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 화
그동안 쌓인 피곤과 혹사,그리 고 긴장이 한꺼번에 몰아친 덕분 에 제이크는 종일 몸살에 시달릴 수밖에 없었다.
물론 목욕통에서 잠이 들어 버린
게 가장 큰 이유였지만,다행히 하루 동안 푹 쉬자 멀쩡한 몸으로 돌아왔다.
'역시,젊기는 젊다는 건가.'
아침 햇살을 받으며 몸을 일으킨 제이크는 멀쩡해진 자신을 확인하 고는 조금 감동했다.
죽기 얼마 전에는 하루만 고생해 도 뼈마디가 쑤셨는데 그 고생을 하고도 하루 만에 멀쩡해지다니, 젊은 육체는 가히 축복할 만한 것 이었다.
하지만 감동에 겨워 들어 올린 팔을 보니 기분이 바로 가라앉았
다.
하얗고 가는 팔.
출퇴근이 하루 운동의 전부였던 현재의 모습 때문이었다.
편한 삶은 이제 떠나보내게 되었 으니 앞으로 뼈가 빠지게 단련을 해야 했다. 걱정이 안 될 수가 없었다.
그의 방에는 감기 몸살의 주원인 인 목욕통은 어느샌가 치워져 있 었고,세숫물이 담겨 있는 물동이 와 깨끗한 상하의 한 벌이 곱게 접혀 문지방에 놓여 있었다.
확실히 전생이나 지금이나 돈만
있으면 필요한 서비스를 언제든지 받을 수 있었다.
그는 아파서 골골댄 하루 동안 모든 식사를 방에서 해결했고,누 더기가 된 옷 대신에 새로운 옷을 준비시켰다.
물론 덕분에 2실링이 더 날아가 버렸지만,제이크는 충분히 만족 했다.
제이크는 물동이에서 물을 퍼 세 수를 한 뒤,물에 얼굴을 비춰보 았다.
나름 잘생겼지만 지쳐 보이는 금 발 머리 소년이 물에 비쳐 보였
다.
그의 얼굴 곳곳에는 작은 찰과상 들이 있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며칠 전과 얼굴이 크게 달라져 있을 리가 없었다.
제이크는 머리카락을 헝클어 얼 굴을 가리고 나서 옷을 입고 1층 식당으로 내려갔다.
주점인 여인숙 1층은 오늘도 이 리저리 술에 찌들어 누워 있는 사 람들과 쓰린 속을 붙잡고 해장을 하는 사람들로 북적거렸다.
용병 길드 옆에 붙어 있는 여인
숙이었으니,일을 마치고 쉬는 용 병들과 새로 일을 구하는 용병들 이 이곳으로 몰려들 수밖에 없었다.
그렇기에 제이크도 이 여인숙에 자리를 잡은 것이었다.
이곳이라면 빈민가의 시선도 피 하고,뜨내기 용병들 사이에 묻혀 지내기도 좋았다.
어린 나이가 조금 문제가 되긴 했지만,대충 나이 든 척을 해서 넘어갈 생각이었다.
다행히 오늘은 주점이 다른 때보 다는 한가해,그도 자리를 잡고
식사를 할 수 있었다.
아침은 걸쭉한 스프와 딱딱한 빵.
그리 맛은 나쁘지 않았지만,이 곳에서 오래 지내던 용병들은 음 식에 질려 버렸는지 빵과 스프를 보며 인상을 찡그렸다.
어찌 보면 무척이나 일상적인 분 위기로 보이기도 했다.
식사를 마친 제이크는 그릇을 치 우려는 종업원에게 구리 동전 두 개를 건네주었다.
"팁 치고는 너무 많은데요?"
제이크가 준 돈은 20 그론. 1실
링의 오분의 일이었다.
종업원이 받는 일당이 30그론이 었으니,그가 놀라는 게 당연했다.
"몇 가지 물어보고 싶은 게 있어 서."
