이 달라졌다.
붉은 문양.
그걸 실제로 보게 될 줄이야. 그런데 왜 이렇게 기분이 찝찝할까.
“그보다 이거 어때? 잘 가려진 것 같지?”
“네, 생각보다 괜찮은 것 같습니다. 그러게 왜 손목에 그림을 그려선.”
“제대로 시험은 해 봐야 할 거 아니야.”
“부디 아무 일도 없었으면 좋겠습니다.”
“나도 그렇게 생각해.”
센 공작의 저택에 다다른 나는 심호흡과 함께 마차에서 내렸다.
내가 올 것을 미리 알고 있었다는 듯 센 공작이 활짝 웃었다.
“먼 곳까지 오시느라 고생 많으셨습니다.”
“아닙니다. 여기 샘플을 가져왔으니 착용해 보시겠어요?”
나는 센 공작에게 상자 하나를 건넸다.
그는 조심스레 열어 쥬얼리를 꺼내 들었다. 또다시 흐릿한 붉은 문양이 내 시선을 사로잡았다.
‘……잘못 본 게 아닌 모양이네.’
센 공작은 다소 빠른 동작으로 액세서리를 착용하곤 나를 향해 손을 들어 보였다.
“어떻습니까?”
“잘 어울리네요. 공작님께서 외모가 워낙 출중하시니 영식들도 많은 관심을 보일 것 같아요.”
“그렇습니까? 그럼 영애께서는 어떤가요?”
“……네?”
갑자기 이야기가 왜 그렇게 튀는 거야.
나는 어색하게 웃으며 입에 발린 말을 내뱉었다.
“제 의견이 뭐가 중요하겠어요. 공작님께서 마음에 드셨으면 그걸로 충분하죠.”
여기까지가 내가 손님에게 해 줄 수 있는 최대한이었다.
나는 볼일이 끝났으니 연회장으로 향하기 위해 몸을 돌렸다.
“그럼 저는 가 볼까요?”
“제 마차로 함께 이동하시죠. 오늘 파트너가 되어 드리겠습니다.”
역시 피할 수 없는 건가.
힐끔 헤센 경을 보았다. 그는 거절하라는 눈빛을 보냈지만, 여기서 싫다고 한다면 공작의 체면이 말이 아닐 터.
하는 수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잘 부탁드려요. 오늘 저한테도 중요한 날이라.”
사업의 판로가 결정되는 날이지 않은가.
센 공작의 마차에 올라탄 나는 가만히 그를 응시했다.
‘범인을 잡으면 어떻게 할 생각일까.’
궁금하지만 물을 순 없었다. 이야기해 주지도 않을 거 물어서 뭐 하겠어.
“그런데 오늘은 왜 리본을 안 매셨습니까?”
“아…… 그럴 필요가 없어서요.”
리본을 매고 있으면 액세서리에 시선이 가지 않을 것이다.
양손에 뭔가를 하고 있으면 분산이 될 확률이 크지 않은가.
그러니 하는 수 없이 뺄 수밖에.
그나저나 리온이 연회장에 오진 않을 테니 괜찮겠지?
설마 정말로 범인을 잡으러 간 건 아닐 거야. 그래, 아무리 리온이라지만 어떻게 찾겠어.
나는 계속되는 잡념에 고개를 저었다.
* * *
리온은 가만히 제 발아래 깔려 있는 남자를 응시했다.
“이렇게 허술해서야.”
다른 이에게 안 잡힌 것이 용하네.
몸을 숙여 피를 흘리는 이들을 향해 속삭였다.
“다른 이들은 어디에 있지?”
“큭, 없어! 도대체 뭐 하는 놈이야! 너도 문양이 있나 보지?”
“……문양이라.”
있지. 그것 때문에 얼마나 내가 고통을 받고 있는데.
그리고 엘르가 저를 의심하는 것 같았다.
무슨 이유인지는 모르겠지만, 저를 보는 눈빛이 조금은 다르달까.
“원하는 게 뭐, 뭐야!”
쿨럭.
리온은 아직도 숨이 붙어 있는 남자를 보며 낮게 웃었다.
“얌전히 나랑 가 줘야겠어.”
아, 물론. 전부 다 잡아가야 하는 이유가 있어서 네 동료들도 함께.
리온의 고저 없는 목소리에 남자의 몸에 소름이 돋았다.
대답이 없자 설핏 붉은색 눈동자가 물끄러미 남자에게로 향했다.
“허, 허억. 부, 붉은……!”
이런, 이 눈은 엘르만 볼 수 있는 건데.
다른 이가 봐 버렸으니 어떻게 해야 하나.
리온은 매끄러운 제 턱을 가볍게 쓸며 입매를 비틀어 올렸다.
“눈 하나는 없어도 살아가는 데 지장은 없을 거야. 또 입을 놀리면 아예 세상을 못 보게 될지도 모르고.”
