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화
대수림.
제국의 동쪽에 자리 잡은 거대한 산맥을 지칭하는 말로,북으로는 얼어붙은 극지방에서 남쪽으로는 열사의 사막과 이어진 산맥이었
다.
험난한 지형과 끝없는 숲은 자연 그대로를 넘어 신비한 분위기를 만들어 내는 곳이었다.
거기다 산맥에서 뿜어져 나오는 강렬한 마나는 수많은 몬스터와 마물을 만들어 내 사람들의 침입 을 막아섰다.
대수림 너머 이종족들이 사는 세 상이 있다는 이야기들이 들려오 고,가끔 대수림에 나타나는 이종 족들도 있었지만,철벽같은 대수 림은 제국인들을 대수림 너머로 보내지 않았다.
대수림을 헤매는 모험가 중에는 대수림을 넘어,이종족이 사는 땅 을 찾고자 하는 사람도 있었다.
하지만 아직 그 꿈을 이뤘다는 사람은 들리지 않았다.
"겨우 코앞 던전을 가는데도 이 렇게 허덕이는데 대수림을 넘는 건 무리지."
출발한 지 몇 시간 뒤,제시카가 제이크에게 대수림에 대해 설명하 는 중이었다.
일행은 이제 막 대수림으로 불리 는 중앙 산맥에 진입하고 있었다.
대장벽을 나온 뒤 한참 동안 완 만한 벌판을 지나간 일행은 울창 한 숲으로 들어섰다.
숲에 들어선 일행은 출발 전에 이야기한 대로 진형을 변경했다.
앞에는 길잡이 용병들이 길을 인 도했고,그 뒤에는 기사들과 병사 들이 따라갔다.
병사들 뒤에는 마법사인 앰버와 레인저가 따라 움직였다.
그 뒤에는 짐을 가득 멘 일꾼들 이 걸어갔다.
그리고 맨 뒤에 길잡이들을 제외 한 용병들이 따라가고 있었다.
중앙의 마법사를 전방과 후방에 서 지키는 진영이었지만,실제로 는 관리가 안 되는 용병들을 뒤로 보냈을 뿐이었다.
죽기 싫으면 후방의 적들을 물리 치라는 의미였지만,그것은 기사 들에게 치이기 싫었던 용병들에게 도 좋은 배치였다.
"지금부터 슬슬 주의해야 해. 아 직 초입이기는 해도 마물들이나 몬스터들이 등장하지 않는 것은 아니니까."
제시카의 말에 용병들이 피식 웃 고 말았다.
"완전 애엄마인데?"
"시끄러워요. 댁들은 뭐 애송일 때가 없었어?"
"그래도 누가 옆에서 밥숟가락으 로 먹여 주는 사람은 없었지."
이곳에 있는 사람들은 용병대나 제대로 된 파티에 소속된 사람들 이 아니었다.
시기와 질투가 있을 수밖에 없었다.
거기에 신입에 대한 텃세까지 섞 이니,놀림이 더 심해졌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였다.
"이제 슬슬 멈추죠? 던전 안에서
의 일도 생각해야죠."
말이 심해지자 제시카가 눈을 가 늘게 치켜떴다.
그녀의 분위기가 변하자,신나게 놀려 대던 용병들이 입을 닫았다.
이 탐사대에는 제시카 말고도 다 른 도적이 있기는 했지만,제시카 라는 이름은 가벼운 것이 아니었다.
오죽했으면 용병대에서나 실력 있는 파티에서 그녀를 데려가려고 했을까.
괜히 눈 밖에 나서 던전 안에서 그녀에게 외면당하기라도 한다면
목숨이 위험하게 될지도 모를 일 이었다.
용병들을 조용히 시킨 그녀는 제이크를 돌아보았고,또다시 한숨 을 내쉬고 말았다.
제이크는 험악한 주변은 신경 쓰 지도 않고 마치 관광을 하듯이 주 변을 둘러보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좀 긴장하라고 했잖아."