"뭐든지 물어보세요!"
재신을 만났으니 충분히 보답해 야 할 때였다.
다행히 급한 일도 없어,종업원 은 먼저 돈을 주머니에 집어넣고 는 제이크 앞에 앉았다.
이 여인숙 주점의 종업원은 제이크 또래의 소년이었다.
제이크가 머리를 헝클어 얼굴을
감췄기에 망정이지,얼굴을 비교 했으면 종업원이 더 나이 들어 보 였을 게 분명했다.
"아직 황도의 사정을 듣지 못해 서 말이야. 근래 꽤 소란스러웠던 모양인데,뭐 아는 것 없어?"
제이크는 나름 굵직하게 목소리 를 깔아 조금이라도 더 나이 들어 보이려고 노력했다.
"아,잘 물어보셨어요. 제가 그쪽 으로는 들은 게 많아요."
소년은 제이크의 말에 반색하고 는 목소리를 낮춘 채로 말을 늘어 놓기 시작했다.
"며칠 전에 황궁이 있는 내성에 두 번이나 큰 폭발이 있었어요. 두 번째 폭발은 내성 성벽 위쪽에 서 터져 많은 사람이 그 모습을 봤지요. 그날 밤은 정말 저도 깜 짝 놀랐다니까요."
'폭발이 두 번?'
지하에 파묻혀 기절한 탓에 제이크는 두 번째 폭발에 대한 이야기 는 처음 들었다.
"정말이지 살벌한 밤이었어요. 병사들하고 기사들이 사방에 뛰어 다녀서 반란이 일어난 줄 알았다 니까요."
다행히 소란은 새벽이 되기 전에 끝났고, 다음 날 황성과 황도 대 부분은 일상으로 돌아갔다.
"다른 곳은 괜찮았는데 귀족 거 리하고 마탑 쪽은 꽤 소란했던 모 양이에요. 나중에 알고 보니 첩자 가 황성에 침입해서 그 소란이 일 어난 거래요. 귀족 거리하고 마탑 은 다른 첩자들을 잡느라고 소란 스러웠다던 걸요."
제이크의 눈이 머리카락 사이로 날카롭게 빛났다.
그가 알기로는 그날 소란을 피운 첩자는 한 사람밖에 없었다.
"그 첩자는 도망쳤나?"
"그럴 리가요. 대마도사님이 직 접 나서서 죽이셨대요. 마지막 폭 발도 마도사님이 직접 마법을 쓰 신 거라는데요?"
'결국,잡혔나.'
제이크는 조금 씁쓸해졌다.
이야기를 들으니,직접 나선 대 마도사에게서 도망치지 못하고 자 결한 듯했다.
제이크를 배신하고 혼자 도망친 쥬더스였다.
나중에 되갚아 줄 생각이 가득했 는데 이렇게 죽었다는 이야기를
들으니,제이크로서는 오히려 아 쉬운 생각이 들었다.
"다행히 어제부터는 조용해요. 검문도 보통 때로 돌아갔고 지금 은 대관식 준비로 다들 바빠요. 손님도 대관식 때문에 오신 거 죠?"
제이크는 대충 고개를 끄덕인 뒤 에 종업원을 보내 주었다.
종업원은 주방으로 돌아가려다가 주인에게 걸려 한참을 혼났지만, 주머니에 든 돈 때문인지 혼나는 중에도 싱글거렸다.
'결국,내가 도망친 것은 안 걸
린 건가?'
그의 탈출이 들켰다면 벌써 검문 이 멈췄을 리가 없었다.
탑이 무너져 확인할 수 없는 것 인지,아니면 폭발로 시체를 확인 할 수 없어 죽은 것으로 생각했는 지 모르겠지만,어쨌든 다행스러 운 일이 아닐 수 없었다.
하지만 이 황도에서는 계속 있을 수 없었다.
