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 화
식량 창고에서 시작된 붕괴는 통 로를 거의 다 잡아먹고서야 끝이 났다.
두 사람은 통로를 빠져나와서야 한숨을 돌릴 수 있었다.
바닥에 주저앉아 제시카는 제이크를 한참 동안 놀려 댔다.
대단한 마법을 쓰는 바람에 느껴 졌던 거리가 제이크의 실수로 다 날아가 버린 것이다.
"풋내기야,풋내기. 대단한 마법 을 가지면 뭐 해,풋내기인데. 흥, 흥."
콧김까지 내뿜으며 훙얼거리는 말에 제이크는 고개를 흔들 뿐이 었다. 변명하기에는 실수가 너무 컸다.
"이제는 괜찮은 거겠지? 진동도 없고,소리도 안 들리고."
"네,괜찮을 겁니다."
"조금 전에도 그 소리를 했던 것 으로 기억하지만…… 뭐,그럼 이 제 나가는 일만 남았나?"
"이대로 위로 올라가다가 탐사대 와 마주치면 곤란하니,우리가 왔 던 마법사의 던전으로 돌아가면 됩니다."
"설마,그 물속을 헤엄쳐서 나가 는 건 아니겠지?"
"그 설마가 맞아요. 다른 길은 없으니까요."
제이크의 말에 제시카가 울상이 되어 버렸지만,정말 그 방법밖에
는 나갈 방법이 없었다.
다른 입구는 단 하나,땅굴 전갈 이 만들어 놓은 동굴이 있었지만, 그곳은 이제 땅속에 파묻혀 버렸다.
제이크는 마지막으로 무너진 통 로를 바라본 뒤에 몸을 돌렸다.
1년간의 감정과 복수는 이제 이 곳에서 마무리되었다.
원하는 목표를 이루었으니 이제 다음 단계로 나아가야 할 때였다.
"그 전에 잠깐 들를 데가 있어요."
"아니,또 어딜 들러."
거대 던전을 빠져나가기 전에 제이크는 다시 방향을 틀었다.
뒤에서 제시카가 구시렁거리면서 그 뒤를 따라갔다.
그런 제시카의 투덜거림은 창고 안에 도착하면서 쏙 들어갔다.
그저 황홀한 얼굴로 눈앞의 광경 을 홀린 듯이 바라볼 뿐이었다.
"이 연구소의 마법 아이템 창고 예요. 여기까지 왔는데 맨손으로 나갈 수는 없잖아요. 다 들고 나 갈 수 없으니 하나씩만 챙기죠."
"까악! 이 귀여운 녀석!"
제시카는 제이크를 격하게 껴안
고는 바로 보물찾기에 돌입했다.
"흐흐,어느 놈이 돈이 되려나." 은은한 빛을 흘리는 브로치와 화 려한 세공을 한 지팡이 등 다양한 마법 아이템이 그녀의 눈을 홀렸다.
"돈이 되는 것보다 직접 쓸 만한 것으로 챙겨요."
"엥? 마나 사용자가 아니라서 어 차피 쓰지도 못하는데?"
"말씀드렸잖아요,마나 사용자로 만들어 드린다고."
제이크는 자신의 앞에 있는 검에 손을 올렸다.
바로 푸르게 빛나는 검.
"그리고 마나 사용자가 아니더라 도 어느 정도 쓸 수 있어요. 나가 자마자 요령을 알려 드릴 테니 우 선 마음에 드는 것으로 고르세요. 어떤 마법이 걸려 있는지는 제가 알려 드릴게요."
제이크의 말에 제시카가 지그시 그를 바라보았다.
"약속한 거다. 너만 믿을 거야."
"네,믿으세요."
제이크는 마법 아이템에 걸린 마 법을 하나하나 그녀에게 설명했다.
물론 그라고 모든 마법을 알 수 있는 것은 아니었지만,그에게는 파티마라는 좋은 내레이터가 있었다.
제시카가 브로치를 집어 들자.
-그 브로치는 냉기 마법이 새겨 져 있네요. 두꺼운 정복을 입을 때 많이 쓰는 물건이에요.