너무 편해 보이는 모습에 퉁명스 립게 말이 나왔지만,제이크는 손 에 든 쇠뇌를 흔들어 보이며 담담 히 대답할 뿐이었다.
"그래서 주위를 둘러보고 있었습 니다. 그보다 조용해졌으니 계속 설명해 주세요."
화낼 기운마저 사라진 그녀는 다 시 입을 열 수밖에 없었다.
제이크가 여유로워 보였던 것은 실제로 여유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대수림에는 처음 와 보기는 했지만,몬스터를 상대해 본 경험이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
더구나 몬스터와 마물보다 몇 십 배 공포스러운 괴물들에게 쫓겼던 그로서는 낯선 대수림이라고 해도
별로 긴장이 느껴지지 않았다.
'공포를 느끼는 감각이 좀 망가 졌을지도.'
덕분에 위기 상황에서도 침착하 게 행동해서 여기까지 올 수 있었다는 생각이 들기는 했다.
그래도 뭔가 거세된 것 같은 느 낌은 좋게 느껴지지 않았다.
"우리가 가려는 곳은 루테리아 시에서 동북쪽으로 8만 걸음 떨어 진 곳에 있는 마른 나무의 골짜기 야. 대수림 전체로 보면 그리 먼 곳은 아니지만,원정길로 보면 꽤 깊은 곳이야."
제이크가 찾는 던전,그리고 기 사들이 찾는 던전은 모두 루테리아 시에서 40킬로미터 떨어진 골 짜기에 있었다.
제국 내라면 이틀 이상 걸리지 않을 거리였지만, 대수림에서는 몇 배는 걸릴 거리였다.
하지만 제국과 붙어있는 대수림 에서 40킬로미터 정도면 사람의 손길이 거치지 않았다고는 볼 수 없었다.
루테리아 시가 만들어진 지는 몇 세대가 되지 않았지만,그래도 충 분히 오랜 시간이 흘렀다.
그동안 수많은 용병과 사람들이 죽음을 무릅쓰고 대수림을 뒤졌기 에 영지와 가까운 대수림은 모두 어느 정도 파악된 상황이었다.
"하지만 던전이라는 것이 대부분 지하에 있으니 아무리 가까워도 건초 더미에서 바늘 찾기지. 더구 나 마른 나무 골짜기는 마나가 적 은 지역이라서 사람들이 별로 찾 아보지를 않았어. 지금도 그런 곳 에 던전이 있는 게 잘 이해가 안 돼."
주변 사람들에게는 일행이 찾아 가는 던전에 대한 이야기 같았지
만,실제로 그녀의 말은 두 사람 이 가려는 던전에 대한 이야기였다.
그녀는 제국에서 기사들이 찾아 오기 전까지 제이크가 가고자 하 는 던전이 실제로 존재하는지 의 심했던 적이 있을 정도였다.
넌지시 흘리는 질문을 무시한 제이크가 오히려 그녀에게 질문을 던졌다.
"그런데 마도사급 마법사라면 날 아서 갈 수 있지 않나요?"
"대마도사급 마도사라도 여러 명 을 데리고 하늘을 나는 건 불가능
하잖아. 더구나 대수림에는 하늘 을 나는 비행 몬스터도 꽤 많아. 비행 마법으로 하늘을 날다가 몬 스터를 만나게 되면 끝장일걸?"
실제로 하늘을 날아 대수림을 넘 어 보려는 마법사도 있었던 모양 이었다.
다만 대수림으로 떠난 그는 다시 는 돌아오지 못해,쓸모없는 짓이 었음을 증명했을 뿐이었다.
"모두 주의! 몬스터들이 접근한 다!"
그때,일행 중앙에 있던 레인저 가 크게 소리쳤다.
마나를 느끼는 자는 다른 마나를 느낄 수 있었다.
물론 상대가 일부러 숨기면 알아 챌 수 없었지만,지금 접근하는 몬스터들은 그런 고급 기술을 갖 춘 몬스터들이 아니었다.
"오,같이 온 레인저가 부대장급 이었나 봐."
무기를 꺼내 들며 용병들이 기쁜 표정을 지었다.