언제 아는 사람을 만날지 알 수 가 없었고,황실에서 그가 죽지 않았다는 것을 알아차릴 수도 있 었다.
'우선 어제 세운 계획대로 음직 이자.'
제이크가 감기 몸살로 쉬는 동안 에 그냥 방에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몸살로 누워 있는 동안에도 앞날 을 걱정하여 계획을 세웠었다.
인류 멸망이니,황제에 한 방 먹 이는 것이니,제국의 멸망이니 하 는 거대한 내용도 있었지만,그는 제일 먼저 개인적인 힘을 키우기 로 했다.
'그러기 위해서는 안내자가 있어 하고.... 아니,아니.'
제이크는 계속 이어지는 생각을 끊어 버렸다.
서기관으로 일할 때처럼 머릿속 에서 생각을 굴릴 때가 아니었다. 지금은 행동할 때였다.
그는 하루 치 숙박료 1실링을 주인에게 건네주고 밖으로 나왔다.
여인숙 밖은 용병들과 출근하는 길드 직원, 용병들을 요청하기 위 해 길드로 향하는 사람들로 인해 무척이나 번잡했다.
이 사람들은 모두 얼마 떨어지지 않은 황도 용병 길드로 가는 사람
들이었다.
제이크도 길드에 볼일이 있었지만,우선 그는 빈민가로 먼저 향 했다.
그는 빈민가로 들어서기 전에 숨 겨 놓았던 곳에서 금화를 모두 꺼 냈다.
그러고는 이틀 전에 갔었던 상점 으로 가서 나머지 금화를 모두 돈 으로 바꾸었다.
상점명과 이름이 같은 주인 루벨 은 첫 만남에서 제이크를 고객으 로 받아들였는지,정상가로 금화 를 모두 바꿔주었다.
그리고 가게를 빠져나가는 제이크에게 다시 소리쳤다.
"의뢰인에게 가서 잘 말씀드려. 그러라고 제대로 금액을 쳐준 거 니까."
아쉽게도 그는 제이크를 고객으 로 받아들인 것이 아니라,있지도 않은 '제이크를 심부름꾼으로 쓴 의뢰인'을 고객으로 받아들인 것 이었다.
결국,나이가 문제였다.
수중에 돈을 쥔 제이크는 바쁘게 움직였다.
우선 빈민가를 빠져나가 혹시 모 를 미행을 따돌린 뒤에 돈을 자신 만 아는 장소에 숨겼다.
그리고 그는 다른 암상인에게 제 국 통행증을 구했다.
몰락 귀족이었던 기존의 신분이 사라졌으니,제국 내를 이동하려 면 다른 신분증이 필요했다.
용병이라면 용병패 같은 것으로 신분을 증명할 수 있겠지만,용병 패를 얻으려면 신분을 증명할 방 법이 있어야 했으니 결국 일종의 신분증인 통행증이 필요했다.
제국에서 만든 통행증은 위조가
어렵다는 장점이 있었지만,어차 피 제국 인장이 찍혀 있는 종잇조 각일 뿐이었다.
위조가 힘들다뿐이지,실제 소유 자가 누구인지는 알 방법이 없었다.
제이크가 암상인에게 얻은 통행 증도 강탈을 당한 물건인지 객지 에서 죽은 사람의 물건인지 알 수 없었지만,꽤 많은 돈을 들여 산 것이었으니 문제가 없기를 바랄 뿐이었다.
그 뒤에는 한적한 이발소에 들려 금발 머리와 눈썹을 갈색으로 염
색했다.
이발사는 눈썹까지 염색해 달라 는 말에 난감한 표정을 지었지만, 결국 멋진 갈색 눈썹을 만들어 냈다.
그 뒤에 머리를 단정하게 쳐 버 리니,거울로 보이는 제이크의 모 습은 전과 완전히 달라져 있었다.
'이 정도면 하늘에 계신 부모님 이외에는 알아볼 수 있는 사람은 없겠어.'
