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하급 서기관의 회귀-1화 (1/222)

1 화

제국 팔라티노.

대륙의 반을 차지하는 거대한 제 국.

제국이 세워진 지 수백 년이 지 난 지금,제국에는 수많은 이야기

가 전해 오고 있었다.

나라를 세운 건국 영웅들 이야기 에서,다른 왕국들을 정복하고 제 국을 넓혀 온 이야기.

수많은 던전들을 파헤치고 몬스 터에게서 인간의 영역을 넓혀 온 이야기.

그런 수많은 이야기들 가운데 단 연 유명하고 신비한 이야기가 바 로 그들의 황제에 대한 이야기였다.

제국의 수호자,제국의 아버지, 전신의 황제 등 황제를 부르는 호 칭이 여러 개 있었지만,그중 가

장 유명한 것은.

'전지(全知)의 황제'

……라는 호칭이었다.

초대 황제부터 선황제까지, 제국 의 황제들은 다른 모든 호칭 가운 데 위의 호칭으로 제일 많이 불렸다.

황제들은 다른 사람이 알지 못하 는 수많은 일을 미리 알고.

숨겨져 있던 던전들을 찾아냈으 며.

제야의 인재들을 끌어모았다.

마치 미래를 아는 듯한 황제 모 습에 제국인들은 경외를,다른 국 가에서는 공포를 담아,'전지의 황제' 라고 불렀다.

* * *

하지만 다른 '전지의 황제'들과는 달리,제국의 마지막 황제는 극히 평범한 황제의 삶을 보냈다.

마지막 황제는 과거 황제들처럼 인재를 미리 알아내지도 못했고, 유적의 위치를 알아내지도 못했다.

심지어는 적들을 미리 방비하는 것조차 하지 못했다.

그토록 강성하던 제국도 그의 대 에서 망해 버리고,지금 이렇게 세상이 멸망하는 것도 그 때문이 었을까?

"제길,그런 병신 같은 황제인지 알았으면 차라리 다른 사람,아니, 차라리 내가 해도 나을 뻔했어."

대륙의 서쪽 끝.

구 제국의 변방 성 안쪽에서,반 백의 남자가 죽은 황제를 떠올리 며 이를 갈았다.

황제가 벌인 수많은 악행과 전쟁

때문에 제국이 망한 것은 물론, 그도 아내와 가족을 잃었기 때문 이었다.

만약 황제가 그냥 평범했다면 일 이 이렇게까지 되지는 않았을지도 몰랐다.

하지만 황제는 능력도 없으면서 성격은 잔인하기 그지없었다.

그는 누가 자신의 말에 조금이라 도 토를 달면 그 자리에서 서슴없 이 목을 베었다.

거기다 제국 백성의 재산을 몰수 하고,주위 나라에 수도 없이 싸 움을 걸었다.

오래 전 기억을 떠올리자,남자 의 눈에 불길이 치솟았다.

세상이 멸망하는 지금도 황제에 대한 분노는 아직 식지 않았다.

하지만, 계속된 남자의 분노도 결국 사그라졌다.

그는 어두워지는 창밖으로 다시 시선을 돌렸다.

검은 구름이 이제 성까지 거의 다가와 있었다.

그가 있는 곳은 군데군데 부서져 있는 낡은 성이었다.

오랫동안 버려진 것처럼 보이는 성이었지만,이 안에는 그를 제외

하고도 많은 사람들이 모여 있었다.

배고픔에 칭얼거리는 아이들과 상처로 신음하는 병사들,지쳐 몸 을 가누기 힘들어하는 노인들.

성에 남은 사람들을 떠올리며 그 는 나지막이 한숨을 내쉬었다.

그의 이름은 제이크 발렌티노.

멸망한 구 제국의 서기관으로, 지금은 그가 이 성에 숨은 사람들 을 이끌고 있었다.

