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하급 서기관의 회귀-10화 (10/222)

10화

처음은 어리둥절한 표정이었지만,제시카는 금방 정신을 차렸다.

그녀도 몇 년을 용병으로 굴러먹 었다.

주머니에 들어 있는 돈들이 그론

인지 실링인지 소리만 듣고도 알 수 있었다.

주변에 있던 술꾼들도 알아차렸 지만,날카롭게 훑어보는 제시카 의 눈에 뻘쯤하게 모두 고개를 돌 렸다.

제이크는 제시카가 주변을 둘러 보는 동안 돈주머니를 다시 챙겨 넣었다.

"쯧,가출한 귀족 자제는 아닌가 보네."

돈을 다시 챙기는 모습에 제시카 가 아쉬운 얼굴을 했다.

슬쩍 돈을 챙겼으면 이리저리 계

약을 유리하게 끌고 갈 수 있었는 데,눈앞의 잘생긴 소년은 그런 풋내기가 아니었다.

제시카의 얼굴이 사근사근하게 변했다.

"멋진 청년분이 손님으로 오셨네요. 이름이 어떻게 되시죠?"

몇 없는 여자 용병이라서가 아니 라,제시카는 그 자신만으로도 용 병들의 눈길을 끌 만했다.

인상을 쓰던 그녀가 화사한 미소 를 짓자 꽤 볼 만한 미녀가 되었다.

"제이……. 제이입니다."

제이크의 입에서 하마터면 본명 이 나올 뻔했다.

흔한 이름이었지만,안전한 게 최고였다.

그리고 '제이'라는 이름도 꽤 흔 한 편이니,그리 문제가 되지는 않았다.

"흠,대수림 쪽으로 향하는 두 달간 호위 임무라고 하셨는데 자 세히 설명해 주시겠어요? 제 쪽도 일정이 있으니 고민을 해 봐야 하 거든요."

절대!

일정도 없고,고민도 필요 없지

만,우선 질러 놓아야 조정이 수 월해지는 법.

거래의 기본을 몸소 실천하는 제시카였다.

하지만 제이크는 거기에 어울려 줄 생각이 없었다.

"용병 등급 4급. 도적 제시카 맞 죠? 조금 전에 그쪽 단장이 '초청 장'을 받고 파티가 깨진 것을 봤 습니다. 서로 쉽게 쉽게 가죠."

상대의 상처를 후벼 파는 일이었 지만,제시카의 말에 어울려 주기 에는 시간도,돈도 부족했다.

제이크의 말에 제시카의 얼굴이

어두워졌다.

조금 전 일이 다시 떠오른 점도 있지만,그것보다 자신이 처한 현 실이 새삼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확실히,그녀가 혼자라는 것을 알지 못했다면 그녀에게 따로 호 위를 요청할 리가 없었다.

"원하는 것은 일차적으로 대수림 경계 도시. 루테리아까지의 호위, 그리고 개인적인 던전 탐사의 지 원 요청입니다."

작게 속삭인 제이크의 말이었지만,놀란 제시카는 목소리를 높이 고 말았다.

"에? 설마 정말 가출한 귀족 소 년?"

던전 탐사.

모두가 알다시피 던전 탐사는 오 래된 유적을 탐험해서 보물을 찾 는 일이었다.

자세히 들어가면,고대 마도 제 국의 유적을 탐사해서 보물과 마 법 보구를 찾는 일에서부터 폐허 가 된 유적에 모인 마나 때문에 발생한 몬스터들을 잡는 일 등이 있었지만,결국 던전을 찾는 그 자체는 다르지 않았다.

그 모든 것은 대륙 전체를 지배

하던 고대 마도 제국의 영역을 지 금 인류가 모두 회복하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제국 같은 경우는 황도 지하에 엄청난 마법 유적을 가지고 있었 지만,아직 제국이 미치는 범위는 대륙의 반도 안 되었다.

남부의 다른 국가들은 열외로 하 더라도,아직 제대로 탐사를 못 하는 동쪽의 대수림과 그 너머에 존재한다는 아인종의 땅까지.

대륙 곳곳에 흩어져 있는 고대 마도 제국의 유적은 아직 인간의 손을 기다리고 있었다.

제국에서 던전 탐사를 한다는 것 은 몬스터가 가득한 대수림에 있 는 미지의 던전을 찾는 것을 말했다.

제시카가 하는 일도 바로 그런 던전을 찾고 그 안을 탐험하는 일

하지만 던전을 찾는 또 다른 방 법이 있었다.

바로 제국을 확장하는 동안 발견 된 유적에서 새로운 유적들의 위 치를 알아내는 방법이었다.

돌에 새겨진 문자와 마법으로 남 겨진 좌표.

파괴되었거나 쓸데없는 위치도 많았지만,또 다른 유적을 찾는 경우도 종종 있었다.

하지만 그것도 인간의 손이 닿는 지역에서나 가능한 일이었다.

아직 발길이 닿지 못하는 장소는 어쩔 수 없이 포기할 수밖에 없었 고,그렇게 포기한 장소는 기록으 로 남아 귀족들의 일기나 도서관 에 비치된 역사서에 남게 되었다.

