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80화 (80/120)

제80화

제니스는 마차에 올라탔다. 한결 편안한 얼굴이었지만, 속은 타들어 가고 있었다.

‘무슨 일로 불러낸 거지?’

힐끔 주변을 보니 다른 기척이 여럿 느껴졌다.

“그냥 대놓고 주의를 주는 모양이네.”

그렇지 않고서야 저렇게 기척을 티 냈을리 없을 테니까. 델테르다웠다.

그 편이 낫긴 했다.

따라오는지 모른 채 갔다면 실수를 했을지도 모를 테니까.

제니스는 약속된 카페로 들어갔다. 자연스럽게 차와 다과를 시켰다.

“준비된 자리가 있습니다. 따라오시죠.”

안내인의 말에 제니스는 고개를 끄덕였다.

테라스로 아름다운 경치가 보이는 자리에 앉은 그녀는 가만히 주변을 보았다.

“이런 데서 어떻게 보겠다는 거지.”

제 생각으론 예상이 되지 않았다. 뭘 어떻게 하겠다는 건지도 모르겠고.

무엇보다 에드가가 제게 무슨 할 말이 있는지도 가늠이 되지 않았다.

서신으로 보냈어도 충분했을 텐데 직접 만남을 요청했다.

그래서 제니스는 더욱 긴장되었다.

만나서 들어야 할 정도로 중요한 이야기란 소리였기 때문에.

“황녀님, 차와 다과 나왔습니다.”

“……어?

제니스는 익숙한 목소리에 고개를 들었다.

가면을 쓰고 있었지만, 이 목소리는 에드가가 분명했다.

그녀는 놀란 기색을 황급히 감추곤 고개를 끄덕였다.

“고마워요.”

“더불어 저기 황녀님과 이야기를 나누고 싶어 하는 영애가 있습니다.”

“……그래요? 기쁘네요. 적적하던 찰나였는데.”

제니스는 두 손을 모으며 꺄르르 웃었다.

에드가는 이내 한 영애를 데리고 왔다.

“그대는 내가 계속 부를 것 같으니 여기서 대기하는 게 좋겠어요.”

제니스의 말에 에드가는 고개를 끄덕였다.

“이렇게 황녀님을 만나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처음 보는 영애는 옅은 미소를 머금은 채 제니스를 응시했다.

그녀는 입을 벙긋거리며 목소리를 죽였다.

“지금부터는 제 이야기에 반응하지 말아야 할 겁니다.”

에드가의 목소리에 맞춰 영애는 입을 움직였다.

“한 번 꼭 뵙고 싶었어요! 황녀님을 보자마자 심장이 쿵쿵 뛰었답니다.”

영애는 호들갑을 떨며 제니스의 손을 잡았다.

“여자의 말은 흘려듣고 제 이야기에 집중하시면 됩니다.”

마치 그녀가 이야기하는 것처럼 들렸지만, 에드가의 목소리는 제니스에게만 닿았다.

“황제에게서 벗어나고자 하신다면 차를 한 모금 마셔 주세요.”

제니스는 에드가의 말에 자연스럽게 차를 음미했다.

“저 역시 친구가 생길 것 같아 기분이 좋네요.”

그녀는 재잘거리는 영애의 말을 흘리며 에드가의 목소리에 집중했다.

“황녀께선 벨루아 가문과 큰 연이 있습니다.”

제 입으로 이 이야기를 꺼낸다는 것 자체가 에드가는 괴로웠다.

제 아내가 떠올라 마음이 아파 왔기 때문에.

그럼에도 그가 용기를 내는 것은 남은 제 가족을 위해서였다.

엘르 나타시아. 셀리느가 남긴 하나뿐인 보석.

그는 잠시 침음했다.

“……제가요?”

제니스는 의외의 말에 흠칫 몸을 떨었다.

에드가는 그녀의 찻잔에 차를 따라 주며 속삭였다.

“엘르 나타시아와 사촌지간이니까.”

그녀는 크게 동요했다. 그게 무슨 말이지?

엘르와 제가 사촌지간이라니.

