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화
결혼식을 하기 전에 파혼을 당했 으니 전 황태자비라고 부르는 것 이 맞지는 않았지만,공녀는 이미 비운의 황태자비로 불리고 있었다.
"루테리아 영지 분위기가 개판이 겠는데."
제시카가 마차를 보고는 나지막 이 혀를 찼다.
영지를 다스리는 공작의 딸이 결 혼도 하기 전에 파혼을 당했으니 영지 분위기가 좋을 리가 없었다.
황실과 제국의 방패인 루테리아 간의 정략적인 결혼일 뿐이었지만,일방적인 파혼은 공작과 루테리아 영지민 모두에게 분노를 안 겨 줄 게 분명했다.
그리고 이미 여기에도 분노하는 사람이 있었다.
"지혜롭고 훌륭한 공녀님을 차 버리다니,이번 황태자는 정말 쓰 레……
다행히 제이크가 늦지 않게 제시카의 입을 막을 수 있었다.
나름 작게 이야기했지만,이곳은 기사와 병사들이 지키고 있는 성 문 앞이었다.
제이크로서는 눈에 띄는 일을 절 대 피해야 했다.
루테리아에서 용병 생활을 했던 제시카로서는 당연한 분노이겠지만,이번 파혼은 제이크로서는 어 느 정도 예상했던 일이었다.
영지민들에게 사랑받는 지혜로운 공녀.
미래에 황비를 보았던 제이크로 서도 동의하는 바였지만,문제는 그녀의 출신이었다.
그녀가 자라 온 영지는 몬스터와 이종족이 득실거리는 대수림과 맞 닿은 곳이었다.
그곳에 사는 사람들은 모두 거칠 고 자립심이 강했다.
동네 처녀마저도 마을에 몬스터 가 나타나면 집에 있는 부지깽이 를 들고 뛰어나오는 곳.
그런 곳의 영지민들에게 사랑받
는 공녀가 평범한 여성일 리가 없었다.
'멋진 여장부셨지.'
황제가 전쟁에 나가 객사를 한 뒤,막장이 되어 버린 제국을 어 떻게든 홀로 바로 세우려던 황비.
아쉽게도 그녀의 노력은 실패했 지만,그녀는 무척이나 존경할 만 한 여성이었다.
다만,대륙에서 제일 잘난 줄 알 고 난폭하기까지 한 황제가 똑똑 하고 당찬 황비를 마음에 들어 할 리가 없었다.
귀한 황손을 낳고,강력한 외척
까지 있어 내쫓을 수 없었지만, 황제는 틈만 나면 황비를 갈아 치 우고 싶어 했다.
"왜 멈춘 것일까요?"
길을 가로막고 있는 마차들 때문 에 제이크와 제시카도 성문에서 발이 묶여 버렸다.
성문에서 시간을 보내고 싶지 않 은 제이크로서는 지금 상황이 마 음에 들지 않았다.
앞을 살펴보니 귀족 몇이 마차를 막아선 채로 애원하고 있었다.
"곧 있으면 대관식입니다. 대관 식이 마친 뒤 가시는 것이 어떠하
신지요."
"조금만 늦춰 주시면 많은 이들 이 기뻐할 것입니다."
막아선 귀족들을 보니,이들이 왜 마차를 막아섰는지 알 수 있었다.
이들 귀족은 모두 황도에 있는 친 루테리아 공작파.
황태자와 공녀의 결혼을 주도했 던 인물들이었다.
제이크는 머리를 더욱 아래로 숙 였다. 귀족들 사이에 그의 후견인 인 발렌티노 남작이 보였기 때문 이었다.
발렌티노 남작은 그의 얼굴을 아 는 사람이었다.
여태 아는 사람을 만나지 않아 반쯤 안심하고 있었는데 마지막 순간에 위기가 찾아온 것이다.
하지만 아쉽게도 제이크의 걱정 은 전혀 쓸모없었다. 발렌티노 남 작은 마차에 온 정신을 쏟고 있었다.
"공녀님의 상황을 모르시는 건가 요! 대관식에서 또 모욕을 당하시 기를 바라시는 겁니까!"
마차 앞에 선 마법사 복장의 여 성이 그들에게 호통쳤다.
그녀의 위치도 낮지 않은지,마 차를 막아서던 귀족들은 결국 길 을 내주고 말았다.
"하,이를 어찌합니까."
"어서 다른 방법을 강구해 보세."
"우리를 받아 줄 계파가 있을지 모르겠네요."
길을 터 준 귀족들은 한쪽에 모 여 어두운 얼굴을 한 채로 이야기 를 나누었다.
공녀 일행에 이어 성문을 나서던 제이크는 자신을 알아보지 못하 는,먼 친척 후견인을 흠쳐보며 씁쓸한 표정을 지었다.