혹은 제이크가 검을 살펴보고 있 으면.
-그 검은 라이트 마법이네요. 밤 에 횃불 대신 쓰면 좋을 것 같아요.
땅굴 전갈 때문인지 파티마는 착
실하게 마법 아이템을 설명해 주 었다.
잠시 후.
제시카는 마법 아이템 중에 가죽 으로 만들어져 있던 부츠 한 쌍을 골랐다.
복제 세상에서도 그녀가 쓰던 아 이템이라,제이크는 묘한 미소를 지었다.
"설마 오래됐다고 금방 구멍 뚫 리는 건 아니겠지?"
"보존 마법이 걸려 있어서 쇠로 만든 것들보다 내구성이 좋을 거
예요."
다행히 치수도 딱 맞아,제시카 는 만족한 얼굴로 부츠를 신을 수 있었다.
"세상에,내가 마법 아이템을 직 접 쓰다니,이건 생각도 못한 일 인데."
이리저리 발을 굴러가며 신기해 하는 제시카를 보며 제이크도 반 지 몇 개를 챙겨 넣었다.
앰버에게 이야기를 들은 만큼 전 부 챙길 수는 없었지만,그래도 이 정도는 괜찮을 듯했다.
아직 마법 아이템을 만들 실력이
되지 않았기에,부족한 부분은 마 법 아이템으로 채울 생각이었다.
"자,가죠. 이제 더 들릴 곳은 없어요."
"저기,좀 더 보다가 가면 안 돼?"
"안 돼요. 탐사대가 나오기 전에 돌아가야 해요."
처음에는 따로 돌아갈 생각도 했 지만, 탐사대와 같이 돌아갈 수 있는데 힘들게 따로 움직일 이유 가 없었다.
"이런 아름다운 광경을 또 볼 수 있을까?"
제이크의 손에 끌려 나오면서 제시카가 안타깝게 마법 아이템들을 바라보았다.
'또 볼 수 있어요. 제가 보게 해 드리죠.'
마지막으로 제이크가 마음속으로 대답한 뒤에,두 사람은 거대 던 전을 빠져나갔다.
두 사람은 마법진이 그려진 지하 광장을 지나 그들이 들어왔던 웅 덩이로 돌아왔다.
"설마 이 무거운 배낭을 메고 헤 엄치자는 이야기는 아니겠지요, 마법사님?"
그녀의 말에 피식 웃은 제이크는 챙겨 넣었던 반지 중 하나를 제시카의 손가락에 끼워 주었다.
"에엑,분위기가 이상해!"
제시카는 묘하게 붉어진 얼굴을 손으로 부채질하는 사이,제이크 는 마나를 인식하는 요령을 설명 했다.
"……이렇게 하시면,마나 사용 자가 아니더라도 마법 아이템을 쓰실 수 있을 거예요."
"그게 그렇게 쉽게 되는 거야?"
"뭐,편법이라 집중을 계속 유지 하고 있어야 해서 그리 효용은 없
지만요. 급할 때는 쓸 만해요." 제시카가 끼고 있는 반지는 푸른 빛이 껌벅거리는 중이었다.
"그리고 말하지 말고 집중하세요. 제가 앞장설 테니 잘 따라오 시면 돼요."
마법사의 방에서 꺼낸 보물 상자 는 이미 물속에 던져 버린 뒤였다.
당연히 안에 있던 물건들은 제이크와 제시카의 배낭에 음식 대신 들어가 있었다.
제이크는 제시카의 손을 잡고 웅 덩이를 향해 걸어갔다.
그리고 두 사람은 물속으로 모습 을 감추었다.
한 시간 뒤.
두 사람은 계곡 아래 강변에 누 워 헐떡이는 중이었다.
신기하게도 물은 전혀 묻지 않은 두 사람이었지만,둘 다 무척이나 지친 모습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두 사람은 급류 가 휘몰아치는 계곡 바닥을 통해 이곳까지 걸어왔던 것이다.
마법 반지와 제이크의 마법으로 물이 침범하지 못하는 공기막을
형성한 뒤에 강바닥을 걸어서 이 곳까지 온 두 사람이었다.
