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화

퍽!

제이크가 쏜 화살은 남자의 옆구 리를 스쳐 지나가,들개 왼쪽 눈 에 정확히 명중했다.

"캠!"

아직 개처럼 비명을 지르는 것을 보니,들개는 완전히 마물로 변한 것은 아니었다.

화살을 맞은 들개는 달려오던 속 도를 이기지 못하고 그대로 앞으 로 나뒹굴었고,죽기로 각오하고 여자 앞에 선 남자는 기쁜 표정으 로 뒤를 돌아보았다.

"비켜!"

하지만 남자가 본 것은 제시카가 휘두른 주먹이었다.

퍽!

반짝이는 별과 함께 남자는 옆으 로 쓰러졌다.

제시카는 쓰러진 남자를 뛰어넘 은 뒤,일어서는 들개를 향해 검 을 찔렀다.

푸욱!

제시카의 검은 아쉽게도 들개의 어깨에 박혔다. 마지막 순간에 들 개가 머리를 피한 것이다.

"쳇,역시 장검은 손에 안 맞아." 어깨에 박힌 검을 놓아 버린 후, 제시카는 단검을 꺼내 들었다.

크르르르륵.

제시카가 단검을 꺼내 드는 사이 에 들개는 휘청이며 몸을 일으켰다.

한쪽 눈에 화살이 박히고,어깨 에 검을 꽂은 채였지만,들개의 흉포함은 전혀 줄지 않았다.

마나의 힘이 고통을 분노로 바꿔 놓고 있었다.

상처를 무시하고 들개가 달려들 려고 하자,제시카는 화살이 박힌 눈 쪽으로 빠르게 움직였다.

그녀가 사각으로 피한 덕분에 달 려들 기회를 놓친 들개는 그녀를 따라 몸을 돌렸다.

그러자 들개가 신경 쓰지 못한 또 한 사람의 공격이 들개에게 내 리꽂혔다.

제이크의 화살이 다시 한 번 들 개 얼굴에 박힌 것이다.

아쉽게도 이번에는 눈에 맞지는 않았지만,들개는 또다시 느껴지 는 고통에 얼굴을 마구 흔들었다.

그러는 통에 들개는 제시카의 움 직임을 놓치고 말았다.

'기회!'

빈틈을 본 제시카는 번개같이 들 개 밑으로 파고들어 단검으로 들 개의 목을 베어 버렸다.

이번에는 제대로 원하던 지점을 검이 지나갔다.

목에 있는 동맥이 터졌고,들개

는 그대로 허물어져 버렸다.

"에익,다 튀었네. 이래서 단검이 싫다니까."

피가 튄 옷을 보며 제시카는 억 울한 표정을 지었다.

"코앞에서 싸우느라 위험하기는 제일 위험하고,쏟아지는 피에,역 겨운 입 냄새까지. 내가 왜 도적 을 하겠다고 했는지 몰라."

소굽친구의 재능을 보고 냉큼 도 적을 고른 그녀였지만,싸우고 나 면 엉망이 되는 옷에 매번 우울해 지곤 했다.

"그래도 덕분에 사람을 살렸잖습

니까."

어느새 마차를 몰고 다가온 제이크가 나름 그녀를 위로했다.

"목소리가 왜 그래. 아무튼 덕분 에 쉽게 끝났어. 그냥 용병으로 전직해도 충분히 먹고 살겠는데?"

"할 수 있는 게 쇠뇌밖에 없는걸요. 아무튼,뒷일을 부탁할게요."

굵은 목소리로 말을 건넨 제이크 는 성질을 내는 늙은 말을 다독이 며 먼저 앞쪽으로 움직였다.

"뭐,용병인 내가 마무리하는 것 은 맞지만…… 어이,계약자님! 귀찮으니까 도망가는 거지!"

제시카가 버럭 소리를 질러도, 그는 머리 위로 손을 흔들며 말을 몰 뿐이었다.