제니스는 달달 떨려 오는 손을 진정시키며 웃었다.

“셀리느 델리샤, 그리고 데펠로아 델리샤. 둘은 자매였습니다.”

에드가는 이어 말을 했다.

그의 입에서 나온 어머니의 이름에 절로 주먹에 힘이 들어갔다. 게다가 다른 여자의 이름도 어머니와 성이 같았다.

……내 어머니를 알고 있어.

“절 속이려는 의도라면.”

“그리고 셀리느 델리샤는 제 아내였습니다.”

“……뭐라구요?”

이건 생각지도 못한 이야기였다. 그렇다면 황제는 어째서 벨루아 가문을 변방으로 추방한 걸까.

제니스는 자신이 몰락한 남작의 가문의 일원이라 믿었다.

자신의 어머니가 아닌 다른 여자의 손에서 길러졌으니 에드가의 말은 거짓은 아닐 터.

“이건 말이 안 되는 거잖아요.”

“왜인지 궁금하십니까?”

에드가는 눈을 내리깐 채 제니스의 모습을 눈에 담았다.

꽉 쥔 주먹이 애처로워 보였다. 그 역시 제니스에게 다른 감정이 있는 건 아니었다.

그녀가 제 딸을 위협하지만 않는다면 그 역시 제니스를 벼랑 끝으로 몰고 갈 생각은 없었다.

“제 아내는 언니를 구하기 위해 뛰어들었습니다. 고통 속에 있는 걸 두고 볼 수가 없었기 때문에.”

에드가의 얼굴에 슬픔이 스쳐 지나갔다.

그 말의 뜻을 제니스는 알 것만 같았다. 평생 그늘에 가려서 살아왔다.

황후의 눈에서 숨어 저를 보호하고 황제에게서 벗어날 것만 고대했다.

결과적으론 그럴 수 없었지만.

“황제는 제가 원하는 걸 얻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사람이지.”

에드가의 말에 제니스는 눈을 감았다.

‘……나는 또다시 가족에게 칼을 겨누고 있었구나.’

모든 걸 듣고 나자 마음이 이상하게 후련했다.

“감사해요.”

“이 이야기를 알려드린 건 황녀가 제대로 된 선택을 했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에드가는 그 말을 끝으로 인사를 한 후 테라스를 빠져나갔다.

“어머, 벌써 시간이 이렇게! 황녀님 오늘의 대화 너무 즐거웠습니다.”

영애 또한 제 할 일을 다 끝냈다는 듯 자리를 벗어났다.

홀로 남은 제니스는 쉽사리 그 공간을 벗어날 수 없었다.

머릿속은 복잡했고, 그녀에게는 또 다른 선택지가 주어진 셈이었다.

* * *

“백작님, 다녀오셨습니까?”

“그래.”

헤센은 힐끔 그의 안색을 살폈다.

무표정한 얼굴을 하고 있어서 도무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종잡을 수가 없었다.

“별일 없었으니 걱정 마.”

“예, 제가 무슨 걱정을 하겠습니까.”

“센 공작은 잠잠한가?”

“네, 최근에 바쁘게 움직이더니 또다시 조용합니다.”

에드가는 깊게 숨을 들이쉬었다.

“조만간 무슨 일이 터질 거다.”

“무슨 일이요……?”

헤센은 정말 미칠 것 같았다. 이놈의 백작 저.

하루가 멀다 하고 사건 사고가 멈추지 않았다. 엘르가 달라지기 시작하고부터이긴 했지만…….

그리고 바뀌는 백작 저의 분위기를 좋아했던 것도 저였다.

‘제길, 과거의 나야.’

그냥 부녀의 관계가 안 좋은 채로 놔두는 게 편했을지도 모른다.

“아가씨는 오늘 오십니까?”

“와야지. 그놈하고 계속 둘 수는 없지.”

“그럼 데리러 가셔야죠.”

“뭐 하러.”

에드가는 고개를 저었다.

마탑주 씩이나 되는데 알아서 어련히 잘 데려다주겠지.

“백작님, 저 섭섭합니다.”

