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97화
“생각이 많아 보이는군.”
“……전하?”
화들짝 놀란 제니스가 황급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자기가 여기에 있는 건 또 어떻게 안 걸까.
뒤를 보니 시녀가 보였다.
“시녀 볼 거 없어. 내가 여기에 있는 줄 안 거니까.”
그놈의 문양.
제니스는 입가가 파르르 떨렸다. 제게 있어 문양은 두 가지 감정을 느끼게 해 주는 존재였다.
이렇게 혼자 있고 싶을 때에도 어김없이 저를 찾아내지 않는가.
“……무슨 일로 오셨어요?”
제니스의 말에 델테르는 미소 지었다.
“글쎄, 무슨 작당을 하고 있는 건지 궁금해서.”
델테르의 말에 제니스는 어깨를 으쓱였다.
“모른 척하지 마. 네가 하고 있는 게 뭐든 나는 다 알고 있으니까.”
“그렇겠죠. 우린 이어져 있으니까요.”
제니스는 델테르의 손목을 쓱 쓸었다.
이래서 함께 있고 싶지 않았다. 문양의 힘에 의해 휩쓸리게 될 테니까.
제 마음과 다르게 몸이 반응했다. 이게 싫었다.
“그래서 머리는 열심히 굴렸나? 아버지께 뭐라고 했을까.”
“그냥 문안 인사드리러 갔어요.”
“그래?”
델테르는 제니스의 어깨를 꽉 쥐며 상체를 숙였다.
그녀의 귓가에 작게 속삭이며 웃었다.
“그거 아나? 리온이 말이야 무슨 짓을 했는지.”
아마도 모를 것이다.
그 다음 상대가 누구인지도.
제가 어떤 뒤처리를 했는지 알게 된다면 제니스는 어떤 표정을 지을까.
반려라는 문양을 믿고 행동하는 게 얼마나 무모한지.
“제니스, 성녀가 된다고 해서 모든 게 다 해결될 거란 생각은 마.”
“……어떻게 그걸.”
“난 너에 대해서 모르는 게 없거든.”
델테르는 손목에 차 있는 액세서리를 풀며 씩 웃었다.
“이게 싫으면 날 직접 죽여.”
“……못해요.”
“날 죽이고 싶잖아. 왜 못하지? 알량한 양심 때문에 내게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잖아.”
알고 있다.
제니스는 지금이라도 델테르의 목을 조르고 싶었다.
그러나 그가 죽게 된 이후 리온이 저를 죽이려 한다면?
그럼 그땐 누가 절 지켜 줄 수 있을까.
그 정도로 바보는 아니었다.
“그럴 생각 없어요.”
“……없어?”
“전하를 어떻게 죽여요.”
제니스는 고개를 돌려 델테르를 마주 봤다.
이렇게 감정이 드러나는 사람만큼 휘두르기 좋은 사람도 없다.
조금만 달래 주면 델테르는 금세 무너진다.
그녀의 따뜻한 손이 델테르의 뺨에 닿았다.
흠칫 몸이 잘게 떨려 왔다. 두 눈에는 어김없이 당황해하는 감정이 묻어났다.
“그러니 걱정 말아요. 그냥 내가 살아남기 위해 하는 행동이니까.”
“웃기는군.”
델테르는 제니스의 손을 꽉 잡으며 입 맞췄다.
“그래, 그렇게 도망칠 궁리를 계속해. 나는 언제고 쫓아갈 테니까. 이만 쉬어.”
그는 미련 없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조금 더 그녀와 함께 있다면 제 감정을 다스리기 어려울 터.
그래서 이쯤하고 물러나 줄 생각이었다. 그걸 제니스도 원할 테고.
이윽고 델테르는 등을 돌리곤 정원을 벗어나려 했다.
“……등 돌리지 말아요.”
저를 뒤에서 끌어안는 제니스만 아니었다면 말이다.
“놓는 게 좋을 거야. 후회하기 싫다면.”
“……후회하지 않아요. 어차피 피한다고 해도 달라질 건 없잖아요.”
갑작스레 바뀐 제니스의 태도가 이상했다.
그럼에도 델테르는 넘어가 줄 생각이었다. 어차피 그녀가 원하는 대로 되지 않을 테니까.
* * *
나는 똥 마려운 강아지인 양 다리를 떨었다.
“왜 이렇게 안 오시는 거야.”
시계를 보니 디리아가 확인하러 간 지 꽤 시간이 지났다.
달달달달.
의자에 앉은 내 다리가 멈출 줄을 모르고 떨렸다.
똑똑똑.
“오셨나 봐!”
나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문을 벌컥 열었다.
“무슨 일이길래 이토록 나를 찾아?”
“아버지, 큰일 났어요.”
“……큰일?”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디리아는 차를 가져오기 위해 자리를 비켰다.
“몸이 이상해요!”
나는 이내 아버지의 옷깃을 잡아당기며 울먹였다.
“몸이 이상하다니?”
“그게! 막, 다른 사람 힘을 내 마음대로 쓰고……!”
“능력이 생긴 건가? 흡수하는 거야 벨루아 가문의 내력이라지만.”
“흡수하는 것뿐만 아니라 내뱉는 것도 된다고요!”
“……그건 확실히 이상하군.”
에드가는 나를 진정시키려는 듯 내 손을 잡아 자리에 앉혔다.
“일단, 리온을 불러야겠구나.”
“서신을 쓰긴 했는데 내일 황태자가 올 테니 피해서 오라고 했어요.”
“그렇구나. 별문제는 없을 테니 걱정 말아라.”
“네, 알겠어요…….”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한숨을 내쉬었다.
“아, 참! 아까 황후를 만났어요. 찾아 왔더라고요.”
