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06화 (106/120)

제106화

“저 왔어요.”

“헤센 경까지 데리고 수도에 갔다지.”

“으음, 그가 꼭 필요했어요. 황후 폐하가 서신을 보냈더라고요.”

“정말로 수도에 간다라…….”

“집도 괜찮은 걸로 구입했어요. 가구도 헤센 경이 알아서 채울 거예요.”

“……제법이군. 그런데 왜 청구서가 없지?”

에드가는 미심쩍은 표정을 지었다. 분명 제게 청구되어 날아왔어야 했건만, 잠잠했다.

서신 이용 포탈이 따로 있어 청구서는 곧바로 날아온다.

그런데 엘르가 갔다 왔음에도 잠잠하지 않은가.

“아, 제 돈으로 했어요.”

“……네 돈?”

“제가 가자고 했으니까요. 이번에 제집 마련했다고 생각하면 돼요.”

“그래, 수도에 가면 다시 집을 보긴 해야겠구나.”

그때 헤센이 손을 들어 끼어들었다.

그는 나와 함께 집을 샀으니 가격이 얼마인지 알고 있었다.

에드가가 들으면 혼날지도 모른다.

“저…… 비로이드가 소유하고 있는 저택을 샀습니다.”

“거기라면 꽤 괜찮은 곳을 샀군. 얼마에 구매했지?”

“……그게.”

헤센의 이마에 식은땀이 흘렀다. 나는 어색하게 웃으며 이실직고했다.

“그, 어…… 일이 있어서. 좀 비싸게 매입했어요. 대신 내일 바로 비워 주기로 했고요.”

“내일 바로?”

“네, 큰 가구나 다른 것들도 놔두고 가기로 계약했으니 살 만한 것도 별로 없어요.”

“네! 맞습니다! 관리가 굉장히 잘되어 있어서 거의 다른 돈은 들지 않을 것 같습니다.”

헤센은 재빨리 맞장구를 쳤다. 그래, 이것만이 우리가 에드가의 잔소리를 피하는 길이었다.

“그래서 얼마에 샀나?”

“……삼천만 골드에 매입했습니다.”

“삼천만?”

에드가는 고개를 갸웃했다.

“그 저택이 그 정도 값어치를 했던가?”

“그게…… 사정이 있었습니다.”

헤센은 이내 땀을 뻘뻘 흘리기 시작했다.

“걱정 마세요. 제 사비로 했으니까요.”

“그래, 네 이름으로 집 하나 있는 것도 나쁘지 않겠지.”

에드가는 이해해 주는 듯했다. 가문의 돈을 쓰지 않아서인가?

뭔가 조금 서운하긴 했지만, 혼나진 않았으니 넘어가야지.

“삼천만 골드는 그렇다 치고, 리온은 왜 만났을까.”

“집을 사려다가 일이 좀 꼬였어요. 비로이드 그 사람이 경매에 뭔가를 판매했는데…….”

이전의 에드가와는 다를 테니 말해도 괜찮겠지?

나는 호흡을 가다듬고 허리를 폈다.

“루비온 가문 기억나세요?”

“잊을 리가 있나.”

“가문이 멸문했다는 것도 아시죠?”

“워낙 유명한 이야기니까.”

에드가는 고개를 끄덕이며 내 이야기를 경청했다.

“저주를 받은 아이가 있었다는 것도 아실 테고.”

“그래, 그게 그놈이란 것도 알고 있다.”

그렇구나. 알고 계셨던…….

“……네?!”

순간 화들짝 놀라 에드가를 보았다. 어떻게 알아차린 거지?

내가 말을 했던 적이 있었나?

아니, 단언컨대 한 번도 없었다.

리온의 힘을 받아 치료를 했으니 힘의 크기는 이미 알고 있었을 터.

그러나 루비온 가문의 일족이란 것도 알고 있을 줄은 몰랐다.

나는 눈을 깜빡이며 입을 벌렸다.

‘이건 좀 충격인데.’

아버지는 어디까지 내다본 걸까.

어릴 때 리온을 데려와 두 사람이 교감을 쌓게 한 것이 다행인 것 같다.

