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99화 (99/120)

제99화

“헤센 경!”

“제발 소리 좀 안 치시면 안 됩니까?”

헤센이 가슴을 움켜잡으며 울먹였다.

“나랑 어디 좀 가자.”

“저 바쁩니다.”

“업무보다 더 중요한 일인데.”

“……정말입니까?”

의심 가득한 눈동자가 재빨리 나를 훑고 지나갔다.

나는 흔들리지 않고 진지한 표정을 유지했다.

“진짜, 정말 중요해.”

그제야 헤센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여전히 내키지 않는 얼굴로 마지못해 뒤따르긴 했다.

헤센과 함께 저택을 나서기 위해 문을 열었다.

후두둑, 후두둑.

“……오늘 정말 가셔야겠습니까?”

헤센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나 역시 조금 고민이 되긴 했다.

“아니 비가 왜 이렇게 많이 오는 거야.”

천둥 번개와 함께 난리가 났다.

아까만 해도 괜찮았던 것 같은데…….

이러다가 황태자도 못 가겠다고 하루 묵겠다는 거 아니야?

“그래도 오늘 가야 해. 안 그럼 갈 시간이 없을지도 몰라.”

“대체 무슨 일이길래 그러는지 말이라도 해 주십시오.”

헤센의 태도를 보아하니 알려 주지 않으면 꿈쩍도 않을 것 같았다.

하는 수 없이 나는 그에게 손짓했다.

“이리 가까이 와 봐.”

“……그냥 말씀하시지.”

“진짜 비밀이라 그래.”

결국 헤센은 몸을 숙여 내게 귀를 가까이 댔다.

“수도에 저택을 보러 가야 해.”

“저택은 왜…… 설마 아가씨!”

헤센 경은 다소 놀란 표정을 지었다.

살짝 벌어진 입을 보아하니 충격받은 모양새였다.

“혹시…… 결혼하십니까?!”

“갑자기 무슨 결혼이야! 물론 비슷한 거 할 예정이긴 하지만.”

“비슷한 건 또 뭡니까! 백작님께서는 알고 계시는 건가요!”

“약혼 이야기는 했어. 아니, 이게 중요한 게 아닌데!”

나도 모르게 헤센 경에게 말려 버렸다.

다시금 정신을 차리며 고개를 저었다.

“벨루아 가문 수도로 다시 돌아갈 거야.”

“……그 말씀은.”

“그래, 우리가 살 집을 알아보러 가는 거야.”

“정말 저희 수도로 가는 겁니까?”

헤센의 눈이 커다랗게 뜨였다.

그는 자세를 고쳐 잡더니 이내 품속에 있는 수첩을 꺼냈다.

“미리 말씀해 주셨으면 좋았을 텐데. 그럼 일단 몇 군데 둘러보는 게 좋겠습니다.”

“……그 수첩은 항상 지니고 다녀?”

“네, 제가 부동산에 관심이 좀 많습니다.”

의지가 불타오르는 거로 봐서 어쩐지 좋은 집을 구하게 될 것 같다.

“일단, 빨리 다녀오는 게 좋겠어. 나중에 못 돌아오게 되면 곤란할 테니까.”

“네, 그러도록 하죠. 이렇게 서두르시는 걸 보니 기한이 얼마 남지 않았군요.”

“눈치 빠른 사람 같으니.”

나는 고개를 연신 주억거렸다.

헤센은 곧바로 마차에 올라탔다.

“진짜 변방에 쫓겨나서 얼마나 힘들었는지…… 그 세월을 말도 다 못할 겁니다.”

“응, 다 알고 있어.”

나는 그의 어깨를 토닥였다. 연회도 제대로 열지 않는 가문에 있었으니 혼삿길은 무슨…….

비바람이 몰아쳐서 그런가 헤센 경이 더욱 처량해 보였다.

옷이 조금 젖긴 했지만 마차에 올라탔다.

헤센 경은 생각해 보니 수지 타산이 맞지 않았는지 중얼거리기 시작했다.

“그만 중얼거려. 보수 쳐 줄 테니까.”

놀랍게도 그 말과 함께 헤센의 입이 닫혔다.

