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화
발작하던 황태자는 근위 기사와 마도사의 호위를 받으며 실려 나 가고,세 소년은 남은 근위 기사 들에게 이끌려 지하 광장을 떠났다.
그들은 왕성의 뒤뜰을 통해 내성 한쪽에 있는 오래된 탑에 따로따 로 머물게,아니,갇히게 되었다.
문이 잠긴 채로 병사들이 문 앞 에서 지키고 있는 걸 보면 갇힌 게 분명했다.
침대와 일인용 책상 하나와 의 자.
아주 작은 독방.
다행히 실내는 감옥처럼 보이지 는 않았다.
한참을 멍하니 침대에 앉아 있던 제이크는 시간이 지나자 혼란스러 운 마음을 정리할 수 있었다.
시간이 흐를수록 수습 서기 때의 기억이 점차 또렷하게 떠올랐던 것이다.
살아가면서 그때의 기억은 머릿 속에서 거의 지워졌는데,지금은 어제 있었던 일처럼 또렷이 기억 이 났다.
'실제로 어제 있었던 일이 맞잖아.'
자신의 몸과 주변의 상황을 보면 평생을 살아온 경험이 현실이 아 닐 수 있다는 생각이 들 수밖에 없었다.
다만 다행인 것은 그동안의 경험
이 사라진 것이 아니라는 점이었다.
"성격은 십 대 때로 돌아간 것 같은데."
평생의 기억과 경험은 남아 있지만,자신의 성격은 수습 서기 때 의 성격으로 돌아왔다.
덕분에 꿈이나 환상일 수 있다는 생각이 더 강하게 들었지만,그동 안의 경험이 너무 길고 또렷했다.
"확인해 보면 되겠지."
제이크는 앉은 채로 자신의 손바 닥을 바라보았다.
파릇파릇한 10대 소년의 손.
그동안 보아 온 주름진 손이 아 닌 것이 신기했지만,지금 확인할 것은 손의 모양이 아니었다.
'세상은 마나가 가득하다!'
제이크는 마음속으로 강하게 주 장했다.
'내 손은 마나를 느낄 수 있다!' 제이크는 자신에게 강하게 암시 를 걸었고,곧이어 손에 간질거리 는 느낌이 들기 시작했다.
반쯤 확실해졌다!
'내 손에 마나가 모여든다. 내 손은 마나를 흡수한다!'
강렬한 자기 암시의 끝에,그의
손에 무언가 시원한 기운이 흡수 되는 느낌이 들기 시작했다.
대기 중의 마나가 흡수되는 느 낌.
하지만,물론 이것도 상상일 수 있었다.
그렇지만,손에서 희미하게 빛나 는 푸른빛은 상상일 리가 없었다.
'꿈이나 환상은 아니야.'
제이크는 만족한 얼굴로 자기 암 시를 풀었다.
바로 손에서 느꼈던 청량한 기운 이 사라졌고,푸른빛을 띠던 손도 원래대로 돌아왔다.
그가 살았던 삶은 환상이나 꿈이 아니었다.
그 삶이 거짓된 것이었으면 제이크가 지금 했던 '마나 감지'가 성 공했을 리가 없었다.
제이크가 펼쳤던 마나 감지는 앞 으로 20년 뒤,새롭게 등장한 유 적 탐험가이자 대마도사 '드베르 만'이 찾아낸 고대 마법 중 하나 였다.
그가 대중에게 공개한 마법으로, 단지 '마나를 감지할 수 있는 사 람인지' 파악하기 위한 마법이었다.
그래도 마법사나 기사가 될 수 있는 사람을 찾기에는 더할 나위 가 없는 마법으로,그 당시 대륙 의 모든 사람이 모두 한 번은 해 보는 '고대 마법'이었다.
제이크도 당연히 해 보았고,마 나를 느낄 수 있는 것에 기뻐했지만,너무 늦은 나이가 문제였다.
"어쨌거나 있었던 일은 분명해." 아니면 미래의 일을 미리 본 것 이거나.
그렇지 않으면 존재하지도 않는 마법이 성공할 리가 없었다.
모든 것을 아는 제국의 황제들.
황태자와 세 소년.
그리고 황성 지하의 고대 유적.
생각을 이어 가던 제이크는 뭔가 실마리를 잡은 것 같았다.
그때 였다.
탑 안으로 들어오는 기사가 있었다.
곧이어 경계를 선 병사들의 경 례.
기사는 소년들이 갇혀 있는 방 앞 복도에서 멈췄다.
"너희 세 사람은 지하 유적의 마 법으로 경험한 내용을 모두 글로 남겨라."
기사는 세 소년이 모두 들리도록 큰 소리로 말했다.
'우리는 일종의 정찰조였나?'
다른 소년들의 이야기를 들어 봐 야겠지만,제이크가 경험한 것과 같은 경험을 했을 가능성이 컸다.
그렇다면 그와 다른 소년들은 미 래의 일을 경험하고,그것을 글로 남기는 일을 위해 이곳에 불려 온 듯했다.
