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화
"멋진 저택인데 왜 이렇게 버려 둔 거지?"
처음 본 제시카도 왠지 아까운 생각이 들 정도로 저택은 멋진 형 태를 하고 있었다.
'후견인이 사고 후에 홀로 살아 남은 아들을 황도로 보냈기 때문 이죠.'
제이크가 마음속으로 그녀의 말 에 대답하며 짐마차에서 내렸다.
제이크를 황도로 가게 한 다음, 후견인인 발렌티노 남작은 남은 하인들을 모두 해고해 버렸고,소 작료는 따로 수금원을 통해 수금 해 갔다.
덕분에 집은 남은 사람이 없게 되었고,그 뒤로도 계속 방치된 것이다.
아련한 표정의 제이크를 보자 예
시카의 머릿속에는 또 다른 드라 마가 펼쳐지기 시작했다.
누명으로 멸문당한 귀족가의 마 지막 생존자.
저택의 서재에 숨겨진 던전 위치 를 찾아 다른 귀족의 눈을 피해 대수림을 향하고.
가는 도중에 무너진 고향집에 들 려.....
나름 그럴듯한 추리를 이어 가던 제시카는 도끼를 든 제이크의 모 습에 드라마 쓰는 것을 멈추고 말았다.
마차에서 내린 제이크가 집 앞에
굴러다니는 낡은 도끼를 들고 저 택 안으로 들어갔던 것이다.
"오늘은 집에 들어가 자도록 하 죠. 장작을 좀 만들 테니 짐마차 를 부탁합니다."
그러고 보니,해가 슬슬 넘어가 고 있었다.
멀리 언덕 아래쪽에 작은 마을이 있었지만,따로 여관도 없을 테니 이곳 저택에서 묶는 것도 나쁘지 않았다.
"껍,그냥 야영할 장소로 고른 거였어? 멸문한 귀족 자제라 니……. 너무 유치한 생각이었어.
근데 집 안에 나무를 할 곳이 있 나?"
어차피 제이크의 출신을 예상하 는 것은 거의 포기했다. 덕분에 조금 전 상상도 금방 머리에서 지 울 수 있었다.
잠시 뒤, 그녀가 짐마차를 반쯤 부서진 마구간에 넣고 저택에 들 어가는 순간,저택 안쪽에서 장작 을 패는 듯한 소리가 들려왔다.
그녀가 소리를 따라가다 보니 제이크가 서재로 보이는 장소에서 고풍스러운 책상을 부수고 있었
다.
"에엑? 그거 좋은 거잖아. 아깝 게 왜 부셔?"
딱 봐도 정말 오래되고 품격 있 는 책상이었다.
제시카가 보기에도 비싼 값에 팔 려 나갈 물건.
하지만 제이크는 그녀 말에 고개 를 저었다.
"어차피 팔 수도 없어요. 가문의 문장이 새겨져 있어,다른 귀족은 사지도 않을 거예요. 그렇다고 문 장을 파내면 가치도 없어지고요. 이 건물에 같이 버려졌으니 불 때
는 데나 쓸 만할 뿐입니다."
쓸데없이 자세한 설명에 자기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인 제시카지만,그녀는 방을 나가면서도 고개 를 갸웃거렸다.
"도대체 모르는 게 없어. 근데 귀족 물건을 저렇게 부숴도 되는 건가?"
하지만 물어보았자 괜찮다는 이 야기만 들을 게 뻔해서,제시카는 질문하기를 포기하고 거실로 향했다.
버려진 집에서 자기로 했으니 장 작을 뗄 벽난로를 확인해 봐야 했
다.
이야기하느라 잠시 도끼질을 멈 춘 제이크는 씁쓸한 표정으로 아 버지의 책상을 바라보았다.
벌써 두 번째 박살 내는 책상이 었다.
처음은 먼 미래에 도망자들과 함 께 잠시나마 집에 들렀을 때.