일행에 강한 자가 포함된 것은 언제나 즐거운 일이었다.
더구나 부대장급 레인저라니,인 간들만 상대하던 기사들과는 달리
레인저는 대수림의 전문가들이었다.
"그건 그렇고 이번에는 꽤 초반 에 만났는걸? 일진이 안 좋은 편 인가."
"대수림에 초반이 어디 있어. 쓸 어버린 지 하루만 지나도 원상 복 귀되는 곳인데."
제국이 대수림을 정복하지 못하 는 이유는 험난한 산지가 아니라 몬스터들의 끝없는 물량 때문이었다.
마나의 영향이라고 하지만,아무 리 대군을 밀어 넣어도 하루도 되
지 않아 다시 나타나는 몬스터 때 문에 부대는 전후방이 따로 없는 전투로 붕괴하기 일쑤였다.
다행히 몬스터들 간의 영역이 있어서인지 평상시에는 일정 수 이 상 몬스터가 늘지 않았다.
그리고 그 덕분에 이렇게 탐사대 가 움직일 수 있는 것이었다.
"쳇,하필 날도마뱀이냐. 모두 쇠 뇌 들어!"
눈이 좋은 용병이 숲 사이를 노 려보다가 크게 소리쳤다.
용병들은 혀를 차고는 활과 쇠뇌 를 꺼내 들었다.
이미 쇠뇌를 들고 있었던 제이크 는 시위를 당겼고,제시카는 투덜 거리면서 단검 대신 쇠뇌를 잡았다.
"끙,쇠뇌는 영 적성에 안 맞는 데……"
잠시 뒤,일행 모두는 나무 사이 를 뛰어넘으며 다가오는 어린아이 크기의 도마뱀들을 발견했다.
앞뒤 다리 사이의 피막을 이용해 나무 사이를 이동하는 도마뱀 몬 스터였다.
일꾼들은 급하게 짐을 내려놓고 짐 뒤로 몸을 피했고, 용병들은
넓게 퍼져 숲을 향해 무기를 겨누 었다.
아직 거리가 멀어 몬스터들이 다 가오기를 기다리던 순간.
숙!
화살 하나가 용병들 사이로 날아 갔다.
"누구야! 벌써 쏘는 놈이!"
아직 사격 거리가 아니었다. 덕 분에 놀란 용병 하나가 뒤를 향해 화를 냈다.
하지만 그는 침착한 제이크의 모 습에 인상을 찌푸렸다.
"제시카! 뭐 하고 있어! 신입이
날뛰지 못하게 막지 않고!"
옳다구나 시비를 걸었던 그였지만,바로 눈앞을 지나가는 화살에 딱딱하게 굳고 말았다.
어느새 시위를 건 제이크가 두 번째 화살을 쏜 것이다.
"자기 할 일이나 해요. 제이는 잘만 하고 있어요."
더불어 비웃는 듯한 제시카의 말 에 그는 전방으로 고개를 돌렸다.
자신의 앞을 지나갔던 화살은 멀 리 윤곽만 보이는 날도마뱀 몸에 틀어박히고 있었다.
거기다 바닥에 처박힌 또 다른
날도마뱀은 먼저 쓴 화살에 맞은 놈이 분명했다.
'젠장! 그냥 신입이 아니란 이야 기잖아!'
하기야 4급 용병이 키우는 신입 이 생초보일 리가 없었다.
재능도,지원도 차이가 나는 현 실에 속으로 눈물을 흘리던 용병 은 입을 다물고는 달려오는 몬스 터를 향해 화살을 쏘았다.
그러나 화살은 빈 허공을 가로질 렸고 그는 주변 용병들의 비웃음 을 받고 말았다.
"나처럼 실력 안 되는 사람들은
더 다가오기를 기다려요!"
어느새 제시카가 주도권을 잡고 사람들에게 소리치고 있었다.
용병이란 어디까지나 실력이 제 일이었다.
데리고 다니는 신입도 한몫 이상 을 하자,용병들은 제시카의 말에 따르기 시작했다.