'설마 황태자도 같은?'
제이크는 떠올렸던 생각을 곧 머 리에서 지웠다.
같은 경험을 했다고 하더라도,
황태자는 세 소년처럼 이렇게 갇 혀서 글을 쓸 리가 없었다.
오히려 세 소년은 황태자의 경험 을 보완하는 것일 가능성이 컸다.
"더구나 우리처럼 토사구팽을 당 할 염려도 없을 것이고."
사냥을 끝낸 사냥개는 잡아먹는 다는 토사구팽.
생각을 거듭하던 제이크가 내놓 은 결론이었다.
황가의 지하에 만들어져 있는 유 적이 미래를 보는 물건이고,이 유적을 모든 황제가 사용했다면, 선대 황제들도 같이 사용했던 '소
년'들이 있었을 게 분명했다.
하지만 그 어디에도 그들에 대한 이야기가 남아 있지 않았다. 더구 나 지하 유적도 소문조차도 없었고.
물론 비밀로 하라는 명령을 지키 며 조용히 살았을지도 모르지만, 더 좋은 방법이 있는데 황실이 위 험한 길을 갈 리가 없었다.
"죽기 전에 도망가야 하나? 하지만 쉽지 않은 일인데...
분명 몇 시간 전과 같은 제이크 였지만,생각은 그때와 달라졌다.
젊은 그의 머릿속에는 전생 이외
에도 수십 년의 경험이 녹아 있었다.
다만,같은 경험을 했지만 별로 달라지지 않은 사람도 있었다.
"기사님! 저희는 왜 갇힌 건가요? 식사는 언제죠?"
종자로 보이던 소년이 질문을 던 진 것이다.
정말 생각 없는 질문이 분명했지만,제이크에게도 필요한 질문이 었다.
"대마도사님이 지시하신 일이다! 보안을 위해서니 감수해라. 식사 는 곧 지급될 거다. 오늘은 각자
기억나는 대로 내용을 적어라. 나 머지는 내일 담당자가 오니 그분 에게 문의하도록."
다행히도 기사는 꽤 친절한 편이 었다.
그의 말에 종자는 안심한 듯했지만,제이크는 오히려 경각심이 높 아졌다.
'쓸모 있을 때까지만 살려 두려 나?'
평범한 10대 소년이었으면 떠올리기 힘든 생각이었지만, 미래의 경험과 제이크의 특이함 때문에 자꾸만 안 좋은 쪽으로 생각이 이
어졌다.
그렇다고 빤히 밖에서 지켜보고 있는데 아무것도 하지 않을 수는 없는 일.
그는 책상으로 걸어가 의자에 앉 았다.
책상에는 펜 한 자루와 잉크,고 급 재질의 종이 뭉치가 놓여 있었다.
"와,서기실에서도 거의 보지 못 하는 종이인데……"
마법적인 처리로 겨우 만들어 내 는 고급 용지. 종이는 미래에도 얼마 보지 못한 재질이었다.
제이크는 깃펜을 잡고 잠시 생각 에 잠긴 뒤 종이에 글을 써 내려 가기 시작했다.
사각사각.
기사의 말대로 식사는 제시간에 지급되었다.
나무 식판에 담겨서 들어온 음식 이기는 했지만,고기반찬까지 들 어 있는 굉장한 정식이었다.
"과연 황궁!"
종자는 식판을 보자마자 감탄사 를 터트렸다.
제이크와 소년들이 식사를 마치
고 얼마 뒤,다시 기사가 외쳤다.
"내일 아침 일찍 담당자가 오니 바로 잠자리에 들도록!"
마치 군대에 다시 온 것 같은 느 낌에 제이크는 헛웃음을 지을 수 밖에 없었다.
'아직 시간이 있어. 하나씩 하나 씩 해 나가자.'
급해지려는 마음을 가라앉힌 제이크는 바로 잠자리에 들었다.
엄청난 일들을 겪은 덕분인지 그 는 바로 잠들 수 있었다.
다음 날.
아침 식사가 끝난 뒤, 기사의 말 대로 담당자가 모습을 드러냈다.
어제 지하 광장에서 본 황실 마 법사였다.
제이크를 포함한 세 소년은 기사 의 지시에 탑 입구 쪽의 홀로 모 이게 되었다.
그곳에는 긴 탁자와 여러 개의 의자가 놓여 있었다.
"모두 앉아."
마법사는 탁자의 상석에 앉아 소년들에게 명령했다.
소년들은 탁자에 앉았고,방문을 지키던 병사들과 기사는 홀 외각 에 둘러섰다.
"보안을 위한 것이니,이해들 하 게나."
마법사가 온화한 표정으로 소년 들에게 양해를 구했다.
그의 말에 세 소년은 고개를 끄 덕였지만,아무 생각 없어 보이는 종자와 달리 제이크와 수습 마법 사인 소년은 서로 눈을 마주쳤다.
'위험하다는 걸 알아차렸어?'
'너도?'