“……황후가?”
에드가의 얼굴이 무섭게 일그러졌다.
“거래를 하려 들던데 삼일이면 답이 올 거예요.”
“삼일?”
“우리 수도로 다시 가요.”
그래야 뭐든 하지.
변방에 있으면 도태되기 마련이다.
기반도 닦았고, 그동안 사업도 충분히 일으켰으니 원래로 돌아가야지.
“수도라…… 그래 돌아갈 때가 됐긴 하지.”
“오래 걸렸죠?”
“그래, 다시 돌아가게 될 줄도 몰랐지만.”
에드가의 눈동자가 슬픔에 잠겼다. 하긴 누구보다 억울한 건 아버지였겠지.
황실을 볼 때마다 화가 났을 테고.
“그보다 위험하게 황후를 단둘이 만났다는 거구나.”
“아…… 그게, 미, 믿을 구석이 있었어요!”
거짓말이지만, 이렇게라도 안심하게 둬야지.
안 그러면 또 외출하지 못하게 막을지도 모른다.
“내일 황실에서 올 테니 다른 생각하지 말고 쉬도록 해라.”
“……안 혼내세요?”
“무사하니 됐다.”
에드가는 내 머리 위에 손을 올리며 옅게 웃었다.
“그런데 센 공작에 대한 건 묻지 않는구나.”
“으음, 뭐…… 모르는 게 나을 것 같아서요.”
“그래 잘 생각했다. 몸도 괜찮아 보이니 푹 쉬거라.”
“네, 알겠어요.”
때마침 디리아가 차를 가져왔다.
나는 아버지와 오랜만에 마주 앉아 평화롭게 차를 마셨다.
“차향이 좋네.”
“그렇죠? 이 민트 향이 시원하더라고요.”
에드가는 고개를 끄덕였다.
“꽤 괜찮은 시간이구나. 앞으로도 종종 이런 시간을 가지는 것도 나쁘지 않겠어.”
“그렇죠? 저도 그렇게 생각해요.”
나와 에드가는 향을 깊게 맡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내일 집을 얼마나 헤집고 갈지 기대가 된달까.
디리아는 나와 에드가를 번갈아 보며 고개를 저었다.
“두 분 이렇게 보니 정말 부녀가 맞는 것 같아요.”
“그래?”
“네, 보기 너무 좋아요.”
디리아의 말에 나는 활짝 웃었다. 이렇게 되기까지 얼마나 힘들었는지…….
현재를 좀 더 즐길 필요가 있겠어.
에드가의 기분도 좋아 보이니까 슬쩍 던져 봐도 되지 않을까.
나는 찻잔을 내려놓고 씩 웃었다.
“아버지 그래서 말인데요. 제가 부탁드릴 게 있어요.”
“……뭐지?”
“선수를 쳐야 할 것 같아요.”
“선수?”
“네, 리온이랑 저 약혼할래요.”
“……허?”
좋았던 분위기가 한순간에 싸늘해졌다.
너무 일렀던 모양이다.
* * *
“그만 말해. 몇 번째야.”
“그러게 너무 섣부르셨어요.”
디리아가 치장을 해 주며 한숨을 내쉬었다.
“아니 분위기 좋았잖아.”
“그래도 약혼 이야기는…… 리온 님도 알고 계세요?”
“아니?”
리온은 좋다고 하지 않을까.
“리온 님께 반려가 있다면 곤란하게 될 텐데요.”
“응, 알아.”
디리아는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반려가 있는 사람과 약혼을 해 봤자 소용없다고 생각해서일 터.
“그나저나, 황후 폐하는 어떻게 했을라나.”
“……또 무슨 일 있으신 건 아니죠?”
“으응, 아닐걸.”
잠잠한 걸 보면 황후도 별수 없었던 거겠지.
나의 미지근한 반응에 디리아는 불안한 표정을 지었다.
“걱정 마. 별일 없을 테니까.”
“저야 아가씨가 그렇게 말하신다면…… 그런데 걱정되는 게 하나 있어요.”
“응?”
“리온 님이요…… 어쩐지 소문의 그분과도 비슷해 보여서.”
소문의?
그 순간 잊고 있었던 한 가지가 생각났다.
‘저주받은 아이.’
가문을 멸살시키고 사라져 버린 붉은 눈을 가진 남자.
그래 그 중요한 걸 잊고 있었다.
문양에 정신이 팔려 리온이 세상에 드러나게 되면 곤란해질 걸 간과한 것이다.
“……어떻게 해서든 막아야겠어.”
“네?”
“더더욱 리온이랑 내가 약혼을 해야 할 이유가 생겼네.”
“아가씨?”
나는 디리아의 손을 잡고 결연한 표정을 지었다.
“괜찮아.”
황태자가 가문에 들이닥칠 시간이 되었으니 정신 똑바로 차려야 한다.
문을 열고 나서자 아니나 다를까 저택이 소란스러웠다.
“아가씨, 나오셨나요?”
“헤센 경. 황태자 전하가 왔나 보네요.”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제니스 황녀도 왔나요?”
“오늘은 함께 오지 않으셨습니다.”
“……그래요?”
그건 의외인데.
제니스가 오지 않았다는 것은 지금 리온에게 갔을지도 모른다는 건데.
“일단은 안내해 줘요.”
“안 가시는 게 낫지 않을까요?”
“뭐 피할 이유도 없죠.”
델테르라면 더더욱.
그 역시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떠봐야 했다.
제니스가 움직이기 시작한 이때 그도 가만히 있을 리 없을 테니까.
‘황후한테 무슨 이야기를 들었는지 알아내야 하고.’
나는 헤센 경의 안내를 따라 아버지와 델테르가 있을 곳으로 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