"어휴,정말 이상한 호위를 맡았 다니까."

한숨을 쉬는 제시카를 두 남녀가 멀뚱거리게 바라보고 있었다.

놀라 딸꾹질을 하는 여성과 제시카의 주먹에 맞아 퍼렇게 멍이든 남자는 목숨을 구원한 사람의 입 에서 어떤 말이 나올지 궁금해했다.

"자,그럼,목숨값은 얼마나 받을 까나."

용병이 하는 일은 모두 돈을 받 고 하는 일이었다.

물론 앞뒤가 바뀌긴 했지만,제시카는 충분히 받아 낼 자신이 있 었다.

다행히 두 사람은 제시카가 원하 는 금액을 줄 수 있었다.

제시카도 큰돈을 원하지 않았고, 두 사람도 그녀에게 줄 만한 것을 가지고 있었다.

"그래서 가져온 것이 그 반지에요?"

"뭐 구리 동전 몇 개도 있지만,

그거로는 계약금도 안 돼."

"아무리 봐도 보통 반지는 아닌 것 같은데."

"크고 작은 반지 두 개니 뭐,약 혼반지 정도 되려나?"

은으로 만든 한 쌍의 반지.

보석은 박히지 않아 몇 실링 정 도밖에는 안 할 것 같지만,돈보 다 더 중요한 의미가 있는 반지일 게 분명했다.

"뭐,목숨을 구해 주었는데 반지 야 다시 사면 되는 거지. 그렇다 고 귀찮게 들개를 들고 마을로 가 서 고기를 팔 수도 없잖아. 아직

마나석도 생기기 전일 텐데 그 고 생을 할 수는 없지. 둘이 알아서 고기를 팔면 대충 손해는 메꿀 수 있을 거야."

그녀의 말에는 동의하지만,소꿉 친구들의 약혼반지를 강탈해 버린 것은 꽤나 미안했다.

하지만 일부러 목소리를 바꾸고 얼굴도 피했는데,다시 가서 돌려 줄 수는 없었다.

"이것도 다 추억이야. 약혼반지 를 받고 행복한 기분에 사랑을 나 누려다가 마물에게 쫓기고,죽을 위기에 용병에게 도움을 받는 이

야기라니. 결혼 뒤에는 죽을 때까 지 이야깃거리가 될걸?"

혼자 다른 사람의 추억을 만들어 버린 뒤,제시카는 반지 하나를 제이크에게 건네주었다.

"네 몫. 피를 뒤집어썼으니 큰 건 내가 가질 거야."

뒤집어쓴 정도는 아닌 것 같지만,그래도 용병도 아닌 제이크에 게 반지를 준 그녀는 꽤 양심적이 었다.

잠시 고민하던 제이크는 그녀가 준 반지를 품에 집어넣었다.

그는 고향으로 돌아올 때 한 쌍

의 반지를 다시 만들어 소꿀친구 들에게 돌려주기로 했다.

'안나,데이브. 맨날 싸우더니, 둘이 그렇게 될 줄 몰랐네. 행복 하게 잘 살아. 나중에 결혼 선물 을 사 올게.'

이제는 작게 점처럼 보이는 소꿉 친구들을 돌아본 제이크는 마음속 으로 그들에게 작별 인사를 했다.

"갔네……

"음,가 버렸네."

"끅,옷도 엉망이 되고,반지도 없어지고,놀라서 딸꾹질도 나고, 끅,살아서 기쁘기는 하지만,평생 한 번인 프로포즈가 완전 엉망이 되었어. 끅."

바닥에 주저앉아 딸꾹질을 하던 안나는 결국 눈물을 글썽이고 말았다.

"그거야,용병님들이 목숨을 구 해 주셨고,드릴 수 있는 게 없으니까..

"내가 반지 드렸다고 뭐라 하는 게 아니잖아! 끅."