그때도 장작을 만들기 위해 책상 을 부쉈었다.
당시에는 많은 장작이 필요해, 책상은 물론 다른 가구들도 다 박 살 내긴 했지만.
그리고 지금, 두 번째 부수는 아
버지의 책상이었다.
다만,지금 책상을 부수는 것은 그때처럼 장작을 만들기 위해서가 아니었다.
제이크는 다시금 도끼를 들어 책 상을 부수기 시작했다.
단단한 원목으로 만든 책상은 한 참을 두드려서야 결국 반으로 쪼 개졌다.
쩍.
책상은 둘로 나뉘어 양쪽으로 넘 어갔고.
좌르르르르.
잘려 나간 책상 사이에서 은화가
쏟아져 내렸다.
마차 사고로 제이크의 부모님이 돌아가신 뒤,득달같이 달려온 발 렌티노 남작은 빠르게 혼수상태에 빠진 제이크의 후견인이 되었다.
그는 제이크를 치료한다는 명목 으로 그를 마차에 태워 황도에 보 내 버렸고,남은 하인들을 해고했다.
그 뒤에 남작은 저택을 샅샅이 뒤졌다. 숨겨 놓은 돈이나 집과
땅문서,그리고 귀족 인장을 찾기 위해서였다.
제이크가 성인이 되기 전에 남은 재산을 빼돌리려면 소작을 놓은 땅문서와 귀족 인장이 꼭 필요했다.
하지만 남작의 수색은 헛수고로 돌아갔다.
집을 흉가로 보이게 할 정도로 뒤졌지만,그가 원하던 물건은 하 나도 찾질 못한 것이다.
덕분에 남작은 성인이 될 때까지 제이크의 후견인으로 버티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 후견인으로 버티
고 있어야 그나마 소작료를 중간 에 갈취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미래의 기억 속에서 성인이 된 제이크도 부모님의 유산을 찾을 수 없었다.
덕분에 재산권 행사는 불가능했 지만,그래도 소작료를 받을 수 있어 그는 나름 풍족하게 황도에 서 서기관으로 지낼 수 있었다.
그리고 시간이 지나 황도가 적들 의 수중에 떨어진 뒤,제이크는 도망자가 된 황실 사람들과 함께 이 집에서 하루를 지내게 되었다.
그동안 부모님의 죽음과 전생의
기억 때문에 일부러 외면한 고향 이었다.
하지만 이미 고향 마을도 전쟁으 로 불타버린 후였고,옛 추억보다 밤의 추위를 피하는 것이 더 중요 한 일행이었다.
결국,아버지의 책상은 장작으로 불태워지고 말았다.
다만,서재에 놓인 아버지의 책 상에는 제이크가 모르는 숨겨진 서랍이 있었다.
숨겨진 잠금장치를 찾지 못하면 절대로 열리지 않는 서랍이었다.
제이크의 아버지는 그곳에 가문
의 인장과 중요한 서류,그리고 가문의 비상금을 넣어 두었다.
아직 어린 제이크에게는 알리지 않고 부부만 알고 있던 서랍.
그리고 부부가 동시에 죽은 덕분 에 오랜 시간 서랍은 열리지 않았다.
미래에 책상을 부순 덕분에 그 안에 부모의 유산이 남아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지만,그때나 지금 이나 제이크는 이 비밀 서랍의 잠 금장치를 찾지 못했다.
결국,여는 방법은 무식한 도끼 질뿐.
그때처럼 그는 다시 한 번 아버 지의 책상을 박살 내 버렸다.
바닥에 흩어진 돈과 문서들.
제이크는 미리 준비한 주머니에 흩어진 실링을 쓸어 담고,땅문서 와 인장이 새겨진 반지도 품에 챙 겨 넣었다.
돈과 달리 땅문서와 인장은 당장 은 쓸데가 없었다.
죽은 것으로 되어 있는 제이크로 서는 드러내 놓고 땅을 팔 수도,
소작료를 달라고 할 수도 없었다.