비록 기사도,마나 사용자도 아 니었지만,수십 년의 서기관 생활 과 남다른 경험으로 인해 그가 이

들의 리더 노릇을 하고 있었다. 물론,혼란한 시대를 살아남고자 무기 다루는 법 정도는 익히고 있 었지만,제대로 된 기사와는 비길 수 없었다.

콰르르르릉.

멀리서 괴물들의 괴성이 조금씩 들려오기 시작했다.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고 모든 인 간을 죽이는 죽음의 사자들.

괴물들이 이곳,인간들의 피난처 로 몰려오고 있었다.

괴성이 들려오자 성 곳곳에서 비 통한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희망을 잃은 사람들의 울음소리 였다.

가족을 잃고,나라를 잃고,땅을 빼앗긴 채로 이제 목숨까지 잃을 처지에 놓인 사람들.

그런 이들의 마지막 울음이었다.

그 어디에도 다가오는 괴물들과 대항해서 싸우겠다는 사람은 보이 지 않았다.

이곳에 모여 있는 사람들은 이미 저항마저 포기했던 것이다.

혹시나 제국이 버티고 있었으면 가능했을까?

수많은 나라로 조각나서 괴물들

에게 각개격파를 당하지 않고,하 나의 나라로 싸웠으면 저 마물들 을 물리칠 수 있었을까?

잠시 그런 생각을 떠올려 본 제이크였지만,곧 그는 허탈한 웃음 을 짓고 말았다.

"그 황제가?"

따지고 보면 이 사태의 원흉이 제국이자,황제였으니 결국 본말 이 전도된 이야기였다.

"그래도 아쉽군."

평범한 서기관이 아닌 기사나 마 법사였으면.

황제의 전횡을 막고 제국을 유지

시켰으면.

혹은,황제와 싸워 그를 죽일 수 있었으면.

그저 서기관으로 인생을 보낸 그 에게는 말도 안 되는 이야기였지만,죽음 앞에 선 지금은 후회가 끊이질 않았다.

'도대체 내가 전생을 기억하고 있다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었을까?'

사실 서기관 제이크는 전생을 기 억하는 사람,속칭 '전생자'였다.

그의 전생은 21세기의 지구인인 전영찬이라는 이과 출신의 평범한

공돌이.

일반 가정에서 태어나 무난한 인 생을 보내던 그는 30대 초반에 평범한 교통사고로 죽고 말았다.

그 뒤에 그는 이 세상에 제이크 라는 이름을 가지고 다시 태어났다.

낮은 위치였지만,그래도 귀족 집안에 태어난 그는 13살 때 마 차 사고로 전생의 기억을 떠올렸 고,동시에 그 사고로 부모님을 모두 잃어버렸다.

고아가 된 그는 황도로 상경해 무관심한 후견인 집에 얹혀살게

되었다.

다행히 전생의 기억 덕분에 그는 후견인 집에서도 악착같이 버텨 낼 수 있었고,결국 황실 서기관 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

다만,그에게 전생의 기억이 그 리 좋은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편리한 과학 문명 속에 살았던 기억은 이곳의 불편함을 상기시켜 줄 뿐이었다.

더구나 그가 가지고 있는 전생의 기억은 쓸모가 많지 않았다.

전문적인 과학이나 기술 지식을 가지고 있는 것도 아니었고,민주

주의 같은 정치 지식은 말하는 즉 시 반역으로 몰릴 가능성이 높았다.

그래서 그는 평생 그 누구에게도 자신이 전생자라는 것을 말하지 않았다.

고개를 한 번 젓고서 애써 표정 을 가다듬은 제이크는 일기장을 커다란 가방 안에 챙겨 넣었다.

일기장을 넣은 가방에는 다른 일 기장들과 서류들,그리고 나름 제이크가 중요하다고 생각했던 일들 을 적은 일지와 자료들이 담겨 있 었다.

"그러고 보니 그 날은 도대체 어떻게 된 날이었을까?"

일기를 정리하던 그는 문득 어린 시절,수습 서기관 때의 한 날이 떠올랐다.

