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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1화 (91/120)

제91화

아침이 밝았다.

어떻게 잠이 들었는지 기억이 나지 않았지만, 개운했다.

나는 기지개를 켜며 막사 앞으로 나오다 화들짝 놀라 소리쳤다.

“아, 아버지?!”

아니 왜 여기서 자고 있으신 거야.

심지어 여긴 리온 막사잖아……?

아무래도 내가 잠이 들어서 리온이 막사를 내준 모양이다.

에드가는 잠에 깊게 든 건지 미동도 하지 않았다.

나는 손을 휙휙 저어 보았다. 여전히 동상처럼 같은 자세를 고수했다.

“진짜 이러고 자고 있는 거 아니야?”

……심지어 눈을 뜨고 있어.

내 목소리에도 깨어나지 않는 걸 보니 대단하달까.

신기해서 나도 모르게 빤히 아버지를 보았다.

“안 자고 있으니 그만 보거라.”

“……안 자고 있었어요?”

그런데 왜 가만히 있으셨던 거야.

눈도 깜빡 안 했지 않나……?

피곤해 보이는 걸 보니 졸았으면서 아닌 척하시는 걸지도 모른다.

“밤새 여기서 계신 건가요?”

“그래, 결국 증거는 잡지 못했다지.”

“네, 고생한 보람이 없긴 했죠.”

그들이 다 죽어 버리는 바람에 증거도 못 얻고, 여러모로 아쉬웠다.

“오늘 센 공작과 함께 움직인다고?”

“네, 어쩌다 보니 그렇게 되었네요.”

나는 머리를 긁적였다.

사실 무섭긴 한데 그렇다고 이 사람이 반려라 같이 움직이기 싫어요! 라고 소리칠 수는 없지 않은가.

게다가 함께 있으면 죽일 순 없을 테니 괜찮은 방법이기도 하고.

움직여 준다면 내 입장에선 고마웠다. 오늘에야말로 증거를 잡아낼 테니까.

“어차피 오늘만 잘 버티면 되지 않을까요?”

“그래, 오늘만 버티거라.”

아버지는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내 머리에 손을 얹었다.

“오늘까지만.”

“네?”

“딱 오늘까지만 버텨.”

그는 내게 또다시 조끼 하나를 건넸다.

“어제 그건 생각보다 약했던 모양이더군. 좀 더 튼튼한 것을 가져왔으니 이걸 입고 나가도록 해.”

“……이걸 입어요?”

에드가는 단호히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어쩔 수 없이 튼튼해 보이는 조끼를 건네받았다.

무거워 보였는데 깃털처럼 가벼워서 움직이는데 문제는 없었다.

“그럼 이따 보자꾸나.”

“아버지도 참여하시는 건가요?”

“그래, 비공식적이지만 그럴 예정이다.”

“한결 마음이 놓이네요.”

아마도 어제의 사건으로 아버지의 참석이 가능해진 모양이었다.

자식을 보호하기 위해 온 아버지를 어떻게 돌려보내겠는가. 특히나 그 난리 후에.

그런데 리온은 왜 안 보이지?

나는 두리번거리며 그의 흔적을 쫓았다.

“오늘 바쁠 테니 찾지 말고.”

“리온이요?”

언제 그렇게 친해진 거래. 내가 리온을 찾는 것도 알고 말이야.

“어차피 우승은 너일 테니 마음껏 활개 쳐도 된다.”

“……아니 아직 끝나지도 않았는데 정해졌어요?”

사냥 대회 철수가 불가능해지니 방향을 바꾼 모양이다.

뭐, 우승하게 되면 황제에게 바라는 걸 말할 수 있으니 우리에겐 좋은 기회이긴 했다.

에드가는 심드렁한 표정으로 말을 툭 뱉었다.

“처음부터 정해졌던 우승자였어.”

아버지의 말이 거짓처럼 보이진 않았다. 하긴 우승하게 되면 황제가 뭐든 들어준다고 했으니까.