그리고 오랜 시간이 지난 뒤,제 국의 영토가 더욱 넓어지면서 과 거의 기록이 다시 빛을 발했다.

"귀족은 아닙니다만,던전이 있

는 위치는 알고 있습니다."

제이크는 손가락으로 머리를 톡 톡 두드렸다.

실제로는 귀족이었지만,그 성은 지금 쓸 수 없었다.

그리고 제시카의 생각과는 달랐 지만,확실히 그는 아직 발견되지 않은 던전'들'을 알고 있었다.

그렇다고 앞으로 던전을 탐사하 며 인생을 보낼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단지 '힘'을 얻기 위해 지금은 던전에 갈 필요가 있을 뿐이었다.

그녀도 제이크가 귀족이든 아니

든 상관이 없었다.

그가 '던전'을 알고 있다는 말에 제시카의 눈은 그를 잡아먹을 것 처럼 보였다.

"자리를 옮겨요."

제시카는 당장 그의 멱살을 붙잡 고 움직일 기색이었다.

하지만 말을 꺼낸 그녀는 어디로 가냐는 제이크의 말에 난감한 표 정을 지었다.

조금 전 일 때문에 길드 본부는 가기가 어려웠고,파티가 깨진 마 당에 파티원이 머무는 여관으로 갈 수도 없었다.

결국,두 사람은 제이크가 머무 는 2층 방으로 자리를 옮겼다.

평상시 같았으면 남자가 혼자 머 무는 방에 따라 들어갈 리가 없었 지만,지금 그녀는 눈에 보이는 게 없었다.

그리고 두 사람은 방 안에서 계 약 내용을 조율했다.

여러 가지 조항이 있었지만,대 부분 제이크가 원하는 대로 계약 이 이루어졌다.

대수림 경계 도시인 루테리아까 지의 호위와 던전 탐사 시 인력 구인과 각종 지원. 그리고 탐사

후의 분배는 루테리아에 도착해서 이야기하기로 했다.

"그럼 보수는 일차로 루테리아까 지 두 달분으로 해서 50실링으로 하죠."

제이크의 말에 제시카는 울상이 되었다. 던전이라는 말 때문에 그 만 제이크에게 휘둘려 버린 것이다.

다른 조건들도 묘하게 제이크에 게 유리하게 되어 있었고,보수는 반 이상 깎였다.

물론 일 없이 대수림까지 갈 생

각도 했던 그녀였지만,아까운 건 어쩔 수 없었다.

"너 도대체 나이가 몇이야!" 계약하기로 결정하니,제시카의 말투가 원래대로 돌아가 버렸다.

손해를 봤다는 생각에 일부로 그 러는 느낌도 들었지만,만족한 계 약을 한 뒤라서 그런지 제이크는 그런 모습이 귀엽게 보일 뿐이었다.

"던전이 잘못된 거기만 해 봐. 그럼 이자에 이자를 물어서 몇 배 를 토해 내게 할 거야."

물론 계약에 그런 내용이 있지는

않았다.

하지만 실제로 던전이 잘못된다 면 가만히 있지 않을 듯했다.

정신을 차린 것인지,한참 그렇 게 푸념을 늘어놓던 그녀는 의아 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그런데 왜,날 고른 거야? 루테리아에 가서 던전 탐사를 할 사람 을 찾으면 되는 것 아냐?"

이제야 겨우 나온 질문에 제이크 는 고개를 젓고 말았다.

그녀를 선택한 이유는 많았다.

파티가 깨져서 싼값에 계약할 수 있다는 점,두 달 동안 같이 다니

면서 성격을 확인해 볼 수 있고, 서로 친해질 수 있다는 이유.

루테리아에 가는 동안 던전에 대 해 배울 수 있다는 점 등등.

하지만 다른 모든 것들보다,제이크는 그녀의 재능이 탐이 났다.

그녀의 파티장인 콘라드가 '대관 식 초청장'을 받은 것은 3급 용병 까지 올라간 실력도,젊은 나이에 마나를 느낀 재능도 아니었다.

'대관식 초청장'이 보내지는 기준 은 지금의 재능이나 실력이 아닌 미래의 성공이었다.

콘라드에게 초청장이 보내진 이

유도 그가 10년 뒤,제국에서 다 섯 손가락에 안에 드는 대검호가 되었기 때문이었다.

제이크가 본 미래에 콘라드는 제 국에서 가장 강한 용병대의 단장 으로,각종 전투와 전쟁에서 대검 호의 실력을 자랑했었다.

제이크가 본 미래를 황제도 당연 히 보았을 테니,콘라드에게 초청 장이 보내진 것은 당연했다.

하지만 제이크만 알고 황제는 모 르는 내용이 있었다. 그것은 콘라 드가 대검호가 된 방법이었다.

황제야 대검호가 된 콘라드가 눈

에 띄었을 뿐,어떻게 대검호가 되었는지 신경도 안 썼지만, 당시 서기관인 제이크는 콘라드에 대한 보고서를 꼼꼼하게 읽어 봤었다.

