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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3화 (83/120)

제83화

“황녀님, 방금 누군가 들어간 것 같습니다.”

“……그래 나도 봤어.”

제니스의 얼굴에 씁쓸한 미소가 번졌다. 사실 그의 모습을 정확히 본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그녀와 리온은 문양으로 인해 묶여 있지 않은가.

알고 싶지 않아도 자연스레 그의 위치를 알게 되는 것이다. 그 역시 제가 있는 곳을 알고, 달려온 것이겠지.

‘그렇게 불안해?’

내가 엘르를 어떻게 할까 봐 겁이라도 난 모양이네.

제게 위험이 닥쳤을 때는 코빼기도 보이지 않더니, 어떻게 엘르한테는 망설임도 없을까.

그게 신기했다.

문양을 믿고 있었기에, 리온의 태도는 제니스에겐 상처로 돌아왔다.

“일단 빨리 황궁으로 돌아가자.”

아무래도 내가 어디 있는지 알고 곧장 찾아올 것 같으니까.

그녀의 재촉에 기사는 고개를 끄덕였다.

곧장 마차에 올라탄 제니스와 궁으로 향했다.

‘이것도 보고를 해야겠지?’

기사는 제니스를 흘끔 보았다. 그녀 역시 감시당하는 것을 알고 있을 터.

그 생각을 하니 한결 마음이 편했다.

제니스의 표정이 굳어진 것도 모른 채, 델테르에게로 가 칭찬받을 생각에 들떴다.

* * *

“정말 괜찮겠어?”

“응, 이만 가 봐. 너 요즘 농땡이가 잦다?”

“그런 건 걱정하지 않아도 돼. 일처리는 다 끝내고 왔으니까.”

“……그래도.”

“나 유능해. 아직도 꼬맹이로 보고 있는 건 아니겠지.”

리온은 싱긋 웃으며 내 머리카락을 쓸어 넘겼다. 가까워진 거리에 온몸이 긴장되었다.

이럴 때면 다른 사람처럼 느껴질 정도였다.

집착에 절여져 번들거리는 붉은 눈동자는 여전히 예쁘게 휘어 있었다.

“그게 아니면, 나랑 있는 게 싫어?”

“으음.”

나는 갈 곳을 잃는 아이처럼 뒤로 물러섰다. 이윽고 책상에 막혀 더는 간격을 벌릴 수 없었다.

리온은 곧이어 몸을 숙여 나와 시선을 맞췄다.

“그렇게 피하면 상처받아.”

“내, 내가 언제.”

“지금도 봐. 눈도 못 맞추고 있잖아.”

“그거야…….”

누구라도 그런 눈빛으로 본다면 시선을 마주치지 못할걸?

반박하고 싶은 마음이 가득했지만 말을 흐렸다.

내 이런 반응에 그가 더 놀리러 들 것 같았다. 리온은 어릴 때부터 가끔 이러긴 했다.

“진짜, 너 이상해.”

“맞아. 난 네 앞에서는 이상해. 내가 아닌 내가 되는 기분이야.”

리온은 천천히 내 뺨을 쓰다듬고 입술을 툭 하고 건드렸다.

“그렇게 쳐다보지 마.”

“어?”

리온이 내 입술을 살짝 벌렸다. 여전히 웃는 미소를 거두지 않은 채.

“진짜 가 봐야겠다. 위험하겠어.”

“……위험해?”

그래, 맞아. 이 상황은 아주 위험해. 아무도 없고 분위기도 끈적한 것이 일이 날지도 모른다.

나는 황급히 리온의 등을 떠밀었다.

“어서 가. 아버지 오기 전에.”

“백작님 요즘 바쁘지 않아? 그렇게 보채지 않아도 갈 테니 걱정 마.”

리온이 홱 하고 몸을 돌았다. 그를 밀고 있던 나는 맥없이 그의 품에 폭 하고 안겨 버렸다.

“아, 이러면 곤란한데.”

그런 말을 하는 리온의 입꼬리를 내려갈 줄은 몰랐다.

“곤란한 거 치고 너무 좋아하는 거 아니야?”

나는 고개를 들어 올려 리온을 보았다. 그는 나를 품에 안은 채 활짝 웃었다.

꽉 끌어안은 손을 보니 놓아줄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위험해서 간다더니.

언행 불일치를 뭐 어떻게 해석을 해야 할까.

“좋은 걸 어떡해.”