그래! 악착같이 이겨서 뭐라도 뜯어내야겠다.

목숨 걸고 하는 사냥이 되었는데 아무것도 얻지 못하면 억울할 것 같았다.

“죽을힘을 다해서 이길게요.”

“그렇게까진 할 거 없고. 그저 설렁설렁 놀다 오거라.”

에드가의 그 한마디가 그렇게 멋져 보일 수가 없었다.

나는 고개를 세차게 끄덕이며 가슴을 툭툭 쳤다.

“좋은 아침입니다. 엘르 영애.”

센 공작이 얼굴을 들이대기 전까진.

“……좋은 아침이에요, 센 공작님.”

죽음의 그림자가 나를 향해 손을 흔들고 있었다.

저승사자가 따로 없지 뭐야. 아침부터 날 죽일 인간과 인사라니.

입가가 파르르 떨렸지만 티 나지 않게 용 썼다.

에드가는 센 공작을 보더니 싸악 표정을 굳히곤 내 옆으로 왔다.

“오늘 제 딸과 함께 움직이신다고 들었습니다.”

“네, 아무래도 어제 불미스러운 일이 있다 보니 파트너로 움직이는 게 낫지 않겠습니까.”

“과연 센 공작님께서 함께 해 주신다면야.”

에드가는 싱긋 웃으며 센 공작에게 손을 내밀었다.

“잘 부탁드립니다. 부디 별일 없이 사냥이 끝나기를.”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제가 엘르 영애를 지킬 테니.”

센 공작 역시 활짝 웃으며 에드가의 손을 마주 잡았다.

나는 게슴츠레 눈을 뜨며 센 공작의 의중을 살폈다.

저 새끼 저거 진짜 순 거짓말쟁이네.

아무래도 오늘 살얼음판을 걷는 기분일 것 같다.

* * *

진짜 이거 괜찮은 건가.

나는 힐끔 센 공작을 보았다. 같이 출발선에 있으니 감회가 남달랐다.

적과 하루를 함께 해야 한다니!

스릴을 넘어서서 공포였다.

“오늘은 무사히 넘어가야 할 텐데요.”

“……하하. 그러게요.”

센 공작의 말에 나는 어색하게 웃었다.

경계를 늦출 수가 없었다.

다르게 생각하면 그와 함께 있을 때 또 다른 일이 생겨야 앞뒤가 맞았다.

그래야 센 공작이 용의 선상에서 벗어날 수 있으니까.

‘그래서 아버지가 조끼를 준 것 같기도 하고.’

어제는 미리 계획을 했다지만, 오늘은 아니었으니까.

하지만 리온이 주변에서 보고 있을 테니 큰일은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탕!

멍하니 앞을 보고 있던 나는 총소리에 정신을 차렸다.

사냥이 시작된 것이다.

나와 센 공작은 곧장 숲속으로 들어갔다.

“영애에게 우승을 안겨 주고 싶으니 열심히 하겠습니다.”

“어머, 로맨틱하셔라.”

나는 꺄르르 웃으며 고개를 돌리곤 정색했다.

죽음을 안겨 주면 모를까. 우승이라니 당치도 않다.

고삐를 꽉 쥔 채 사냥을 위해 화살을 꺼내 들었다.

* * *

“준비는?”

“다 되었습니다.”

“끝나는 시각에 맞춰서 시선을 돌려야 할 거다.”

“네, 걱정하지 마십시오.”

리온은 마법사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엘르가 사라진 곳을 확인한 그가 조심스레 말의 방향을 틀었다.

“오늘도 무슨 일이 생길 테니 긴장 늦추지 말고.”

“……네?”

마법사가 이해가 되지 않는 듯 고개를 옆으로 기울였다.

어제 그 사달이 났는데 또 일이 생긴다고?

황실에서도 경비를 늘렸고, 어제의 일에 대한 조사를 시작했다고 들었다.