다만,언제까지나 이름을 숨긴 채로 살 생각은 없었다.
이름을 숨기지 않으려면 제국이 뒤집혀야 하겠지만,언젠가 그날 을 만들어 볼 생각이었다.
'그것보다,당장은 이 돈이 보탬 이 되겠지.'
제시카의 호위비와 대수림까지 갈 경비,말과 짐마차 값 등으로 이미 남은 돈은 얼마 없었다.
빈털터리로 도착해서는 던전 탐 사는커녕 도착해서 먹고살 걱정부 터 해야 했다.
그래서 그가 공녀와 헤어져 고향 집에 내려온 것이었다.
'항상 현실은 돈이 제일 문제지.' 부모님의 숨겨 놓은 유산을 강도 질한 꼴이 되긴 했지만,결과가 좋으면 다 좋은 법.
인장과 땅문서,그리고 많은 돈!
그것들을 품에 넣은 제이크는 돌아가신 부모님께 감사할 따름이었다.
"장작 다 됐어?"
잠시 감상에 잠겨 있던 제이크는 복도 너머로 들려오는 소리에 다 시금 도끼를 치켜들었다.
이제는 진짜로 장작을 만들 때였다.
콰직!
거실의 모습은 남작이 얼마나 집 을 마구 뒤졌는지를 여실히 보여 주고 있었다.
제시카와 제이크는 거실의 쓰레 기를 옆으로 밀어 놓아야 했고, 그 뒤에 둘은 저녁 식사를 하고 각기 모포를 펴고 누웠다.
오랜만에 벽난로는 고급스러운
장작을 태우며 거실을 따뜻하게 데워 주었다.
간만에 실내에서 자게 된 제시카 는 만족한 얼굴로 배를 두드렸다.
저녁은 평상시처럼 평범한 스프 와 마른 빵이었지만,이렇게 집안 에서 먹으니 왠지 맛있게 느껴졌다.
"근데 이 집은 또 어떻게 알았던 거야?"
제시카는 처음 떠올렸던 그가 이 집 아들이라는 생각은 바로 접었 지만,제이크가 우연히 이 집에 들른 것은 아니라고 보았다.
제이크는 정확히 이 집으로 마차 를 몰게 했다.
그리고 이 집에 대해 몰랐다면 함부로 도끼를 들고 집에 들어갔 을 리가 없었다.
"껍,또 비밀이네."
이제는 어디서 어디까지가 비밀 인지 제시카도 대충 눈치를 챘다.
성격도 나쁘지 않고,무척이나 다재다능한 애늙은이였지만,제이크는 절대 자신의 신분과 과거에 대해 말해 주지 않았다.
계약자와 용병 사이라면 전혀 문
제없는 일이었지만,둘만의 여행 으로 충분히 가까워졌다고 생각하 는 제시카로서는 무척이나 아쉬운 일이었다.
소굽친구와 헤어진 뒤,대신할 사람을 찾는 마음에서 나온 과한 친절이라고 생각했지만,별로 불 편한 기분이 들지 않았던 제이크 는 그녀의 오지랖을 그냥 흘려 보 냈다.
그리고 오늘,대답하지 않은 것 은 비밀보다도 그냥 대답하고 싶 은 기분이 들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나름,각오하고 오긴 했지만,어 렸을 때부터 뛰어놀던 집에 누우 니 많은 추억이 그의 머릿속을 괴 롭혔다.
그렇게 버려진 고향 집의 밤이 지나갔다.
* * *
다음 날,실내에서 자서 개운한 기분의 제시카와 잠을 뒤척여서 찌뿌듯한 제이크는 아침을 먹고 집을 나섰다.
"쯧쯧,해 아래서 보니까 더 아
깝네."
저택을 돌아본 제시카가 다시 한 번 낡은 집의 모습에 혀를 찼다.