들키지 않은 것은 고마운 일이었 지만,후견인이 '자신의 죽음'을 신경 쓰지 않는 것은 그리 좋은 기분은 아니었다.
하지만 그가 신경을 쓰지 않는 것은 당연하다면 당연한 것이었다.
그가 제이크의 후견인으로 있는 것은 귀족으로서의 체면과 제이크 부모님이 남겨 놓은 작은 땅 때문 이었다.
그로서는 제이크가 죽은 덕분에 아무 문제없이 그 땅을 팔아 치울 수 있게 된 것이다.
그를 외면한 후견인이 야속하긴 했지만,덕분에 제이크는 끈 떨어 진 신세가 된 후견인을 보며 홀가 분한 기분으로 길을 떠날 수 있었다.
제이크가 몸을 숨기는 모습을 마 차를 모는 제시카가 모를 리가 없었다.
하지만 그녀는 그에게 아무것도 묻지 않았다.
다만,제이크가 가출한 귀족 소 년이라는 오해가 좀 더 강해졌을 뿐이었다.
제이크가 탄 짐마차는 성을 나선
뒤에 공녀 일행과 조금씩 멀어졌다.
그런데 한참을 멀어진 짐마차는 어느 순간부터 공녀 일행을 일정 한 거리를 두고 따라가기 시작했다.
일행이 많아 공녀 일행이 느리게 움직이고 있다고는 하지만,아무 리 봐도 이건 고의로 따라가는 것 이었다.
"빌붙을 수 있을 때 빌붙어야지. 공녀님은 황도의 쓰레기 같은 귀 족들과 다르게 관대하시거든."
제이크의 물음에 제시카는 시원
하게 대답했다.
"어차피 안전하게 가면 장땡이 야. 어느 바보가 공녀님 마차 근 처에서 강도질을 하겠어. 최대한 거치적거리지 않게 따라가면 루테리아까지만사형통인 거지!"
의기양양한 그녀의 모습에 제이크는 감탄해야 할지 화를 내야 할 지 알 수가 없었다.
편법을 동원하기는 했지만,그래 도 결과가 좋으면 그만이라는 그 녀의 말에 제이크도 결국,동의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중간에 들릴 곳이 있어
서 계속 따라갈 수는 없습니다."
"껍,그건 아쉬운데. 뭐 어쩔 수 없지. 그때까지만이라도 이렇게 가는 거야."
다행히 제시카의 말대로 공녀 일 행은 두 사람이 멀찌감치 쫓아오 는 것을 내버려 두었고,덕분에 두 사람의 여행은 정말 한가한 여 행이 되어 버렸다.
황도의 서쪽으로는 평탄한 길옆 으로 넓은 곡창 지대가 펼쳐져 있 었다.
황도에 사는 사람들을 모두 먹이 고도 남을 정도인 곡창 지대는 제
국의 자랑 중 하나였다.
짐마차를 이끄는 말은 늙은 말이 었지만,두 사람까지 더해졌음에 도 잘 이끌어 주었다.
게다가 공녀 일행도 속도를 높이 지 않는 덕분에,두 사람은 그날 내내 나른한 표정으로 짐마차에 앉아 있게 되었다.
제이크는 오랜만에 긴장이 풀려 행복한 기분으로 쉴 수 있었지만, 한나절 만에 제시카는 지루해졌다.
이리저리 몸을 비틀던 제시카가 결국 이야기할 거리를 찾아냈다.
"맨몸으로 여행하는 것은 무리잖아. 혹시 다룰 수 있는 무기 없어? 던전 탐사를 하게 되면 자기 몸은 자기가 지켜야 해."
다행히 그 이야기는 제이크가 원 하던 내용이었다.
제시카가 먼저 이야기를 꺼내 준 덕분에 제이크는 편하게 대답할 수 있었다.
호신용으로 작은 단도를 몸에 지 니고 있었지만,그는 단검술 같은 것을 배워 본 경험은 없었다.
검술도 겨우 자세만 그럴듯했고, 마법은 너무 늙어 배울 수 없었
다.
그런 그도 혼란한 시기에 살아남 기 위해 배워 놓은 것이 있었다.
"쇠뇌를 조금 다룰 줄 압니다." 쇠뇌,혹은 석궁이라 불리는 방 아쇠가 달린 활.
일반 활보다 사용하기 편해 나이 든 제이크로서는 더할 나위 없는 무기였다.
"엥? 칼이 아니라?"
오해로 생긴 선입견 덕분에 제시카는 어리둥절한 표정이 되었다.
"쇠뇌는 다뤄 볼 일이 없었을 텐 데……. 뭐,좀 있다가 확인해 보
면 되겠지."
다행히 제시카가 가지고 있는 물 건 중에는 쇠뇌도 포함되어 있었다.