“루비온 가문의 보석이 경매에 나왔어요. 생각지도 못한 거라 구입을 하려 했는데. 리온이 그걸 사 버렸죠.”

“흐음, 보석이 아직도 남아 있었던 모양이구나.”

그는 놀라지 않았다. 하긴, 어둠의 경로에 늘 아버지가 있었을 텐데 그 정도는 알 테지.

“그걸 이용해 저주를 풀 생각이에요.”

“……저주라.”

그는 이제야 알아차린 듯 씩 웃었다.

“그놈이 보석은 삼천만 골드에 산 모양이지.”

“어떻게 아셨어요?”

“그런 경매는 초대장이 없으면 들어갈 수 없어. 그 녀석이 초대장이 있을 리도 없을 테고.”

나는 아버지의 말에 넋을 놓았다. 역시 정보상 한 짬밥은 어디 못 가네.

“그렇다면 누군가의 초대장을 뺏어서 들어갔을 테지.”

나는 연신 감탄했다.

“그게 하필이면 비로이드였고, 네가 집을 보러 갔을 테니 그자를 찾아 나섰고 그놈이 한 짓을 알게 되었겠지.”

나와 헤센은 박수를 쳤다. 이건 정말 인정해 줘야 한다.

“아버지가 왜 정보상의 대가가 되었는지 알 것 같아요.”

“그래서 그 보석은 어떻게 됐지?”

“리온이 연구를 한다고 했어요. 저주를 풀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솔직히 자신이 없었다.

반려를 인정하고 문양을 받아들이게 된다면 진실한 사랑에 의해 저주는 사라진다.

그러나 리온은 제니스를 사랑하지 않는다. 그 말은 반려를 인정하지 않는다는 말이었다.

그러니 원론적인 방법은 있으나 마나였다. 그는 절대로 제니스를 사랑하지 않을 테니까.

다른 방법을 찾아야 했기에 리온이 바쁘게 움직이는 것이었다.

“아! 그리고 약혼하게 될 거란 것도 알렸어요.”

“……누구 마음대로?”

“약혼하는 제 맘이죠. 이제 와서 어쩔 수 없을 걸요?”

“또 무슨 짓을.”

에드가는 한숨을 길게 내쉬었다.

눈살이 구겨진 걸로 봐선 굉장히 마음에 들지 않는 것 같다.

“신문에 이미 제보했어요. 그래야 제니스가 선수를 못 치니까요.”

“이럴 때는 빨라선.”

“매번 그랬잖아요? 아시면서.”

놀랄 것도 없을 텐데.

아버지는 여전히 내가 하는 일의 속도가 적응이 안 되는 모양이다.

“연회에 리온을 파트너로 내세울 셈이구나.”

“네, 아무래도 그래야겠어요. 내일 비가 그치면 황태자 전하랑 궁에 다녀올게요.”

수도에 가는 건 해결되었으니, 이제 남은 건 리온과의 관계였다.

“한 가지 문제라면…… 제니스의 반려가 리온이란 걸 알고 있다는 건데…….”

뭐, 그거 때문에 스캔들을 낸 거긴 한 거지만.

“황녀가 어떻게 나올지 걱정이 되긴 하는구나.”

내가 놓치고 있는 게 뭐지. 그녀에게 남은 패가…….

“있다. 그걸 놓쳤었네!”

하도 다른 일들이 많아서 제니스의 능력을 잊고 있었다.

그녀가 성녀로 인정을 받고 있긴 했어도 정식으로 임명된 것은 아니었다.

“이번 연회에 제니스 황녀는 성녀 임명식을 할 거예요.”

그렇다면, 그걸 빌미로 뭔가를 요구했을 것이다. 아마도 리온이겠지.

“내일 수도로 갈 거니까 아버지도 준비해서 오세요.”

“그러도록 하지. 이곳은 별채로 써야겠군.”

에드가는 아쉬운 듯 집무실을 살폈다.

변방이긴 했으나 꽤 저택이 크고 한적해서 마음에 들었는데.