처음이나 마지막으로 황제와 대 마도사를 코앞에 본 날.

그리고 황궁의 신비한 지하 유적 을 구경한 날.

이해할 수 없는 하루였지만,지 금에서야 이유조차 알 수 없었다.

잠시 추억에 잠겼던 그는 고개를 흔들어 쓸데없는 기억을 털어버렸다.

"자,그럼 후세를 위한 타임캡슐 을 묻으러 가 볼까?"

그렇게 중얼거린 제이크는 성 밖 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그가 들고 있는 가방은 바로 타 임 캡슐이 었다.

마도 시대의 유물이 이 땅에 남 아 있던 것처럼,이 세대의 마지막 유산을 후세에 보내는,한 가 닥 작은 소망을 담아 만든 타임캡 슐.

걸음을 옮기는 제이크의 얼굴은 아직도 의지가 가득했다.

모두가 절망에 빠져 있는 지금도

그는 소망 한 자락을 포기하지 않 고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그로부터 1시간 뒤.

몰려오는 괴물에 의해 성은 무너 져 내렸다.

사람들은 허무하게 괴물들의 밥 이 되어 버렸다.

제이크는 들고 있는 쇠뇌의 살이 끊어질 때까지 버텼지만,평범한 인간의 화살은 괴물들에게 상처마 저 주지 못했다.

반대로 제이크는 괴물의 촉수에 배가 뚫려 버리고 말았다.

'결국 이게 마지막인가……'

허탈한 기분에 잠겼던 제이크는 마지막으로 이를 악물었다.

"하지만 떠나는 길,이렇게 억울 하게 혼자 갈 수는 없지."

제이크는 망가진 쇠뇌를 던져 버 리고 자신의 배에 꽂힌 촉수를 움 켜잡았다.

의외의 반응에 놀란 검은 괴물! 하지만, 괴물이 반응하기 전에 제이크의 왼손이 먼저 움직였다.

어느새 그의 왼손에는 긴 지팡이 하나가 들려 있었다.

이 지팡이는 오래전 죽어 가는

마법사에게서 얻은 망가진 마법 아이템이었다.

다른 모든 기능이 정지하고 오직 가지고 있는 마나를 폭주시키는 능력만 남은 아이템.

그는 지팡이에 마나를 활성화시 켰다.

'다시 한번 기회가 오면 하고 싶 은 일이 많은데……'

제이크의 생각은 거기가 마지막 이었다.

과앙!

제이크의 몸과 그의 앞에 있던 검은 괴물은 폭발과 함께 산산이

흩어져 버렸다.

성 한쪽이 무너져 내렸고,사람 들을 사냥하던 괴물들은 모두 무 너지는 성을 바라보았다.

그 순간이었다.

츄악!

제이크가 죽은 자리에서 환한 섬광이 하늘로 치솟았다.

마치 세상의 끝을 알리는 듯한 빛.

빛이 사방으로 퍼져나갔다.

그리고 성에 있던 괴물들도 형체 를 유지하지 못하고 허물어졌다.

그리고 잠시 뒤.

빛이 사라지고 난 고성은 사람도 괴물도 남지 않았다.

그날,세상은 멸망했다.

죽었던 제이크가 다시 눈을 떴을 때,가장 처음 본 것은 환하게 빛 나는 마법진들이었다.

그리고 처음 듣게 된 소리는 소 년들의 비명이었다.

"으악!"

"크아아아악!"

"아! 안 돼!"

마치 죽을 때의 단말마 같은 소 리가 동굴 벽을 울리며 그의 귀를 아프게 했다.

'분명 죽었는데…… 설마 지옥에 온 건가? 그리 죄를 지으며 살지 는 않았는데?'

조금은 뻔뻔한 생각을 하며 제이크는 몸을 움직여 보았다.

'죽지 않았나?'

몸은 멀쩡했다.

너무 멀쩡했다.

괴물들 세상에서 살아남기 위해 얻은 각종 병과 상처들 때문에 이

렇게 멀쩡할 리가 없었다.