콘라드가 대검호가 된 것은 던전 에서 발견한 고대 마도 제국의 유 물 덕분이었다.

지금은 만들 수도 없고 찾아보기 도 힘든,마법이 집대성된 보물.

바로 에고 소드였다.

살아 있는 인격이 부여된 검.

검 주인의 능력을 올려 주고 조 언을 해 주는 검으로,검사들에게 는 보물도 그런 보물이 없었다.

콘라드가 발견한 검도 오랜 세월 동안 많은 검호들이 지나갔던 검 으로,수많은 검술 지식과 경험, 그리고 커다란 마나를 그 몸 안에 지니고 있었다.

콘라드는 에고 소드를 스승으로 삼아 검술을 수련해,대검호로 우 뚝 올라섰던 것이다.

그리고,콘라드가 대검호가 되었 을 때,그의 파티원 중 딱 한 사 람이 그의 곁에 없었다.

바로 지금 제이크의 눈앞에 앉아 있는 제시카였다.

에고 소드가 있던 던전은 그 난

이도가 상상을 초월하는 곳이었다.

수많은 모험가가 도전했다가 목 숨을 잃었고,그러한 이유로 발견 된 이후 한참 동안 공략이 되지 못한 곳이었다.

그런 던전을 콘라드의 파티가 최 초로 격파한 것이었지만,그곳에 서 콘라드는 소꿉친구인 제시카를 잃고 말았다.

그녀는 파티원 모두를 탈출시키 고는 홀로 무너지는 던전에 남았 던 것이다.

덕분에 콘라드는 꿈이었던 기사

도 내팽개치고 용병을 전전했지만,어쨌거나 대검호 콘라드는 홀 로 만들어진 것이 아니었다.

'콘라드에게 보낸 초청장은 부도 수표가 된 거로 봐야겠지?'

콘라드에 대한 보고서를 제이크 가 직접 봉인했으니,황제가 알 방법이 없었다.

에고 소드가 없는 콘라드는 그냥 실력 좋은 검사일 뿐이었다.

오히려, 제시카 쪽이 실력으로는 그보다 훨씬 뛰어났다.

제이크가 미래에 많은 모험가를 알지는 못했지만,제시카가 탐사

해 낸 에고 소드 던전보다 더 위 험한 던전을 돌파한 모험가는 보 지 못했었다.

제이크로서는 훌륭한 행운이자, 추수가 끝난 뒤 황금 이삭을 주운 꼴이었다.

그것도 싸게 후려쳐서!

두 사람은 이야기를 마친 뒤 길 드 본부로 가서 정식으로 계약했다.

물론 수수료가 붙었지만,중간에

용병이 강도로 변하거나 도망을 쳐 버리는 일을 막기 위해서는 필 요한 일이었다.

길드 이름으로 계약한 경우에도 종종 사고가 일어났지만,용병이 강도와 그리 다르지 않게 생각되 는 남부 왕국들과는 용병에 대한 인식이 차원이 달랐다.

두 사람은 다음 날 아침,황도를 떠나기로 했다.

제이크로서는 빨리 떠나면 떠날 수록 좋았지만,여행을 하기 위해 서는 준비할 것이 많았다.

제이크도 제국의 멸망 이후 여러

곳을 떠돌아다녀 본 경험이 있었 지만,그래도 용병이 준비하는 것 이 훨씬 수월했다.

육포와 각종 건조 식료품들과 제이크에게 필요한 여행용품,그리 고,이동을 위한 늙은 말이 끄는 짐마차까지.

덕분에 많은 돈이 깨지긴 했지만,열심히 깎은 제시카 덕분에 돈이 모자라지는 않았다.

'늙은 말도 엄청 비싸네. 처음 생각대로 중간에 '그곳'을 들러야 겠어.'

고대 금화로 만든 돈도 한계가

있었다.

싸게 계약하긴 했지만,돈이 모 자라지 않는다고 해서 남는 것도 아니었다.

두 사람이 준비를 마친 뒤, 제시카는 전 파티원들과 마지막 술자 리를 나누었고,제이크는 다시금 일정을 정리한 뒤 잠자리에 들었다.

다음 날.

술이 덜 깨서 붉게 충혈된 눈을 한 제시카와 시선을 피해 고개를 숙인 제이크,두 사람은 짐마차를

타고 황도의 서문으로 향했다.

다행히 제이크의 통행증은 문제 가 없었다.

하지만 두 사람은 바로 황도를 빠져나갈 수 없었다.

그들 앞에 기사와 병사들이 호위 하는 마차 여러 대가 앞을 막았기 때문이었다.

무슨 일인가 제시카가 병사들에 게 물었고,설명을 들은 제이크는 씁쓸한 표정으로 앞을 막고 있는 화려한 마차를 바라보았다.

마차에 탄 사람은 제국의 서쪽 관문을 담당하는 거대한 영지의

공작가.

제이크가 가려는 도시의 이름인 루테리아 공작가의 첫째 딸이 탄 마차였다.

레이첼 루테리아.

미래를 본 황제가 파혼을 해 버 린 비운의 황태자비.

그녀가 탄 마차였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