제이크는 만족한 표정으로 이발 사에게 돈을 지급하고 용병 길드 로 향했다.
자신의 준비가 끝났으니 이제 사 람을 구해야 했다.
제이크는 용병 길드로 가는 길에 숨겨 놓은 돈을 모두 꺼내 품 안 에 숨겼다.
돈과 같이 숨겨 놓았던 기사의 검은 아쉽지만,그곳에 둘 수밖에 없었다.
괜히 들고 다니거나 팔았다가는 근위대에 쫓길 게 뻔했다.
제이크가 용병 길드가 있는 거리 에 도착했을 때,거리는 질주하는 말들로 혼란스러웠다.
건장한 군마와 말을 타고 달리는
근위 기사들.
기사들은 두 명씩 짝을 지어 도 로를 질주하고 있었다.
"그러고 보니,전 황제의 대관식 전에도 같은 일이 있었지."
길옆으로 피한 제이크 옆에서 노 인 한 명이 과거를 회상하며 중얼 거렸다.
그 말을 들은 제이크의 입에서 저도 모르게 답이 튀어나왔다.
"대관식 초청."
"오,맞아. 그런 이름이었지. 어 린 나이인데 잘 아는구먼."
제이크의 말에 노인은 그를 보며
기특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제이크는 잘 알 수밖에 없었다. 사건과 역사를 기록하는 서기였 으니,황제의 대관식마다 벌이는 행사를 모를 리가 없었다.
그리고 지금은 그 행사의 본래 의미를 너무나 잘 알게 되었다.
대관식 초청.
황제의 대관식 전에 매번 벌어지 는 행사로,새로이 즉위하는 황제 를 축하하기 위해 제국 각지와 멀 리 타국까지 기사와 사절을 보내 축하 인사를 초청하는 행사였다.
그 초청 인원은 각지에 능력이
뛰어나다는 젊은이들과 기사,마 법사들,그리고 평범해 보이는 일 반인들까지.
역사가들로서도 도무지 알 수 없 는 기준으로 벌어지는 국가 단위 의 초청 행사였다.
더구나 이 초청은 대관식을 보는 것뿐만 아니라 대관식이 끝난 뒤 초청받은 사람들을 후원하고,미 래의 직위를 제국에서 보장하는 파격적인 행사였다.
그리고 이 행사로 제국의 황제들 이 전지의 황제로 더욱 유명해졌다.
초청받은 사람 중에 많은 사람이 시간이 지난 뒤,뛰어난 재능을 뽐내며 제국을 더욱 성장시켰기 때문이었다.
그 가운데에는 제국의 크기를 몇 배나 키운 전략가나 뛰어난 재상, 강력한 기사들이 포진해 있었고, 지금 제국의 대마도사도 전대 황 제 대관식에 초청받았던 마법사였다.
과거에는 제이크도 대체 초청을 받은 사람들이 선택되는 이유가 무엇인지 알 수 없었지만,지금은 어떤 기준으로 사람을 뽑는지 너
무나 잘 알고 있었다.
'미래에 성공한 사람들.'
미래 지식을 가진 제국의 황제만 이 할 수 있는 과격한 인재 모으 기였다.
물론 미리 선점하는 방법으로는 미래가 바뀌므로 실패할 확률이 높아지지만,어차피 규모가 커지 면 약간의 실패는 문제가 될 수 없었다.
"오,이번에는 용병 쪽에도 초청 자가 있는 모양인걸?"
노인의 말대로,말 두 마리가 용 병 길드 앞에 걸음을 멈췄다.
기사들은 바로 말에서 내린 뒤 길드 안으로 들어갔다.
제이크도 기사들이 들어가는 것 을 보고 미소를 지었다.
기사들이 들어갔다면 그가 예상 했던 사람들이 이곳 용병 길드에 있다는 이야기였다.
다행히 너무 늦지는 않았다.
제이크가 용병 길드를 향해 빠르 게 걸음을 옮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