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하급 서기관의 회귀-12화 (12/222)

12화

제이크와 제시카가 공녀 일행의 야영지에 도착했을 때는 노을빛만 이 주변을 비출 때였다.

야영지는 마차 세 대가 삼각형 형태로 세워져 있었고, 중앙에는

화롯불 여러 개가 불을 피우고 있 었다.

화롯불들에서는 소세지가 구워지 고 스프가 끓고 있었고,요리하는 하인들 이외에는 모두 개인 정비 를 하고 있었다.

마법사는 두 사람을 제일 화려한 마차로 이끌었다.

"용병들을 데리고 왔습니다."

마법사가 두 사람을 마차 앞에 세우자 마차의 문이 열렸다.

고급스럽지만 화려하지 않은 드 레스를 입은 앳된 여성이 마차에 서 내렸다.

제이크보다 한두 살 정도 많아 보이는 아름다운 여성.

"레이첼 공녀님이십니다."

마법사의 말이 아니더라도 두 사 람은 그녀가 공녀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제시카는 영지에 있을 때 먼발치 에서 그녀를 본 적이 있었고,제이크는 먼 미래에 나이 든 그녀와 같이 다녀 본 경험이 있었다.

"제이라고 합니다."

"제시카입니다."

궁정식 예절로 몸을 숙여 인사하 던 제이크는 주변에 흐르는 묘한

분위기에 아차 하는 기분이 들었다.

제시카가 허리를 숙인 채로 놀란 표정으로 그를 보고 있었다.

다른 사람들도 신기한 표정으로 그를 보는 중이었다.

'실수다. 너무 제대로 인사했어.'

"어디서 배웠는지 정말 잘 배웠 군요."

공녀마저도 묘한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자,제이크는 난처한 표정 이 되었다.

그의 머릿속에 바로 몇 가지 변 명이 떠올랐지만,괜히 변명을 늘

어놓기에는 자리가 안 좋았다.

"인사받으려고 부른 건 아니니까요. 저녁이나 같이 먹자고 불렀습 니다. 식사 후에 사람 사는 이야 기를 듣고 싶기도 했고요."

다행히 공녀는 넘어가 주었다. 확실히 지혜로운 여인이었다.

식사 초대와 함께 용병들이나 서 민들의 이야기를 듣는 일.

높은 자리에 있는 자들은 반드시 하는 일이지만,실제로 하는 사람 은 거의 없는 일을 지금 이 시기 에도 그녀는 계속해 나가고 있었다.

'원래 성격이었나 보네.'

미래에 보았을 때는 도망자 신세 였기에 어쩔 수 없이 어울렸던 것 으로 생각했는데,생각보다 훨씬 서민적인 공녀님이었다.

잠시 공녀와 조금 껄끄러운 인사 가 끝난 뒤,두 사람은 일행 사이 에 끼어 식사를 얻어먹게 되었다.

식사는 꽤 괜찮았다.

빵도 부드러웠고,스프도 고기가 많이 들어 있었으며,간도 잘 맞 았다.

식사는 정말 만족했지만,식사 후에 나온 차는 정말 맛이 없었

다.

제시카나 군인들은 그냥 벌컥벌 컥 들이켰지만,공녀는 한번 맛을 보고는 옆으로 치워 버렸다.

아쉽게도 공녀 일행에는 따로 차 를 탈 수 있는 집사나 전담 시녀 가 보이지 않았다.

급하게 움직이게 돼서 따로 사람 을 구하지 못한 것 같았다.

"잘 먹었습니다."

"잘 먹었다니 고마워요."

공녀와 함께 식사를 마친 제시카 가 공녀에게 감사를 표했고,공녀 도 미소로 그녀의 인사에 답했다.

그리고 잠깐 제시카에 관해 물어 보던 공녀는 그녀의 출신을 듣자 바로 영지에 관해 질문하기 시작 했다.

황태자비가 되기 위해 꽤 오래전 황도로 온 공녀였다.

세상 이야기도 들을 필요가 있지만,그녀는 떠나온 고향 이야기를 더 듣고 싶었다.

그녀의 물음에 제시카가 신이 나 서 이야기를 쏟아 냈고,공녀와 마법사는 그녀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였다.

뻘쯤하게 앉아 있던 제이크는 잠

시 뒤 조용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고향 이야기를 하는 여성들 사이 에 끼어 있을 이유가 없었다.

제이크는 맛없는 차가 든 컵을 손에 든 채로 마차에 기대어 공녀 일행을 둘러보았다.

경계를 서기 시작한 병사들과 벌 써 잠자리에 들어가려는 사람들, 그리고 한쪽에 서서 이야기를 나 누는 기사들.

조금은 한가로운 분위기의 야영 지였지만,평범한 야영지와는 느 낌이 달랐다.