“다른 건 내가 알아서 할 테니 황제를 알현하고 난 뒤 곧바로 집으로 오거라.”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수도로 간 뒤 여러 사건들이 터지겠지.

슬슬 마무리 지을 때가 되었어.

반려의 각인이 완성되기 전에 끝내야만 했다.

* * *

다행히 비는 거짓말처럼 그쳤다.

델테르와 함께 마차를 타고 가는 것만 빼곤 괜찮았다.

“그나저나, 아침부터 소란스럽던데.”

“그럴 일이 좀 있어요. 나중에 다 알게 되실 거예요. 물론, 저희 가문에 관심은 없으시겠지만.”

델테르는 미간을 찡그리며 창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아버지에게 뭘 부탁할 생각이지?”

“음, 글쎄요.”

“섣부르게 생각하면 곤란하게 될 거야.”

“제 걱정도 해 주시고 상냥하시네요. 그나저나 황녀님이 제가 폐하께 무슨 소원을 말할지 눈치채신 건 알아요?”

“알아.”

나 아직 아무 말도 안 했는데.

그냥 대화가 하기 싫은가 보다.

알긴 뭘 알아. 태평한 거 보니 아무것도 모르는 것 같구만.

그 말을 끝으로 우리는 대화를 하지 않았다.

* * *

황궁에 도착하자마자, 사람들의 시선이 내게 쏠렸다.

‘스캔들이 퍼졌나 보네.’

그제야 한결 마음이 놓였다.

변방에 우리와 있었던 델테르는 아직까지 상황을 모르고 있었다.

“왜들 이렇게 소란스럽지?”

그의 날카로운 목소리에 시녀들이 흠칫 몸을 떨었다. 황급히 모여 있던 사람들이 흩어졌다.

결국 델테르는 참지 못하고 시종을 불러 세웠다.

나는 태연하게 그를 지켜보았다.

“왜들 저러는지 설명해.”

“그, 그게…… 아침에 신문을 보고 다들 말이 많았습니다.”

“신문?”

델테르의 말에 시종이 오늘 자 신문을 가져왔다.

대문짝만하게 쓰여 있는 벨루아 가문과 마탑주의 스캔들이 보였다.

“……하?”

와락 일그러지는 그의 얼굴을 보자 절로 입매가 솟구쳤다.

“어머, 이거 제 이야기네요. 그래서 다들 저를 보며 수군댔나 봐요.”

나는 모른 척 입을 가리며 눈을 동그랗게 떴다.

리온이 마탑주가 되었다는 사실이 공포됨과 동시에 약혼이 드러나게 되었다.

이상할 게 없긴 했다.

사냥 대회에서도 이후 다른 활동에서도 리온은 벨루아 가문의 기사로 알고 있었으니까.

게다가 내 호위 기사였지 않은가.

이 얼마나 로맨틱한지!

귀족들은 세기의 로맨스에 열렬히 환호할 것이다.

그리고 황제 역시 이미 소식을 들었겠지.

만약 리온이 제니스의 반려인 것을 밝히게 되면 내가 비련의 여주인공이 되는 셈이다.

원래 사람은 불행한 쪽을 더 기억하기 마련이다.

제니스가 정말로 내 예상대로 이번 연회에서 패를 드러낼 생각이었다면 곤란해질 것이다.

모든 시선이 내게로 쏠릴 테니까.

마탑주가 바뀌었다는 사실조차 모르는 사람도 많았다.

리온의 존재 자체가 신선했으니 사람들의 이목도 더 끌릴 터.

“그럼, 저는 이만. 폐하께서 기다리실 테니 가 보겠습니다.”

“엘르 나타시아 영애. 후회할 짓 하지 말았으면 해.”

“저 역시 전하께 드리고 싶은 말이네요.”

나는 델테르의 날카로운 시선을 견디며 알현실로 향했다.

어차피 한 번 사는 인생, 해도 후회하고 안 해도 후회할 거라면 하고 후회하는 게 낫지.

그러니 나는 이번에도 내 선택이 옳다고 확신한다.

델테르의 표정만 봐도 그가 얼마나 당황하고 있는지 알 수 있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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