꽤 잔인한 말을 무덤덤하게 내뱉었다.
커다란 손이 이내 남자의 얼굴로 향했다.
“으, 으아아아악!”
고통에 몸을 비트는 남자의 모습에도 리온은 손에 힘을 주었다.
바닥에 다시금 피가 흥건하게 번졌다.
“함부로 입을 놀리면 내가 곤란해져서.”
기절한 것인지 남자가 숨을 헐떡이며 축 늘어졌다.
리온은 피가 묻은 제 손을 보더니 이내 쯧 하고 혀를 찼다.
* * *
“어머, 엘르 영애.”
반가운 얼굴들이 속속히 보였다. 꽤 성대한 연회를 주최한 보람이 있었던 모양이다.
나는 웃으며 그들에게 다가갔다. 센 공작과 함께 온 것을 본 이들의 눈빛에 호기심이 가득했다.
‘하아, 이래서 거절하려 했던 건데.’
센 공작의 손목에 문양이 나타났으니 그에게 반려가 곧 생길 터.
그러니 나와 스캔들이 터져 봤자 좋을 건 없었다.
“아아, 성대한 연회를 열었다고 해서 기대를 했는데 생각보다 별로군.”
반갑지 않은 이도 온 모양인지 델테르의 목소리에 고개가 절로 돌아갔다.
‘아, 진짜 눈치 없는 새끼.’
초대장도 안 보냈는데 어떻게 온 거야?
“황태자인 내가 오지 못할 곳은 없지.”
뭐야, 이젠 눈빛만 봐도 욕하는 걸 알아차리는 건가.
나는 황급히 시선을 돌리곤 무시했다.
굳이 초대받지 않는 손님에게 잘 보일 필요는 없으니까.
“엘르 영애!”
“어? 제니스 황녀님……?”
아니 쌍으로 왜 이러는 거야.
나는 황당함에 입을 떡하고 벌렸다.
‘제니스 황녀한테 초대장을 보냈던가?’
아닌데…….
내 기억이 맞다면 아니었다. 그렇다면 델테르가 제니스를 데리고 온 것이겠지.
“잘 왔어요, 저 잠시만…….”
“바쁘신 것 같은데 이야기 나누고 오세요.”
제니스는 활짝 웃으며 델테르의 옆에 섰다.
‘뭔가 필요한 게 있나?‘
뭘 저렇게 두리번거리는 거야. 나는 고개를 갸웃하곤 영애들에게 다가갔다.
“어머, 엘르 영애 손목에 그건 뭔가요?”
걸려들었구나. 열심히 손목이 보이게 제스처를 취한 보람이 있었다.
나는 모른 척 웃으며 슬쩍 액세서리를 보였다.
“이번에 제 가문에서 새로운 사업을 시작했답니다. 안 그래도 요즘 흉흉하잖아요.”
샘플 하나를 꺼내 들곤 슬쩍 문양이 있는 영애의 손을 잡았다.
“문양이 있으면 위협받는 세상이라니……. 무서워서 마음 놓고 다니겠어요?”
“어, 어머.”
문양이 있는 영애가 화들짝 놀라며 고개를 끄덕였다.
제 손목에 채워진 액세서리에 이리저리 보던 그녀는 흡족한 표정을 지었다.
“세상에…… 이러면 문양이 있는지도 모르겠네요. 장식품 같아서 보기에도 좋아요.”
“그렇죠?”
한참 영업을 하고 있는데 센 공작이 내 쪽으로 다가왔다.
“어, 센 공작님의 손목에도…….”
하아, 어쩔 수 없나?
이렇게 된 김에 쌍으로 영업을 하는 게 나을 것 같았다.
“제가 선물해 드렸어요. 남자용도 있답니다. 제법 괜찮지 않나요?”
“그렇네요, 디자인이 조금씩 다르군요!”
생각보다 반응이 좋았다. 성공적인 연회가 되는 것 같아 안심하고 있는데 별안간 익숙한 얼굴이 보였다.
‘……리온?’
그럴 리 없건만, 가면을 쓰고 연회장에 온 이는 아무리 봐도 리온이었다.
다른 사람들은 몰라도 나는 리온을 알아볼 수 있었다.
“어……?”
나는 황급히 리온에게 가려 했지만 이내 발걸음을 멈췄다.
가면을 쓴 그에게로 제니스가 다가가고 있었다.
두리번거리며 찾던 이가…… 리온이었던가?
그런데 어째서 그녀는 리온을 단번에 알아봤을까. 문양으로 이끌리기라도 하는 건가.
나는 뻗었던 손을 거두곤 입술을 짓씹었다.
눈앞에서 두 사람의 재회를 보는 것이 이토록 힘들 줄은 몰랐다.
기뻐해야 하는 게 맞는 건데 자꾸만…… 욕심이 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