그녀는 마구간에 가서 짐마차를 끌고 나왔고,제이크는 마지막으 로 고향 집을 돌아보고는 그녀 옆 에 올라탔다.
이제는 오랫동안 다시 오지 못할 게 분명했다.
미래 기억에서처럼 스스로 오지 않는 것이 아니라,올 수 없게 된 만큼 마지막으로 보게 된 집은 무 척이나 쓸쓸해 보였다.
짐마차는 저택을 빠져나와 서쪽
으로 방향을 돌렸다.
좀 더 남쪽으로 내려가면 소꿉친 구들이 사는 마을이 있었기에 일 부러라도 서쪽으로 향할 수밖에 없었다.
그때 였다.
마차를 몰던 제시카가 묘하게 반 가운 표정으로 앞을 바라보았다.
"어라,이번 호위에서는 처음 일 어나는 습격인가?"
갑자기 길옆 숲에서 두 사람이 튀어나와 마차를 향해 달려왔기 때문이었다.
다행히(?) 사람들이 튀어나온 곳
은 마차에서 조금 멀었기에,그들 이 마차까지 오려면 한참 걸릴 듯 했다.
"요즘 습격은 무기도 없이,반쯤 벗겨진 옷을 입고 남녀가 손잡고 달려옵니까?"
"뭐,새로운 형태의 강도일 수도 있잖아."
오랜만에 벌어진 사건이라 실없 는 농담을 하며 제시카는 검을 뽑 아 들었다.
"분명 도와 달라고 달려오는 거 겠죠?"
"귀찮은 일에 휘말리는 게 아니
면 좋겠는데."
제이크가 쇠뇌에 시위를 걸며 꺼 낸 말에,제시카가 조금 걱정되는 얼굴로 대답했다.
다급한 두 남녀의 표정을 보니 분명 무언가에 쫓기는 모습이었다.
아직 황도에서 멀리 떨어진 곳이 아니라서 크게 걱정을 할 필요는 없어 보였지만,용병 일이란 게 언제 어떤 일이 벌어질지 모르는 일이었다.
"여차하면 모른 척해야지 뭐."
'그건 좀 곤란하겠는데요.'
제이크를 먼저 생각한 제시카의 말에 제이크는 마음속으로 고개를 흔들어야 했다.
그는 달려오는 두 남녀를 도와주 지 않을 수 없었다.
고향 마을 근처에서 만난 사람들 을 그가 모르기가 힘들었다.
더구나 한눈에 소꿈친구인 것을 알아보았으니 외면하기는 무리였다.
크앙!
제이크가 쇠뇌를 치켜드는 동시 에 두 사람 뒤에서 커다란 들개가 튀어나왔다.
"이런,마물로 변한 들개잖아." 평범한 들개보다 훨씬 커,마치 표범이나 거대한 늑대처럼 보이는 들개.
입에서는 가래침을 흘리고,눈은 붉게 충혈된,마나에 오염된 들개 였다.
이 세상은 전생과 다르게 마나가 가득한 세상이었다.
태어날 때부터 마나를 몸에 품은 몬스터가 있었고,지금처럼 마나 에 오염되어 동물이 마물로 변하 기도 했다.
체계적으로 마나를 받아들인 인
간과 달리,마나에 휩쓸린 동물은 이성을 잃고 사람을 습격하곤 했다.
"꺄악!"
손을 잡고 도망치던 여자가 결국 바닥에 넘어졌다.
그 모습을 보고,같이 도망치던 남자는 여자 앞을 가로막았다.
제시카는 인상을 쓰며 마차 앞으 로 튀어 나갔다.
"일이 꼭 이렇게 된다니까!" 갑작스럽게 벌어진 사태에도 쇠 뇌를 겨눈 제이크의 모습은 변화 가 없었다.
'다행히 바람은 불지 않고,거리 는 30미터. 숨을 멈추고……
제이크의 손가락이 방아쇠를 당 겼다.
슈악!
경쾌한 소리와 함께 화살이 쏘아 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