“……못 말려.”

검은 머리카락이 살랑이자 정말 큰 대형견 댕댕이 같았다.

달리지도 않은 꼬리를 흔드는 모습을 본 것만 같았다.

리온의 품은 언제 안겨도 따스했고, 심장 소리는 기분이 좋았다.

‘에라, 나도 모르겠다.’

조금 즐긴다고 해서 뭐라 할 사람이 누가 있겠어.

나는 리온의 허리를 끌어안으며 얼굴을 푹 숙였다.

“엘르, 걱정하지 마.”

“으응?”

“다 잘 끝날 테니까.”

“그랬으면 좋겠어. 아무도 상처받는 사람이 없었으면 하는데.”

그건 내 욕심이겠지.

이미 상처받은 사람들이 많았다. 나를 포함해서 리온 역시도.

매듭이라도 잘 마무리 지었으면 하는데…….

“그런데 리온, 아버지랑 진짜 무슨 작당한 거 아니지?”

“글쎄.”

여전히 대답하지 않고 능청스럽게 웃었다.

“센 공작을 그냥 놔두는 것도 마음에 좀 걸려.”

“그야 신경 쓸 필요가 없으니까.”

“……정말?”

센 공작은 지금 내 목을 벨 기회만 노리고 있을 것이다. 그런데 신경 쓸 필요가 없다고 말하다니.

그 말을 들으니 분명 뭔가를 꾸미고 있는 게 확실했다.

“너어 진짜 내가 지켜볼 거야.”

“한 눈 팔지 말고 나만 본다고? 그럼 나야 좋지. 엘르 시선 원 없이 받겠네.”

“……진짜 애가 이상해졌어.”

왜 이렇게 능글맞아진 거야.

아무래도 카벤 때문인 것 같다. 두 사람 사이에 미묘하게 흘렀던 기류를 아직도 잊지 않았다.

“카벤 님이랑 어울리지 마.”

“그 말 들으면 더 내게 들러붙을 걸.”

“진짜 둘이…….”

리온은 내 말에 질색하는 표정을 지으며 나를 번쩍 들어 올렸다.

그제야 시선이 맞춰졌지만, 화들짝 놀란 내 눈은 배로 커졌다.

“그렇게 불안해? 남자한테 질투를 느낄 만큼? 나야 좋긴 한데.”

“……그런 오해를 받아도 좋아하면 어떻게 해.”

“아닌 걸 아니까.”

리온은 나를 책상 위에 올리곤 두 팔로 기대어 몸을 숙였다.

“나 가지 말까?”

“……안 가면?”

“여기서 너 끌어안고 자야지.”

“꿈도 크다!”

나는 리온의 이마를 쳐내며 손으로 몸을 보호했다.

“허튼 생각 하지 마. 빨리 돌아가. 나까지 홀리는 것 같아.”

이 요망한 댕댕이 같으니.

리온은 아쉬운 표정을 짓더니 내 이마에 가볍게 입을 맞추곤 간격을 벌렸다.

“안 그래도 이만 가야 할 것 같아.”

그 말을 들은 나는 왜 아쉽고 난리람.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와 동시에 리온은 활짝 웃더니 이내 모습을 감췄다.

* * *

“요즘 들어 얼굴 보기가 힘드네.”

제니스는 제 앞을 막아서는 델테르로 인해 미묘하게 표정을 구겼다.

“서로 얼굴 봐서 좋을 것도 없잖아요.”

“날 세우지 마.”

좋은 걸 이야기해 주려 왔더니, 가시 돋친 목소리에 기분이 팍 상했다.

“아버지 앞에서도 그렇게 날 볼 건가?”

그럴 배짱도 없으면서.

아무리 황제가 제니스를 편애한다고 해도 1계승자는 저였다.

어머니가 그렇게 두지 않을 터이니.

지금까진 저가 막고 있었기에 제니스에게 영향이 가진 않았을 터. 그렇기에 그녀 역시 여유로울 수 있는 것이다.

“날 자극하지 않는 게 좋아. 막고 있는 게 뭔지 안다면 이렇게 나오진 않았을 텐데.”

“……필요 없어요.”

제니스는 황제가 저를 더 좋아하고 있는 것을 알고 있다. 그녀 역시 가만히 잠자코 있었던 것은 아니다.

‘내 편이 좀 더 필요해.’