“아무 일도 없다면 다행이지만, 그럴 가능성은 낮을 테니까.”

“확신하는 어투시군요.”

리온은 손을 휙휙 저었다.

“빨리 가.”

마치 귀찮다는 듯 마법사에게 말하자 그는 하는 수 없이 리온의 반대 방향으로 말을 돌렸다.

“정말이지, 알 수가 없는 분이라니까.”

그렇다고 반항하기엔 너무도 무섭고.

리온은 마법사가 사라진 걸 확인하고 나서야 속도를 올렸다.

* * *

“……저 센 공작님?”

“아무래도 이 길이 아닌 것 같습니다.”

내 말이 그거야.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주변을 보았다. 어제보다 더 스산한 느낌인데.

‘작정을 했네, 정말이지…….’

그렇게 나를 죽이고 싶나?

아니 내가 뭐 했다고!

아무리 우리가 붉은 문양의 반려라 해도. 나는 아무것도 하지 않았는데?!

이렇게 적극적으로 행동할 줄 알았다면 죄책감 따위 버리고 내가 먼저 행동할 걸 그랬다.

하긴 사람이 살기 위해선 뭔들 못하겠는가.

“돌아갈까요?”

“그러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센 공작은 고개를 끄덕였다.

방향을 튼 나는 먼저 나서지 않고 그를 보았다.

“앞장서서 가세요.”

적에게 등을 보이는 것만큼 멍청한 것은 없었다.

이렇게 된 이상 그를 먼저 앞세워야지.

그래야 그가 작당을 해도 내가 먼저 공격당하는 일은 없을 테니까.

“알겠습니다. 뒤 조심하시고.”

센 공작은 흔쾌히 앞장서서 걸었다.

저러는 거 보니 왠지 뒤가 위험하게 느껴지는 것 같기도 하고…….

“그, 그냥 나란히 걸어요!”

나는 다급히 그의 옆으로 가 속도를 맞췄다.

“센 공작님, 요즘 잠을 못 주무셨나요?”

나는 싱긋 웃으며 그에게 다정하게 말을 걸었다.

반려라는 각인이 있으니 이럴 때 교감이라도 쌓아야 조금 덜 죽이고 싶을지도 모르고.

내 말에 그가 힐끔 고개를 돌리더니 헛기침을 했다.

푸른 눈동자를 깜빡이며 그에게서 시선을 거두지 않았다.

“그렇게 쳐다보시면 위험합니다.”

“그런가요? 그럼 공작님이 구해 주시겠죠.”

나는 너스레를 떨었다. 전략을 바꾼 것이긴 한데 먹힐지는 모르겠다.

“물론입니다.”

센 공작의 표정이 미묘하게 일그러졌다.

왠지 생각이 많아 보이기도 하고?

나 역시 그와 거리가 가까워지니 심장이 쿵쿵 뛰었다.

기분 좋은 설렘은 아니었지만, 그리 나쁘지도 않았다.

‘나만 정신 똑바로 차리면…….’

그를 조금은 흔들어 놓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 생각을 하자 정신이 번쩍 들었다.

“영애! 조심!”

그 순간 센 공작이 몸을 날려 내 말 위로 올라탔다.

“꺄아아악!”

깜짝 놀란 나는 그의 품에 안긴 채 말에 밀착했다.

고삐를 낚아챈 센 공작은 말의 엉덩이를 차며 빠르게 달리기 시작했다.

“뭐, 뭐예요?!”

갑작스런 그의 행동에 나는 말에게 매달려 소리쳤다.

“다른 사람의 기척이 느껴졌습니다. 위험하니 빨리 이동해야 합니다.”

그냥 각자 달렸어도 되지 않나?

나는 잔뜩 얼어붙은 채 눈을 질끈 감았다.

왜 예상을 하나도 벗어나지 않는 거야!

다른 사람의 기척과 기다렸다는 듯한 센 공작의 행동이 우연일 리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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