시간이 지나 해가 지평선과 가까 워졌다.
앞서 가던 공녀 일행은 길을 벗 어나 근처 공터에 자리를 잡았다.
이미 지나온 길에 마을이 있었지만,마을에 피해를 주지 않으려고 한 것인지 공녀 일행은 마을을 그 냥 지나쳤었다.
"우리도 슬슬 자리를 잡을까?"
길을 벗어나 마차를 세운 뒤 제시카와 제이크는 짐마차 위에 바 람막이를 펼쳤다.
밀집이 깔린 짐마차가 있으니 땅 에서 올라오는 냉기는 문제가 없 었고,봉으로 밭쳐 놓은 바람막이 는 밤이슬을 막아줄 것이다.
공녀 일행은 제대로 된 천막들로 숙영지를 만들고 있었지만,두 사 람에게는 이 정도면 충분했다.
"그럼 이제 실력을 확인해 볼까?"
제시카가 제이크에게 마차에서 꺼낸 쇠뇌를 건네주었다.
"저쪽 나무를 향해 쏴 봐. 실력 을 보고 조언해 줄게."
그녀는 두 사람이 있는 곳에서 거의 200걸음 정도 떨어진 곳에 서 있는 나무를 가리켰다.
제이크는 건네받은 쇠뇌를 살펴 보았다.
쇠뇌는 무척이나 관리가 잘되어 있었다. 나무는 기름이 먹여져 번 들거렸고,활은 조금도 늘어지지 않았다.
제이크는 활을 당겨 시위를 걸 고,쇠뇌에 화살을 올려놓았다.
다행히 미래의 경험은 단지 머릿
속에만 남아 있는 것이 아니었다.
쇠뇌에 시위를 걸고 나무를 향해 자세를 잡는 것이 습관처럼 자연 스럽게 이루어졌다.
"오,거짓말이 아니었네."
숙련된 제이크의 모습에 제시카 가 휘파람을 불었다.
잠시 숨을 멈춘 제이크가 방아쇠 를 당겼다.
숙!
화살은 쏘아졌고,나무 옆으로 사라져 버렸다.
"풋,자세만 그럴듯한 거였어?"
화살이 나무 근처에 가지도 못하
고 사라지자,제시카가 웃음을 터 트렸다.
하지만 제이크는 무슨 생각인지 고개를 끄덕이며 다시금 시위를 걸었다.
그리고 다시 그는 화살을 쏘았고.
픽!
이번에는 정확히 나무에 화살이 박혔다.
'영점은 잡았고.'
"오!"
두 번 만에 성공한 모습에 제시카가 감탄사를 터트렸다.
그러다 계속해서 쇠뇌를 쏘는 제이크의 모습에 결국 입을 떡 벌리 고 말았다.
쇠뇌에서 발사된 화살이 200걸 음 떨어진 나무 한가운데에 차례 로 박혔기 때문이었다.
쇠뇌를 다룰 수 있으리라고는 생 각했는데,이건 제대로 훈련된 궁 사였다.
"도대체 네 정체가 뭐야!"
다시 한 번 제이크의 정체를 물 어보는 제시카에게 제이크는 답을 해 주었다.
"출신 때문일까요?"
물론 미래의 경험이 제대로 적용 된 덕분이지만,그걸 말할 수는 없으니 전생의 양궁 민족 덕분인 것으로 하기로 했다.
"그게 무슨 소리야!"
당연히 에시카는 그의 말을 이해 하지 못했다.
저녁 내내 제시카의 질문이 이어 졌지만,제이크로서는 그녀의 마 음에 드는 대답을 해 줄 수 없었다.
그렇게 한참을 시달리면서 저녁 을 준비하는 동안,말 한 마리가 두 사람이 있는 곳으로 다가왔다.
말에 탄 사람은 앞에서 숙영하는 중인 공녀의 일행이었다.
마법사 로브를 입은 젊은 여성이 었는데 제이크는 그녀의 얼굴을 보자,나이 든 그녀의 얼굴을 겹 쳐 볼 수가 있었다.
"공녀님이 저녁 식사에 초대하셨 습니다. 같이 하시는 게 어떻겠습 니까?"
공녀의 저녁 식사에 초청하러 온 여성은 공녀의 평생의 친우인 마
법사로,공녀를 따라 모든 것을 버리고 황도로 온 여성이었다.
원래 귀족인 그녀는 제이크가 알 고 있는 미래에 황비를 도와 마지막까지 황도를 지켰었다.
그리고 그녀는 마지막 순간,황 비와 함께 지하 통로로 황도를 빠 져나왔었다.
바로 그녀가 제이크에게 황실의 지하 통로를 가르쳐 준 이였다.
제이크는 미래의 인연이 다시금 이어지는 것을 느꼈다.
제시카는 냉큼 공녀의 초대를 승 낙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