사교계에 매번 나가 웃기지도 않은 이야기에 맞장구를 쳐 주는 것도 다 훗날을 위해서였다.

저보다 못한 이들에 대한 무시를 드러내는 델테르와 저는 달랐다.

황제가 아끼는 황녀라는 사실도 한몫했다.

“내일 초대를 받고 영애들이 올 거예요. 마주치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왜지?”

델테르는 조소하며 제니스에게 바짝 다가갔다.

아까보다 한결 가까워진 거리에 그녀는 흠칫 몸을 떨었다.

꽉 쥔 주먹과 파르르 떨리는 입고리가 애처롭게 보였다.

“밀어내려 할수록 너만 힘들어질 거야. 그러니 받아들이는 건 어때?”

“……이만 들어가 보겠어요.”

“그렇게 해.”

그는 막고 있던 길을 터줬다. 이렇게 저를 싫어하니 그녀에게도 입장을 알게 해 줄 필요가 있었다.

지금 이곳에 있는 그녀에게 필요한 사람이 누구인지 말이다.

“아, 날 원망하진 않았으면 좋겠네. 막지 말라고 한 건 너였으니까.”

델테르의 말에 제니스는 입술을 잘근 깨물었다.

“원망하지 않을 테니 걱정 마세요.”

말은 그렇게 했지만 무서웠다.

어떤 일이 벌어질지 감히 상상도 되지 않았으니까.

‘괜찮아, 위험하면…… 그가 와 줄지도 몰라.’

문양은 꽤나 복잡하고 본능적인 거라 리온이 원치 않아도 제가 위험할 때 달려오게 될지도 모른다.

엘르에게 했던 것처럼은 바라지도 않는다.

그저, 반려로서 책무만 지켜준다면…….

“하아. 나도 뭘 걱정하는 거야.”

이곳은 황궁이었다. 지금의 저는 황녀였고, 황제의 애정을 받고 있었다.

그러니 암살이나 다른 위협은 당치도 않았다.

제니스는 옅은 숨을 내뱉으려 방으로 향했다.

문을 열려는 순간 이상한 기류가 느껴졌다.

그리고 열린 문과 함께 그녀의 촉은 들어맞았다.

“이제야 오는구나. 어딜 그렇게 싸돌아다니는 건지. 쯧.”

“……화, 황후 폐하.”

제니스는 황급히 고개를 숙이고 인사를 올렸다.

‘단 한 번도 내 방에 온 적은 없었어.’

황제 말고 그녀를 따로 만난 적도 없었다.

그렇기에 황후의 존재를 잊고 있었다.

“어쩐 일로 오셨는지…….”

“네가 내 딸로 입적이 되었는데 부모가 되어서 방에 오는 것도 못할 일이니?”

“아…… 아닙니다.”

제니스는 저를 쳐다보는 살벌한 시선에 숨이 막혀 왔다.

방은 엉망이 되어 있었고, 제가 받은 보석들은 바닥에 흩어져 엉망이 되었다.

“내가 널 만날 날을 얼마나 기다렸는지 아니? 어찌나 꽁꽁 숨겨 놨는지 얼굴 한 번 보기가 이렇게 힘들어서야.”

황후는 자리에 일어나 부채를 살랑살랑 부쳤다.

매서운 눈빛이 그녀의 몸을 서늘하게 훑으며 다가왔다.

고개를 숙이고 두 손을 모으고 있던 제니스의 속눈썹이 파르르 떨렸다.

“남편도 널 감싸고, 내 아들도 널 감싸고 도니.”

착.

황후의 손에 부채가 일자로 접혔다. 그러더니 제니스의 턱을 치켜들었다.

“윽.”

“비싼 얼굴을 보기가 참 어렵더구나.”

어미를 똑 닮은 제니스의 얼굴에 황후의 눈이 더욱 표독스럽게 변했다.

“이 예쁜 얼굴로 내 아들을 꾀어냈니?”

“아악!”

순간 부채가 제니스의 뺨을 스쳐 지나갔다. 채 정돈되지 않은 나뭇결에 생채기가 나 피가 뚝뚝 흘렀다.

“저런, 한동안은 밖에 나돌아다니지 못하겠구나.”

황후는 바닥에 부채를 떨어뜨리곤 깔깔 웃었다.

그제서야 제니스는 델테르가 했던 말의 의미를 알았다.

저가 이곳에서 누구의 보호를 받고 있었는지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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