“……?”

에드가는 이게 무슨 개소리인가 싶어 헤센 경을 보았다.

대뜸 섭섭하다니.

표정을 보니 정말로 서운해 보였다.

“그 이상한 표정 집어치워라.”

“저 진짜 섭섭하다고요.”

“……대체 뭔.”

“그렇게 리온 님 싫다고 밀어낼 땐 언제고! 지금 왜 그렇게 믿으시는 겁니까.”

애도 아니고, 도대체 왜 이러는 건지.

에드가는 헤센을 쳐다보다 이내 외면했다.

“아, 백작님!”

“내가 요즘 가만히 있으니 정신을 놓았나 보군.”

“……너무하십니다.”

왜 나한테만 그래.

헤센은 어깨를 축 늘어뜨린 채 에드가를 힐끔 보았다.

굴러온 돌이 박힌 돌을 빼낸다더니, 리온을 예뻐한 제 죄였다.

“자네는 쓸데없는 생각을 해서 탈이야.”

에드가는 별 신경 쓰지 않았다.

헤센이 저런 게 한두 번도 아니고, 무시하는 게 최고였다.

“저 안 달래 주십니까?”

“……진짜 죽고 싶은 건가?”

“죄송합니다.”

헤센 경은 그제야 표정을 갈무리하곤 기계처럼 일을 처리해 나가기 시작했다.

일이 많아서 투정 좀 부려 봤는데 역시 먹히진 않았다.

‘다른 방법을 강구해 봐야겠어.’

이건 써먹다가 내 목이 썰려 나갈 것 같으니까.

그는 체념이 빨랐다.

에드가는 그제야 시계를 흘끔 보았다.

‘시간이 꽤 흘렀는데 왜 안 오고 있는 거지?’

엘르가 집에 와야 업무에 집중을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는 조금은 초조한 마음으로 업무에 집중하려 했다.

“……아직도 안 오는군.”

“아까 말씀하신 지 오 분도 채 안 지났습니다.”

“……그런가?”

“그냥 데리러 가시죠.”

헤센의 입가에 미소가 번졌다. 그럼 그렇지.

백작님이 누군가를 믿었을 리가. 왠지 모를 안도감이 밀려왔다.

“그럴까.”

“네, 그러시죠.”

헤센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러나 그의 바람과는 달리 백작저 한 가운데 빛이 생겼다.

“저 왔어요.”

엘르의 밝은 목소리와 함께 에드가의 표정이 한껏 풀렸다.

“괜한 걱정이었군.”

에드가는 엘르를 쳐다보지도 않고 서류를 넘겼다.

“다른 사람들이 보면 어쩌려고 여기로 와.”

“아! 그러네요.”

엘르는 황급히 망토를 뒤집어썼다.

“이러면 되죠?”

해사하게 웃는 엘르를 보며 에드가의 입꼬리가 씰룩였다.

“헤센 경 어디 가시려구요?”

“아, 저는…… 백작님께서 아가씨를 데리러 가야 할 것 같다고 해서.”

“내가 그랬을 리가.”

“맞아요, 아버지가 그럴 리가.”

에드가의 말에 에르가 맞장구쳤다.

헤센은 제가 무슨 말을 해도 소용이 없다는 것을 깨닫고 엘르에게 다가갔다.

“제가 데려다 드리겠습니다.”

“정말 그래도 되나요?”

“예, 누구 때문에 흥이 깨져 버렸습니다.”

“흥이라뇨?”

“일에 대한 흥 말입니다.”

헤센은 뭔가 뚱한 표정을 지으며 손을 내밀었다.

엘르는 고개를 갸웃하다 이내 그의 손을 잡았다.

“뭔데요, 무슨 일 있었어요? 요즘 나만 빼고 이야기하는 것 같아.”

“기분 탓입니다.”

헤센의 단호한 목소리에 엘르는 입을 꾹 닫았다.

그놈의 기분 탓.

이 정도면 내 기분이 이상한 거 아닌가?

엘르는 어쩐지 오늘도 찝찝한 하루가 된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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