영업용 미소까지 얼굴에 띄운 채.

지겨운 시간이 지나고, 마법 포탈 덕분에 그렇게 며칠은 걸리지 않았다.

“하늘에 구멍이 뚫렸나 봐.”

어찌나 쏟아지는지 한 발 앞으로 나아가기도 힘들었다.

이런 날 헤센 경을 굳이 끌고 온 나는 악덕……인가?

“일단 집부터 해결하고 빨리 돌아가.”

왠지 짧은 시간 내 녹초가 될 것 같지만, 급하니 어쩔 수 없지.

수도로 오라 했는데 집이 없다고 버티긴 좀 그랬다.

“네, 저도 같은 마음입니다. 알다시피 아가씨께 끌려오는 바람에 업무가 밀렸거든요.”

“……집에 가면 도와줄게.”

그런데 어차피 이것도 헤센이 해야 하는 일이지 않나?

나는 뭔가 이상해서 고개를 옆으로 갸웃했다.

“어서 가시죠!”

헤센은 나를 이끌고 거침없이 어디론가 발걸음을 옮겼다.

얼마쯤 지나자 고급스러운 저택 하나가 나타났다.

비가 와서 을씨년스럽긴 했지만, 괜찮았다.

‘흐음, 우리 가문의 이미지와 어울리긴 해.’

그래도 웅장해 보였다.

헤센의 안내에 따라 저택으로 들어서자 눈이 휘둥그레졌다.

“너무 좋은데?”

“황실과도 멀지 않고, 시내와의 거리도 좋습니다. 관리도 깨끗이 되어 있어 조금만 손보면 될 겁니다.”

“마음에 들어.”

그러니까 따지고 보면 황세권이네!

견제해야 하는 곳이 가까울수록 유리할 테니까.

“헤센 경을 데려오길 잘한 것 같아.”

나는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그러자 헤센의 어깨가 위로 솟구쳤다.

정말이지 다루기 쉬운 사람이라니까.

“다른 곳도 있습니다. 그런데 저는 이곳이 가장 좋을 것 같긴 합니다.”

“몇 군데나 있어?”

“정 보실 거라면 세 군데 정도 보시면 될 것 같습니다.”

남들의 눈에도 딱 보기 좋게 내세울 만한 곳처럼 보였다.

“음, 다른 곳도 가 봐. 돈은 내가 지불할 테니 걱정하지 않아도 돼.”

“……아가씨가요?”

뭐야, 그런 눈으로 보면 상처받는데.

이래 보아도 재산을 꽤나 모아 뒀다.

살아남기 위해서 악착같이 돈이 되는 건 다 해댔었지…….

아버지에게 광산을 통해 받는 것만 해도 쏠쏠했다.

“알겠습니다.”

헤센의 눈빛이 빛났다.

어쩐지 가문의 재산을 쓰지 않는다고 하니 더욱 열정이 넘치는 것 같은데.

“자, 그럼 두 번째도 가 보자!”

나는 신이 난 듯 헤센의 손을 잡아끌었다.

역시 세상에서 제일 신나는 건 돈 쓰는 거야.

그동안 스트레스가 제법 쌓였는데 오늘 그걸 다 풀고 가야겠다.

* * *

리온은 망토를 쓴 채 턱을 느슨하게 쓸었다.

다행히 전 마탑주는 죽었다. 수소문 끝에 알아냈지만, 자신의 급변한 처지를 견디지 못하고 죽은 것 같았다.

그럼 이제 남은 것은 루비온 가문의 보석이었다.

리온은 손바닥에 고인 빗물을 가만히 바라봤다.

“미안하게 생각해. 그런데 들어가려면 이게 필요하다네?”

그에게 뺏은 초대장을 품에 넣고는 리온은 바닥에 쓰러져 의식을 잃은 사람을 가볍게 일으켜 세웠다.

“비가 오는데 여기서 자면 감기 걸릴 텐데.”

어디가 좋으려나.

주변을 찬찬히 둘러보던 리온은 때마침 괜찮은 곳을 발견했다는 듯 손가락을 튕겼다.

“그래, 쓰레기에겐 저기가 어울리지.”

