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화
제시카의 걱정대로였다.
그녀의 인원 모집은 시작부터 난 관에 부딪혔다.
어제 그녀가 길드에 이야기한 내 용이 벌써 용병들 사이에 파다하
게 퍼져 버렸기 때문이었다.
입이 가벼운 길드 직원이 이런 이슈를 그냥 놔두지 않았던 것이다.
물론 용병이 '대관식 초정장'을 받은 것은 소문내도 될 일이었지만,그 일에 함께 제시카의 불행 을 퍼뜨린 것이 문제였다.
덕분에 제시카는 말도 제대로 꺼 낼 수 없었다.
"저,잠깐 말 좀……"
"나도 이야기 들었어. 무척 안됐어. 근데 미안해 우리도 사정이 안 좋거든."
"혹시 지금 파티 쉬고 있어요?"
"아니,지금 의뢰가 들어와서 가 봐야 해. 나중에 이야기하자고."
그나마 이야기를 할 수 있게 된 용병들에게도 모두 퇴짜를 맞았다.
"지금 네 상황으로는 무리일 듯 한데. 제대로 된 파티도 없이 대 수림 깊숙이 가기는 무리잖아."
"다른 용병대에 넘기는 건 어 때?"
거기다 몇몇 용병은 오히려 제안 까지 했다.
"혹시 던전 위치를 물고 있는 의
뢰인이면 작업하는 게 어때? 죽이 는 게 싫다면 위치만 들은 뒤에 의뢰를 깨 버리면 되잖아."
길드 퀘스트로 내건 쪽은 당연하 게도 파리만 날렸고,친하게 지냈 던 용병에게서는 아픈 조언만 들 을 수 있었다.
"지금 네 상황에서는 무리일거야. 대수림 입구라면 급조한 팀으 로 움직여도 되겠지만,깊숙이 움 직인다면 용병대나 오래된 파티가 필요할 거야. 원래 너희 파티 정 도 말이야."
그렇게 첫날 쓰디쓴 실패만 한
제시카였지만,여관으로 돌아온 그녀는 실망한 표정을 보이지 않 았다.
하지만 하루가 지나고 이틀이 지 나자 제시카의 표정이 조금씩 어 두워졌다.
시간이 지나도 그녀는 사람을 구 할 수 없었다.
나중에 의뢰에서 돌아온 사람들 에게도 물어봤지만,제시카의 상 황을 알게 된 그들은 모두 퇴짜를 놓았다.
그나마 친했던 용병들은 자신들 의 파티나 용병대에 들어오라고
오히려 권유했다.
좋은 뜻으로 권유한 사람들이 있 었지만,어차피 다른 용병대에서 의 여자 취급은 뻔했다.
마법사 정도야 귀족 취급을 받으 며 지낼 수 있지만,다른 직업들 은 여자 혼자 몸을 지키며 용병을 하기란 쉽지 않았다.
시간이 지날수록 그녀는 현실의 높은 벽만 느끼게 되었고,결국 일주일 뒤 제이크에게 사과를 하 게 되었다.
"미안해. 나 혼자는 사람을 모을 수 없을 것 같아."
"어차피 천천히 하셔도 된다고 했잖아요. 아직 일주일밖에 안 지 났는데요?"
"시간이 지나도 이대로는 안 돼. 파티나 용병대가 아닌 이상 구심 점이 없어서 사람들이 모이질 않아. 그렇다고 뜨내기를 모을 수도 없는 거고. 계약 파기 위약금은 내가 벌어서 갚을게. 그리고 원한 다면 괜찮은 용병대를 소개해 줄 게."
제이크의 방 한가운데 서서 제시카는 어두운 얼굴로 말을 이었고, 그 모습에 제이크는 한숨을 내쉬
었다.
"계약 파기는 안 할 겁니다."
"그럼 안 돼! 시간만 낭비할 거 야!"
"낭비하는 거야 제 문제고,위약 금을 안 내면 좋은 거잖아요."
"그런 말 하면 화낼 거야!"
정말 화를 낼 것 같았다. 아무래 도 농담을 할 때가 아니었다.
"뭐,실패할 수도 있다고 생각했 어요. 플랜 B로 가죠."
"플랜 B?"
"제시카씨가 실패할 때를 대비해 서 따로 생각해 놓은 방법이 있어
요."
"그런 방법이 있었어? 너 용병 쪽 일도 알아?"
"그걸 알면 부탁했겠어요?"
"엥?"
갈수록 알 수 없는 말에 제시카 는 어리둥절할 뿐이었다.
"그래서 말인데,저 용병 추천 좀 부탁할게요."
"용병은 안 한다고 하지 않았어?"
"이 방법밖에는 없으니까요."
"무슨 방법인데."
"전에 제시카씨가 한 말 있잖아
요. 용병의 격언. '얹혀 갈 수 있 으면 얹혀가라.' 우리가 지금 그 걸 할 때에요."
"그게 무슨 말이야?"