사람들 모두가 공녀를 훔쳐보고

있었다.

다른 귀족의 여행같이 귀족을 어 려워하는 것이 아니라 모두 공녀 를 안쓰럽게 바라보는 것이 느껴 졌다.

'사랑받고 있네.'

일행뿐만 아니라 신나게 떠벌리 는 제시카의 모습에서도 그런 모 습이 잘 느껴졌다.

그런 시선을 받으면서도 표를 내 지 않고 주변을 배려하는 공녀의 모습에,제이크는 먼 미래의 황비 가 떠올랐다.

도망자 신세로 전락해서도 모두

에게 힘을 북돋워 주던 황비.

끝까지 같이 있지 못해 그녀의 마지막을 보지 못했지만,제이크 도 그녀에게서 많은 힘을 얻었었다.

'나중에 다시 만나게 되면 맛있 는 홍차를 타 주지 않겠어? 그대 가 가면 맛있는 차를 못 먹게 되 는 것이 제일 아쉬워.'

마지막 헤어지는 순간에 손을 붙 잡고 그녀가 한 말이 떠오르자, 제이크는 가만히 있을 수가 없었

다.

"조금 빚을 갚아 볼까?"

제이크는 바로 요리를 정리하는 하인들에게 다가가,양해를 구한 뒤 차를 우리기 시작했다.

방금 마셨고,지금 그가 만들고 있는 차는 전생의 홍차와 같은 차 였다.

불리는 이름은 달랐지만,만드는 방법과 맛도 같았기에 제이크도 즐겨 마셨었다.

다만,전생과는 다르게 이 세상 에서는 홍차가 흔하지 않았다.

귀족이나 돈 많은 상인 정도만이

마셨고,일반인들은 차를 접하기 힘들었다.

그래서인지 제이크가 차를 우려 주겠다고 하자 하인들은 냉큼 그 에게 자리를 내어 주었다.

제이크는 조심스럽게 차를 우리 기 시작했다.

홍차도 다른 차와 마찬가지로, 우릴 때 물,온도,시간을 맞추는 것이 제일 중요했다.

하지만 야영지에서 그렇게 딱 맞 추기는 어려운 일.

이럴 때는 편법을 써야 했다.

제이크는 우려 낸 홍차에 조금

남아 있던 우유를 섞고 빵에 발라 먹던 쟁을 차에 투하했다.

밀크티 완성!

황성에서 이렇게 만들었다가는 홍차를 망친다고 욕을 먹을지도 모르겠지만,도망자 신분 때의 황 비는 힘든 밤,따뜻한 밀크티를 정말 좋아했었다.

제이크는 힘들어 보이는 공녀를 위해 비법을 하나 더 추가해,이 야기를 나누는 여성들에게 차를 가져갔다.

"식사를 나누어 주신 공녀님께 감사의 표시로 차를 만들어 왔습

니다. 한번 맛을 봐 주시기 바랍 니다."

세 여성은 놀란 얼굴로 제이크를 쳐다보았다.

제이크를 용병으로 알고 있던 공 녀와 마법사는 그가 차를 우릴 수 있다는 사실에 놀랐고,제시카는 그의 다재다능함에 다시금 놀라고 말았다.

어쨌거나 맛없는 차 덕분에 차를 마시지 못한 두 사람에게는 고마 운 일이었다.

공녀의 차는 마법사의 해독 마법 으로 독 유무를 확인한 뒤에 공녀

에게 건네졌고,다른 차들도 두 여성의 손에 쥐어졌다.

"와,맛있다! 근데 홍차가 아니 네?"

"맛이 다르지만,이것도 홍차 중 하나에요 저도 정말 오랜만에 맛 보는 것 같아요."

처음 먹어 본 밀크티에 제시카는 감탄을 터뜨렸다.

입맛에 딱 맞는 차 덕분에 공녀 는 아련한 미소를 지었다.

"이건 정말 고맙네요. 객지에서 이 맛을 느낄 수 있을 줄은 몰랐 어요. 다시 한 번 감사드려요."

예상보다 더한 감사에 제이크는 대충 답례한 뒤에 후딱 자리를 피 했다.

다시금 원래의 자리로 돌아간 제이크는 호감 어린 눈길이 주변을 맴도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공녀에게 차 한 잔 잘 대접한 덕 분에 일행 전체의 호감도가 올라 간 모양이었다.

그렇게 좋은 기분으로 끝이 났으 면 좋으련만,아쉽게도 저녁 식사 는 울적하게 끝이 났다.

차를 마시며 이야기를 나누던 공 녀가 그만 자기도 모르게 눈물을

흘렸던 것이다.