아니,그보다 마지막 순간에 무 너져 내리는 성에 깔려 확실히 죽 었다.

그런데 이렇게 멀쩡한 몸으로 돌아오다니.

제이크는 멀쩡하다 못해 어려 보 이는 자신의 손을 보며 헛웃음을 지을 수밖에 없었다.

설마 또다시 환생한 건가?

하지만 그의 예상은 틀린 듯했다.

"폐하! 괜찮습니다! 정신 차리십 시오!"

"감히 나를 찌르다니! 짐이 세상 의 주인이다! 어디서 감히! 어떻 게 이럴 수가!"

"크억."

"하아,하아."

옆에서 들려오던 비명이 이제는 고통스러운 외침과 그를 달래는 목소리로 바뀌어 있었다.

그 소리에 제이크는 겨우 주변을 둘러볼 수 있었다.

'지하 동굴인가? 천장과 벽에 희미하게 빛나는 문양이라…… 마법 을 끝낸 마법진인 것 같네. 와, 그럼 도대체 마법진이 얼마나 많

은 거야? 어,어라?'

커다란 지하 광장,광장을 가득 메운 마법진,그리고 소년들.

그는 이런 광경을 보았던 기억이 있었다.

아직 10대였을 때.

수습 서기관 시절,특별한 날에 본유적.

"설마,황궁의 지하 유적?"

몸을 일으킨 그가 본 광경은 과 거의 그 모습 그대로였다.

은은하게 빛나는 마법진이 가득 한 지하 광장,그리고 비명을 지 르며 굴러다니는 세 소년과 그중

한 소년에게 달려들어 도움을 주 는 기사들과 마법사들.

"설마,데자뷔인가?"

죽을 때,인생 전체를 한 번에 훑어보게 된다는 데자뷔.

하지만,제이크는 그 어디에도 데쟈뷔가 인생의 특정 시점의 다 른 이야기를 보여 준다는 말을 들 어 본 적이 없었다.

'아니면 설마 전생에 읽었던 회귀?'

별의별 생각이 제이크 머릿속에 떠올랐다.

그때,제이크의 귀에 도움이 될

만한 소리가 들려왔다.

옆에 누워 숨을 헐떡이고 있는 어린 마법사의 중얼거림이었다.

"크윽,설,설마,미래를 보여 주 는 마법이었나?"

그의 말을 듣는 순간,제이크의 머릿속에 과거의 기억이 샘솟기 시작했다.

아니,그동안의 인생이 뒤로 밀 려나고 어린 시절의 기억이 다시 머릿속을 차지했다.

'수습 서기관이 된지 1년이 지난 때였어.'

전 황제가 말에 떨어져서 목숨을

잃은 지 한 달이 지난 날.

그리고 황태자의 대관식을 준비 하기 시작한 날.

평범하게 서기관들을 돕던 그는 근위기사를 따라 난생 처음 황궁 에 들어왔었다.

근위기사가 그를 데려간 곳은 황 궁 지하에 있던 거대한 유적.

유적에는 열 명이 넘는 마법사가 뭔가 작업을 하고 있었다.

그곳에서 그는 황실의 대마도사 와 자신과 같은 또래의 세 소년을 보게 되었다.

수습 마법사 소년과 기사단의 종

자,그리고 곧 대관식을 하게 될 황태자.

그곳에서 제이크는 다른 세 소년 과 함께 유적 중앙 마법진 위에 눕게 되었었다.

'그때,마법진에 환한 빛이 나왔 다가 그냥 꺼지고 말았는데……'

그 뒤,아무 일 없이 제이크는 평범한 일상으로 돌아왔었다.

그리고 지나간 그의 일생.

하지만, 지금 눈앞에 보이는 장 면과 들리는 말,마지막으로 머릿 속에 떠오르는 기억은 전혀 다른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제이크는 눈을 빛냈다. 어쨌거나 그는 과거로 돌아온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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