이어지는 제이크의 설명에 제시카는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제이크를 바라봤지만,제이크는 우 선 용병 등록부터 하자는 말로 이 야기를 끝냈다.
다음 날,두 사람은 다시 길드 사무소에 가게 되었다.
"제시카 씨가 추천하시는 거예요? 새로 파티를 만드실 건가 봐요."
신청을 받는 여직원은 애매한 표 정으로 두 사람을 바라보았다.
하지만 애매한 것은 제시카도 마 찬가지였다. 아직도 제이크의 계 획을 믿기 어려웠기 때문이었다.
"그건 별로 상관없잖아요. 우선 시험이나 치르게 해 줘요."
"그건 그렇지만…… 흠,어디 보 자. 특기로 쇠뇌를 적으셨네요."
지원서를 확인한 여자 직원은 자 리에서 일어나 두 사람을 뒤쪽으
로 안내했다.
"오늘은 알렌 씨가 담당이시네요. 시험 내용은 알고 계시죠?"
그녀의 물음에 제이크는 고개를 끄덕였다.
이곳에 도착하고 일주일 동안 제이크가 돌아다니면서 확인한 내용 이 바로 그런 것들이었다.
그는 자신이 생각한 플랜 B가 가능한지 알아보았고,그 방법을 쓰려면 자신이 용병이 돼야 할 필 요가 있자 용병 시험을 준비했다.
이곳 루테리아에서 용병이 되는 것은 다른 나라는 물론 제국의 다
른 영지와 비교해서도 무척이나 까다로운 편이었다.
실제로 대수림에 뛰어드는 용병 을 뽑는 시험이라 그런지 용병들 의 자부심만큼이나 시험의 난이도 도 무척이나 높았다.
그렇지만 제이크도 시험이라면 자신이 있었다.
전생자라는 점이 이럴 때는 엄청 나게 도움이 되었다.
그는 먼저 시험 방식을 확인한 뒤,날짜별로 시험을 내는 사람을 확인하고,제일 점수를 잘 주는 담당자가 누구인지 알아보았다.
덕분에 급하게 다음 날 시험을 보러 나오게 되었지만,담당자 알 렌은 길드 소속 용병 중에 제일 쉽게 합격 도장을 주는 사람이었다.
제이크는 담당자를 정한 뒤에 시 험 문제들을 확인했다.
용병 상식에 대한 문답과 특기 확인,대화하는 동안의 인성 확인 작업.
자신은 나이가 어리다는 단점이 있으니 더욱 꼼꼼하게 준비해야 했다.
"오,제시카가 추천한 신입이야?
그럼 뭘 시험 봐,그냥 합격시키 면 되지."
역시,사람을 잘 골랐다.
덥수룩한 구렛나루를 기른 호탕 하게 생긴 중년 남자가 제이크는 보지도 않고 종이에 합격 도장을 찍으려 했다.
"알렌 씨! 그래도 시험은 제대로 봐야죠. 더구나 제시카 씨 사정도 있고,시험 볼 사람이 너무 나이 가 어려요."
"엥? 20살이라고 적혀 있는데." 그는 그제야 고개를 들어 제이크 를 바라보았다.
"나이를 너무 올려 적었잖아. 16 살, 아니,많아 봐야 18살 정도겠 네."
실제로 나이를 올려 적긴 했지만,한 달 정도의 고생으로는 파 릇파릇한 수습 서기관 때 모습을 숨길 수 없었다.
다른 사람보다 훨씬 어려 보이는 바람에 나이 올리기는 대실패였다.
"제시카 일이라…… 흠."
그는 조금 안타까운 얼굴로 제시카를 바라보았다.
하지만 곧 그는 어깨를 으쏙했
다.
"뭐,제대로 시험을 보면 되지 뭐."
"제가 그걸 바란 거예요."
꽤 얌체 같은 말을 하는 여직원 이었다.
자신은 길드의 규칙을 제대로 수 행하고 있다는 오로라를 마구 풍 기고 있었지만,제이크에게는 트 집을 잡는 것 같이 보이기만 했다.
'여자들 사이는 알기 어려워.' 제이크가 속으로 고개를 젓는 사 이에,알렌은 사람들을 데리고 길
드 사무소의 뒤뜰로 향했다.
그곳은 마치 야외 훈련장처럼 보 였다.
무기와 방어구들이 한쪽에 놓여 있었고,단단히 다져놓은 연병장 과 한쪽에 세워진 집단들,그리고 멀리 사람 모양의 과녁이 세워져 있었다.
알렌은 직원과 제시카를 한쪽에 서 있으라고 한 다음,제이크를 데리고 훈련소 중앙으로 걸어갔다.
"우선 상식을 확인해 보자. 의뢰 에 실패했을 때는 어떻게 해야 하
지?"
제시카를 멀리 떼어 놓은 뒤,그 는 제이크에게 여러 가지 질문을 던졌다.
의뢰에 실패했을 때 어떻게 하는 지,중복 의뢰 시의 처신,의뢰인 과의 분쟁은 어떻게 대처해야 하 는지.