서로 잠시 스쳐 가는 눈길만으로
도 둘은 상대가 비슷한 생각을 하 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하지만 보는 눈길이 많은 이곳에 서 표를 낼 수는 없었다.
둘은 바로 고개를 숙였고,마법 사는 만족한 얼굴로 병사들에게 지시를 내렸다.
병사들은 소년들이 글을 적은 종 이와 필기도구 일체를 방에서 가 져왔다.
글이 적힌 종이는 마법사에게 전 달되었고,빈 종이와 깃펜은 다시 소년들 앞에 놓였다.
잠시 소년들의 글을 확인하던 마
법사는 마지막 장을 보다가 인상 을 찡그렸다.
"종자 윌리엄! 도대체 이 글은 뭐지?"
"네! 말씀하신 대로 꿈에 나온 내용을 적은 것입니다."
'이름이 월리엄이었나?'
제이크는 이제야 종자의 이름을 알게 되었다.
잠시 제이크가 그의 이름을 되뇌는 동안에 마법사의 호통이 이어 졌다.
"열심히 해서 기사가 되었다. 여 러 군데 토벌을 나가 공훈을 세웠
고,훈장도 받았다. 약혼자도 생겼 고,부기사단장 추천까지 받게 되 었지만,대규모 회전에서 죽게 되 었다. 이게 전부인가!"
종이를 흔들며 호통을 치는 마법 사였지만,윌리엄은 자신이 무엇 을 잘못했는지 알지 못했다.
"하아,이래서 근육 바보들은 안 되는 거야."
그의 말에 뒤에 서 있던 기사가 움찔했다.
"다른 두 사람은 나쁘지 않아. 그래도 역시 혼자 쓰게 하는 것은 무리야."
혼자서 결론을 내린 마법사는 세 사람을 보며 말을 이었다.
"여태 설명이 없으니 궁금한 점 이 많을 거다. 우선 어제 너희들 이 경험한 마법은 고대 마법으로, 가상의 미래를 꿈꾸는 것이다. 실 제 현실과는 전혀 상관없지만,제 국의 앞날을 대비하기 위해 사용 한 마법이다."
제이크는 마법사의 말에 비웃음 이 절로 일어났다.
현실과 상관없다니. 시작부터 거 짓말이었다.
"너희 세 사람이 할 일은 꿈속에
서 본 내용을 최대한 자세히 보고 서를 만드는 일이다. 각자 분야가 다르니 경험한 것도 다를 것이다. 그 내용을 각자 적고,애매하거나 서로 다른 내용은 이야기를 나눠 정리하면 된다."
벌써 마법사의 말이 앞뒤가 안 맞았다.
개인적인 꿈이라면서 꿈 내용을 협의하라니.
하지만 제이크나 수습 마법사 소 년도 의문을 드러내지 않았다.
종자 윌리엄은 아무 생각이 없는 것 같고…….
"어쨌든 황태자님이 함께하신 일 이니 보안 때문에 따로 질문은 받 지 않겠다. 너희도 감시당하는 것 같이 느껴져서 답답하겠지만,제 국을 위해 감수하기 바란다."
"넴!"
"네."
"네."
윌리엄의 힘찬 대답과 제이크와 수습 마법사의 평범한 대답이 홀을 울렸다.
제이크는 머릿속에 떠오르는 의 문들을 묻어 두고,다른 소년들과 함께 글을 쓰기 시작했다.
하지만 곧 제이크는 다른 소년들 을 도와줄 수밖에 없었다.
수습 마법사쪽은 그나마 괜찮았 지만,윌리엄 쪽은 처음부터 끝까 지 도와야 했다.
'기사의 머리는 돌로 이루어진 것인가!'
마법사도 제이크가 도와주는 것 을 바라는 상황이었고,얼마 지나 지 않아 제이크가 일을 진행하는 리더 비슷하게 되어 버렸다.
그렇게 한참을 글을 정리하는 중에 제이크의 머릿속으로 작은 음 성이 들려왔다.
-들려? 나 쥬더스야. 들리면 손 가락을 까닥거려.
수습 마법사가 보낸 메시지 마법 이었다.
거리가 가깝다고는 하지만 메시 지 마법은 2서클이었다.
수습 마법사가 2서클 마법이라니. 천재도 보통 천재가 아니었다.
'하긴 미래를 경험했으면 높은 서클에 대한 경험도 있겠지.'
다만,제이크는 쥬더스라는 이름 을 미래의 경험 속에서 들어 보지 못했다.
미래를 경험했다고는 하지만 이
정도 천재라면 이름을 휘날렸을 텐데…….
'이름은 들어 본 적이 없어도 저 얼굴은 본 적이 있어.'
제국이 혼란하던 시절,그는 한 몽타주에서 나이 든 수습 마법사 의 모습을 보았었다.
몽타주에 대한 설명은 적국의 강 력한 테러리스트 마법사.
자신을 쥬더스라고 지칭한 수습 마법사는 스파이가 분명했다!
하지만 제이크는 신고 대신에, 손가락을 까닥거려 쥬더스의 메시 지 마법에 대답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