쓰레기가 잔뜩 쌓여 있는 곳이 보였다.

리온은 남자를 그곳에 앉히곤 쓰레기로 고이 덮어 주었다.

“이러면 감기는 안 걸리겠다. 이건 잘 쓰도록 하지.”

비 오는 골목을 유유히 빠져나갔다.

술집 앞에 선 리온은 건장한 사내를 쓱 훑었다.

“초대장.”

문지기는 리온을 가로막았다.

여전히 얼굴을 드러내지 않은 채 품속에서 초대장을 꺼냈다.

“차림새가 달라서 못 알아봤습니다. 죄송합니다.”

“괜찮습니다.”

리온은 빠르게 문지기를 지나쳐 안으로 들어가려 했다.

“그런데 너무 다른 것 같아서 확인이 좀 필요할 것 같은데.”

“……주인님께서 급한 일이 생겨서 저를 보냈습니다.”

슬쩍 망토를 들어 올려 붉은 눈동자를 보이자, 문지기는 홀린 듯 고개를 끄덕였다.

“확인했습니다. 들어가 보십시오.”

“물건은 확실히 나오는 겁니까?”

“오늘 경매에 나올 거니 걱정하지 마십시오.”

문지기는 멍한 눈동자로 문을 열었다.

손쉽게 가게 안으로 들어온 리온은 자리를 잡고 주변을 살폈다.

‘그냥 술집 같군.’

마시지도 않은 비싼 술을 시켜 시계를 보았다.

언제 시작할지 모르니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

그것도 한두 시간이지, 세 시간이 지나가자 인내심의 한계가 느껴졌다.

‘허탕인가?’

분명 잘못된 정보는 아닐 텐데.

카벤이 알아 온 정보에 의하면 여기가 거래 장소가 맞았다.

겉으로 보기엔 술집 같지만, 정해진 시간이 되면 암시장이 열린다.

초대받은 사람들만 갈 수 있는 곳이라 들어오는데 꽤 까다로웠다.

그래서 초대장이 있어 보이는 귀족 놈 하나를 골라잡아 뺏어 들어왔지 않았나.

가게에 사람이 하나둘 차기 시작했다.

그제야 사람들의 입에서 기대에 섞인 목소리가 나왔다.

초대장을 받고 온 이들이었으니 대부분 보석의 존재를 듣고 왔을 터.

옷차림도 보아하니 꽤 값이 나가 보였다.

여기서 허름한 옷을 입은 건 리온뿐이었다.

‘신경을 썼더니 오히려 더 튀게 생겼네.’

저를 알아볼 이들은 없겠지만, 혹시 몰라 일부러 구석진 자리에 앉아 있었다.

누군가 자신을 알아본다 해도 능력을 쓰면 그만이었으니까.

“그거 들었나? 오늘 나온다고 하던데.”

“루비온 가문의 보석 말인가?”

“쉿, 조용히 하세. 다른 사람이 듣는다면 큰일 나.”

남자들의 대화가 귓가에 작게 들려왔다. 그제야 리온의 입가에 미소가 걸렸다.

‘허탕은 아니겠네.’

리온은 성급히 움직이지 않았다.

뭐든 때를 기다려야 하는 법.

어차피 이들은 보석의 존재를 궁금해하는 것뿐이다.

붉은 눈동자를 파내자 짙은 피와 함께 보석이 되었다.

그게 바로 저주의 시작인지도 몰랐겠지.

그 보석은 희귀한 만큼 상당한 값어치를 지녔다.

리온의 기억대로라면 현재 존재하는 보석은 다섯 개뿐이었다.

동그랗고 크기도 상당히 커 팔기만 하면 꽤 큰돈을 만질 터.

꽤 비싼 가격이기에 구입하는 사람도 꽤 큰돈을 들여야만 가능했다.

그러니 보통의 사람이라면 구경하기도 어려운 진귀한 물건이었다.

“드디어 시작되나 보군.”

한 사람의 감탄과 함께 진행자로 보이는 자가 모습을 드러냈다.

그의 손에는 핏물처럼 붉은 둥근 보석이 놓여 있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