당연하게도 그의 질문들은 전부 제이크가 아는 질문들이었다.
제이크는 질문이 나오는 족족 대 답을 했고,알렌은 질문을 하다 말고 손을 들어 제이크의 대답을 막았다.
"제대로 배운 놈이잖아? 더 물어 볼 필요도 없겠는걸. 근데 배운 놈이 왜 용병을 하겠다고 나선 거 냐? 아니,이런 건 물어볼 필요 없겠지."
혼자 묻고 답한 그는 바로 다음 시험으로 넘어갔다.
"검을 골라 봐. 어,넌 단검이 냐? 뭐,제시카한테 배웠다면 당 연하겠지."
제이크가 품에서 단검을 꺼내자, 그는 옆구리에 찬 칼을 꺼내 제이크에게 휘둘렀다.
그렇게 몇 번 검을 휘두른 그는
고개를 젓고 말았다.
"완전 초보네. 제시카한테 배운 게 맞아? 기본은 있지만,너무 배 운 기간이 짧은데?"
제이크는 알렌이 휘두른 첫 번째 검만 막을 수 있었다.
알렌이 두 번째 휘두른 검에 바 닥에 나뒹굴고 만 제이크는 아쉬 운 표정으로 몸을 일으켰다.
한 달 동안 제시카에게 단검을 배우기는 했지만,장검이 아니라 고 갑자기 없던 재능이 생길 리가 없었다.
나름 열심히 했지만, 처음 검을
막은 게 한계였다.
"쇠뇌도 이 정도면 나도 통과시 켜 주기 힘든데……. 흠,제시카가 생각 없이 시험을 치게 했을 리도 없고. 뭐,마저 확인해 보자고."
그는 한쪽에 놓은 쇠뇌를 가져와 제이크에게 건네주고,멀리 서 있 는 표적을 가리켰다.
"한 200걸음(100미터) 정도 될 거야. 화살 20발 줄 테니까 쏴 봐."
사람 형태로 서 있는 표적은 거 리 때문인지 무척이나 작아 보였다.
"뭐,대충 반 정도 맞으면 합격 으로 해 줄 테니 잘해 봐."
확실히 낮은 커트라인에 제이크 는 편한 마음으로 시위를 걸 수 있었다.
그는 쇠뇌를 들어 표적의 머리 위쪽을 겨냥했다. 그러고는 숨을 멈추고 발사했다.
슈악!
화살은 바람을 가르며 날아가 표 적의 다리 쪽에 맞았다. 예상보다 영점이 많이 틀어져 있었다.
"오,맞았네."
알렌이 고개를 끄덕였고,제이크
는 다음 시위를 걸어 다시 한 번 표적을 향해 쏘았다.
푹!
이번에는 정확하게 왼쪽 심장에 명중.
휘익.
알렌이 작게 휘파람을 불었고. 제이크는 점차 빠르게 화살을 쏘 았다.
계속 쏘는 동안에도 표적에서 피 어오르는 먼지는 왼쪽 가슴을 벗 어나지 않았다.
순식간에 모든 화살을 쏘아 낸 제이크는 알렌을 돌아보았다.
"껍,신입이 아니잖아. 넌 용병이 아니라 군인,아니,우리 영지 레 인저에 시험을 보는 편이 더 좋을 것 같은데? 설마 말을 못 타서 용병 시험 본 거냐?"
이유야 설명할 필요가 없으니 제이크는 어깨를 으쏙일 뿐이었고, 멀리서 상황을 지켜보던 제시카는 어깨를 한껏 치켜세웠다.
여직원이 제시카의 이야기를 용 병들에게 퍼트린 이후,두 사람은 비공식적으로 적이 되어 있었다.
나름 불만이 많았던 제시카는 그 동안 쌓인 스트레스가 이제야 조
금 풀린 것 같았다.
실력을 보인 제이크는 당연하게 루테리아의 용병으로 등록되었다.
"3번 임무까지는 수습 용병이에요. 그동안은 추천자인 제시카 씨 가 '보증인'이 되시는 거예요."
"호,호. 그건 당연한 거죠."
용병패를 받으면서도 날카로운 공방이 오고 갔지만,'규칙을 중 요시하는' 직원답게 일은 깔끔하 게 처리되었다.
'제이'라는 이름이 새겨진 용병패 를 보자,제이크는 조금 신기한 느낌이 들었다.
두 달 전만 해도 서기관으로 평 생을 살 것으로 생각한 그였다.
서기관으로 사는 인생이 그리 좋 게 끝난 것은 아니었지만,이런 식으로 인생이 뒤바뀔 줄은 그때 는 알 수 없었다.
하지만 황도를 떠나고,용병이 된 이 모든 일은 제이크 본인이 결정한 일.
여태까지의 일도,그리고 앞으로 벌일 일도 절대 후회하지는 않겠 다고 다시 한번 다짐했다.
"그럼,제국에서 손님이 오는 것 을 기다리는 일만 남았나?"
용병이 된 제이크는 제시카와 함 께 길드 사무소를 나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