반지를 준 뒤에 생각 없이 덮쳐

버렸던 데이브는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었다.

더구나 마을에서 장사로 이름 높 은 그였기에 미안함은 배가 될 수 밖에 없었다.

"근데,그냥 지나간 남자 용병, 어디서 많이 본 것 같지 않아? 목소리도 왠지 들어 본 것 같은데."

시간이 지나 어느 정도 분이 가 라앉고 딸꾹질도 멈추자,안나는 마차를 타고 지나갔던 남자에 대 해 떠올릴 수 있었다.

조금씩 그녀의 머릿속을 간질거

리면서 뭔가 기억이 나려 했다. 하지만 마지막 순간,데이브의 말이 그녀의 기억을 날려 버렸다.

"내가 용병이 돼서 훨씬 더 좋은 반지로 사 줄게. 조금만 기다려 줘."

두 손을 잡고 데이브가 꺼낸 말 은 안나를 혼미하게 만들어 버렸다.

나이가 들면서 사라졌던 데이브 의 용병 꿈이 다시 돌아온 것이다.

"아냐! 반지는 천천히 해 줘도 돼! 나 결혼 허락했어!"

"그럼 안 되지. 조금만 기다리면 멋진 반지를 들고 돌아올게."

큰일 났다.

하얗게 질린 안나가 데이브에게 매달렸지만, 데이브는 동경하는 얼굴로 떠나간 두 용병 쪽을 계속 바라보았다.

제이크와의 만남 때문에 평범한 농사꾼 부부로 살아갈 소굽친구들 의 미래가 전혀 다른 방향으로 흐 르게 되었다.

남겨진 두 사람이 어떻게 될지 전혀 모른 채로 제이크와 제시카 는 여행을 계속했다.

제이크의 고향을 들른 탓에 크게 남쪽으로 돌아간 두 사람은 한 달 뒤에야 루테리아 영지 근처에 도 착할 수 있었다.

그동안 꽤 많은 일이 있었다.

한 달 동안 제이크는 제시카에게 용병의 기본 소양과 몸 쓰는 법을 배웠고,들짐승과의 싸움으로 그 감각을 몸에 새겨 넣을 수 있었다.

대신 제시카는 홍차 맛을 알게

되었다.

밤마다 홀짝이는 제이크의 모습 에 한두 번 뺏어 먹어 보더니 그 만 홀딱 빠지게 된 것이다.

나중에 홍차 가격을 듣고 혼비백 산했지만,아무래도 홍차를 끊기 는 어려워 보였다.

그동안 두 사람은 정말 많이 친 해졌다.

이제는 계약자와 용병이 아니라 오랜 시간을 같이 다닌 파티원 같 은 두 사람이었다.

하지만 제이크는 끝까지 자신의 비밀을 그녀에게 알려주지 않았

다.

중간에 들린 도시에서 그녀 몰래 염색도 다시 했고,왜 남쪽으로 돌아왔는지 말해 주지도 않았다.

다행히 그녀도 그런 부분은 인정 을 해 주어서,비밀 때문에 두 사 람 사이가 어색해지지는 않았다.

다만,제시카는 제이크의 출신을 다른 사람에게 이상하게 설명했다.

"그래서 애는 누명을 쓴 몰락한 귀족 집에서 도망쳐 나온 집사 출 신의 전문 궁수예요."

나름 귀여운 방법으로 불만을 이

야기하는 것이었지만,그녀의 설 명은 우스갯소리로 여겨질 뿐이었다.

"하하,이번 동료는 무척이나 재 미있는 동료인가 봐."

소개를 받은 용병이 제이크를 보 며 호탕하게 웃었다.

제이크와 제시카 두 사람은 목적 지인 루테리아 영지 근처에서 한 상단에 합류할 수 있었다.

제시카가 전부터 말해 왔던 '얹 혀 갈 수 있으면 얹혀 간다'는 다 짐을 다시금 실천한 덕분이었다.