볼에 흐르는 눈물에 놀란 공녀가 마차로 돌아갔고,야영지는 우울 한 분위기로 변한 채로 잠자리에 들게 되었다.

쫓기듯이 짐마차로 돌아온 제시카가 의아한 표정으로 제이크에게 물었다.

"이상하네. 네가 준 차를 마시긴 전에는 엄청 즐거운 분위기였거 든,근데 네가 준 차를 마신 뒤에 뭔가 분위기가 바뀌셨어. 설마 무 슨 마법의 차 같은 건 아니겠지?"

계속해서 새로운 모습을 보여 주

는 제이크였기에 그녀는 제이크가 차에 마법을 부렸다고 해도 믿을 것 같았다.

"별다른 것 없었는데요? 그냥 다 른 차하고 다르게 브랜디를 좀 섞 었을 뿐인데……

"뭐! 거기다 술을 넣었어?" 도망자 시절의 황비는 브랜디를 듬뿍 넣은 밀크티를 자기 전에 마 시는 것을 좋아했었다.

그 기억에 공녀의 차에 브랜디를 넣었을 뿐이었다.

하지만 곧 그는 자신의 실수를 알아차렸다.

"이런,착각했네."

세월의 풍파를 겪은 중년의 황비 와 이제 파릇파릇한 20살의 공녀 의 주량을 똑같이 본 것이 잘못이 었다.

"달아나야 할까요?"

난감한 표정으로 헛소리를 늘어 놓는 제이크를 보며 제시카는 허 탈하게 웃고 말았다.

"이제야 사람 같네. 너 은근 허 당이구나?"

결론적으로,브랜디를 탄 밀크티 는 아무 문제도 일으키지 않았다.

다음 날 일어난 공녀는 오히려 개운한 모습이었고,그날부터 두 사람을 불러들여 자신들과 같이 움직이게 했다.

아쉽게도 첫날처럼 따로 불러 이 야기를 나누는 일은 없었지만,저 녁 식사 후의 차는 식사 답례 차 원으로 제이크가 담당하게 되어 버렸다.

그렇게 여유로운 일주일이 지나 가고,제이크와 제시카는 공녀 일 행과 헤어졌다.

바로 영지로 가는 공녀 일행과 달리,제이크는 들를 곳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공녀님이 무척이나 고마워하셨 어요. 이건 감사의 표시로 공녀님 이 주신 거랍니다."

공녀 일행과 헤어질 때,마법사 앰버가 제이크에게 선물을 주며 공녀의 인사를 전해 주었다.

"그런데 무슨 그런 선물을 주셨 냐. 돈으로 주셨으면 얼마나 좋아."

제이크의 손에 들린 선물을 보며 제시카는 한껏 투덜거렸다.

말린 홍차 잎을 선물이라고 건네 주었으니 차 맛을 모르는 제시카 로서는 이해가 안 갈 수밖에 없었다.

'이 찻잎 가격이 제시카의 계약 금보다 비싸다는 이야기는 절대 하지 말아야겠네.'

"하긴,돈이면 저도 좋았을 뻔했 어요."

"넌 그렇게 말하면 안 되지. 공 녀님이 주신 선물인데."

제시카의 기분을 풀어 주기 위해 맞장구를 쳐 주었던 제이크였지만,장단을 맞추기가 쉽지 않아

보였다.

"이왕 이렇게 된 거,전에 우유 넣어서 만들어 준 그거 타 줘."

"우유가 없습니다."

"엑! 그럼 스프 타면 비슷하게 안 될까?"

"안 됩니다."

"우유 안 넣은 건 너무 맛없단 말이야!"

"어차피 나만 먹을 겁니다."

"너무하잖아!"

일주일 동안 충분히 친해진 두 사람은 말 머리를 돌려,남으로 내려가기 시작했다.

편했던 시절이 갔다고 투덜거렸 지만,제시카는 제대로 호위를 해 주었다.

다행히 아직 황도의 영향이 남아 있는 곳이라,도착할 때까지 도적 이나 강도와 만나지도 않았다.

"그래서,어딜 들르는 건지는 말 안 해 줄 거야?"

대수림에 가는 것도,던전을 탐 사하겠다는 것도 전부 말해 주었 던 제이크였지만,이번에 가는 곳 은 어떤 곳인지는 그녀에게 알려 주지 않았다.

그도 그럴 것이,이번에 가는 곳

은 그의 고향 집.

돌아가신 그의 부모와 그가 살던 집이었다.

신분을 숨겨야 하는 제이크로서 는 자신이 살던 곳이라고 그녀에 게 이야기할 수 없었다.

멀리 평화로워 보이는 마을과 반 대로,흉가처럼 보이는 을씨년스 러운 저택.

방치된 지 5년 만에 폐가로 변 한 고향 집이 제이크를 반겼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