일행의 후방은 용병들이 담당했다면, 일행의 전방은 기사와 병사 들 담당이었다.
병사들은 방패와 창을 들어 일행 을 보호하는 원형진을 만들었고, 세 기사는 숲을 향해 쏘아졌다.
마나를 가득 끌어 올린 인간의 몸은 현실에서 불가능한 속도와 움직임을 가능하게 했다.
가죽 갑옷을 입어 더욱 가벼워진 그들은 순식간에 나무 위로 솟구 쳐 날도마뱀을 베어 내기 시작했다.
"저게 무슨 삽질이래."
무척이나 멋진 모습이었지만,제시카의 입에서는 험담이 쏟아졌다.
"이제 시작인데 벌써 힘 빼고 있어."
확실히 숲으로 뛰어나간 기사들
과 달리,레인져들은 마법사 옆에 서 쇠뇌를 들고 주변을 지킬 뿐이 었다.
조금의 시간이 지나고,날도마뱀 들이 가까이 다가오자 용병들이 들고 있던 활과 쇠뇌를 쏘기 시작 했다.
슈슈숙!
빠르게 날아가는 화살들은 나무 사이를 뛰어다니는 날도마뱀들을 떨구기 시작했다.
화살을 피해 다가왔던 날도마뱀 들은 대기하던 레인저들의 화살에 터져 나가고 말았다.
마나를 실은 화살은 일반 화살과 파괴력이 달랐다.
일행을 공격했던 날도마뱀들은 금방 전멸하고 말았다.
"쯧,공중을 뛰어다니는 놈들이 라 화살 소모가 심하단 말이야. 뒤진다고 해도 몇 개나 찾을 수 있을까 몰라."
더는 살아 있는 날도마뱀이 보이 지 않자, 용병들은 단검을 들고 주변을 뒤지기 시작했다.
죽은 날도마뱀들을 뒤지고,떨어 진 화살을 찾기 위해서였다.
"어이,남의 것 뺏을 생각하지
마."
"이제 시작인데 그럴 놈이 있으 려고, 더구나 마석도 잘 안 나오 는 놈들인데."
사체에 박힌 화살 등으로 소유권 을 결정하는 용병들로서는 몬스터 와 싸울 때보다 싸우고 난 뒤가 훨씬 살벌했다.
이번처럼 화살 한 방에 죽는 몬 스터가 아니라 여러 명이 달려들 어 싸워야 할 때는,마석을 노리 고 칼부림이 일어나는 경우도 종 종 있었다.
사방으로 흩어지는 용병들을 향
해 제시카가 소리쳤다.
"아직 초입이에요. 마석도 나오 지 않을 텐데 모두 모여요."
조금 전까지는 그녀의 말을 잘 들었던 용병들이었지만,싸움이 끝난 지금은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그러는 동안,숲을 들어갔던 기 사들이 의기양양한 표정으로 돌아 왔다.
물론,저들이 잡은 몬스터도 많 긴 했지만,저렇게 생고생할 이유 가 전혀 없는 몬스터였다.
하지만 그들에게 진실을 말할 사
람은 이 일행 중에 없었다.
한편,돌아온 기사들은 용병들을 보고 인상을 찌푸렸다.
벌써 진형을 갖추고 있는 병사들 과 달리,용병들은 사방에 흩어진 채로 출발할 생각을 전혀 하지 않 고 있었던 것이다.
"콩가루야, 콩가루. 이러니 제대 로 된 용병들이 도망가 버리지."
그나마 멀쩡했던 마법사와 레인 저들도 상황을 외면해 버리는 모 습에,제시카는 다시 한 번 한숨 을 내쉬었다.
아무래도 던전 탐사가 예상보다
험난할 것 같았다.
제이크는 한숨을 쉬는 제시카에 게 샌드위치를 건넸다.
제니가 싸 준 행운의 간식.
혹시 먹으면 행운이 따라올지도 몰랐다.
그렇게 제이크와 제시카는 날도 마뱀 몬스터가 널려 있는 대수림 초입에서 첫 식사를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