그렇게 계약자와 용병이 아니라

두 명의 용병으로,제시카와 제이크는 상단과 함께 루테리아로 이 동하게 되었다.

루테리아와 가까워진 덕분인지 그 상단에는 제시카와 아는 용병 이 있었지만,그도 제이크가 용병 이 아니라는 것을 알지 못했다.

제시카는 출발할 때와 그리 달라 지지 않았지만,제이크는 전과 확 연히 달라져 있었다.

하얀 피부는 구릿빛으로 변해 있 었고,가날픈 팔과 다리는 잔 근 육으로 덮여 무척이나 튼튼해 보 였다.

연약한 수습 서기가 어느덧 건장 한 용병으로 보이게 된 것이다.

"그래서 요즘은 어때요?"

"엉망이지 뭐,새 황제님께서 들 어서는 시기잖아. 다들 납작 엎드 리거나 제 풀에 반란을 일으키거 나 하는 판이지. 더군다나 공녀님 을 내쫓았다며? 앞으로는 더 심해 질 게 뻔하지."

제국은 새 황제가 들어서면 '대 관식의 초청장'처럼 전지의 황제 가 새로 벌리는 일들이 있었다.

그 가운데 하나가 바로 피의 숙 청.

미래에서 보고 온 관리와 귀족들 을 미리미리 잘라 내는 것이다.

보통의 나라들도 왕이 바뀌면 숙 청이 일어나고는 하지만,제국은 파벌은 물론 이유도 없이 목이 날 아가는 일이 비일비재했다.

때문에 귀족과 관리들은 이 시기 에 일들을 놓아 버리고 쥐 죽은 듯이 있거나 제 발이 저려 반란을 일으키곤 했다.

"이 근처에도 작은 영지에서 반 란이 일어나 도적이 된 일당들이 있어서 다들 긴장하는 편이야. 뭐, 이제 루테리아에 거의 다 왔으니

한시름 놓게 됐지만."

그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마차 앞쪽에서 소란이 일어났다.

"적이다! 도적들이야!"

제이크와 제시카의 눈이 바로 용 병에게 향했다.

"아니,내가 말한 탓은 아니잖아. 이거 원,아침 기도를 빼먹어서 그런가? 운이 없네."

괜스레 투덜거린 그는 바로 마차 위로 뛰어올랐다.

"너도 준비해!"

제시카가 단검을 꺼내 들며 말했 지만,이미 제이크는 쇠뇌를 장전

하는 중이었다.

"껍,루테리아 근처에서 도적 떼 를 만나는 것은 드문 일인더L 영 분위기가 나쁘네."

손으로 검을 돌리며 긴장을 풀던 제시카는 제이크를 보고 속으로 미소를 지었다.

자신이 가르쳤지만 정말 잘 가르 쳤다.

마차에 기댄 채로 쇠뇌를 겨누는 제이크의 모습은 완숙한 용병 그 자체였다.

만족한 얼굴로 마차에 내려선 제시카는 적이 온다는 마차 앞 구릉

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그녀는 구릉 위로 올라오 는 도적들의 모습에 어리둥절한 표정이 되었다.

"엥? 정말 유행이었나 본데?"

이번에도 도적들이 겁먹은 얼굴 로 마차 행렬을 향해 달려오고 있 었다.

다만,검을 치켜들고 달려드는 제대로 된 도적들이어서 그녀는 더욱 황당할 뿐이었다.

그리고 잠시 뒤,도적들 뒤에 나 타난 사람들을 보고 일행은 도적 들의 행동을 이해할 수 있었다.

"루테리아 레인저들이야!"

가죽 갑옷을 입고,한 손에는 쇠 뇌를 든 일단의 군인들이 날렵한 말을 타고 빠르게 그들을 쫓고 있 었다.

바로 루테리아 영지가 자랑하는 산악 병사.

루테리아 레인저들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