걷는 것 자체는 무척이나 쉬운 일이었다.
하지만 마법 반지의 마나를 유지 해야 했던 제시카와 공기막이 물 에 떠내려가지 않게 해야 했던 제이크는 물속을 걷는 동안 진을 다 쏟아야 했다.
"헉,헉,다른 방법이 없었어? 뭔가 마법들이 다 애매하게 고생 스러워!"
제시카의 푸념에 제이크는 머리 를 긁적였다.
이제 1년밖에 안 된 마법사였다. 고대 마법사라 다양하고 창조적 인 마법이 가능하기는 했지만,절 대적인 위력은 오랜 기간 훈련한 마법사들에게 미치지 못했다.
-그래도 이렇게 빨리 성장하는 마법사는 처음이에요. 원래 마법 기술자보다 성장이 느린 게 마법 사인데…… 주인님은 훨씬 빠르다 니까요.
제시카의 말에 파티마가 반박했 지만,제이크는 그녀의 말을 전해 주지 않았다.
제이크는 파티마가 자신을 '주인
님'이라고 부른 것에 조금 놀랐다.
드디어 파티마자 자신을 에고 완 드의 소유자로 여기게 된 것이다.
동기화가 되었으니 언젠가는 소 유자로 받아들여지는 것이 당연하 겠지만,복제 세상 때보다 훨씬 빠른 수긍이었다.
나름 마법사로 인정받았다는 생 각에 제이크의 얼굴에 슬쩍 미소 가 떠올랐다.
체력을 회복한 두 사람은 묵직한 배낭을 멘 채로 계곡을 크게 돌아 야영지로 돌아왔다.
오랜 시간이 지난 것 같았지만, 두 사람이 탐사대를 떠나 있던 시 간은 3일밖에 안 되었다.
다행히 아직 던전에 들어간 탐사 대가 돌아오지 않았다.
두 사람은 야영지에 있던 사람들 에게 계곡 물에 휘말려 버려서 낙 오했다는 말로 3일간의 공백을 설 명했다.
물론,별로 믿는 것 같지는 않았 지만,사람들은 크게 추궁을 하지 않았다.
야영지에 남아 있던 다른 사람들 도 그동안 사방을 들쑤시고 다녔
기 때문이었다.
거대 던전이 발견되었으니,혹시 모를 다른 입구나 흘린 보물이 없 을까 싶어 남은 사람들이 찾아다 닌 것이다.
물론 찾은 사람은 아무도 없었지만,두 사람도 같은 생각으로 움 직였을 것이라고 사람들은 지레짐 작했다.
다만,야영지에 있던 병사는 기 사에게 보고할 거라고 겁을 주었다.
하지만 그걸로 겁먹을 두 사람이 아니었다.
그렇게 두 사람이 사람들의 비웃 음을 받으며 야영지에 복귀한 다 음날,던전에 들어갔던 탐사대가 돌아왔다.
던전 입구를 빠져나오는 탐사대 의 모습은 패잔병 그 자체였다.
빛을 보지 못해 핼쑥한 얼굴에, 온통 엉망인 된 옷과 장비들.
그리고 기사들과 다른 사람들은 서로 얼굴도 마주치지 않으려 했다.
"그럼,오늘은 다들 휴식을 취하 도록. 다음 일정은 내일 이야기하 지."
기사들이 병사들을 이끌고 야영 지 한쪽으로 이동하자,레인저 중 한 명이 한숨을 쉬고 용병들을 해 산시 켰다.
아직 해가 남아 있는 오후였지만,던전을 빠져나온 용병들은 서 둘러서 저녁을 먹기 시작했다.
혹시나 이야기를 들을 수 없을까 기다렸던 제이크와 제시카도 어쩔 수 없이 저녁을 준비했다.
그렇게 이른 저녁 식사가 끝난 뒤,두 사람에게 앰버가 다가왔다.
"혹시 남은 홍차 없나요?"
몹시나 피곤해 보이는 앰버의 모
습에 제이크는 마지막 남은 홍차 를 꺼냈다.
"아,살 것 같다. 다른 것보다 정 말 차 한 잔이 간절했어요."
홍차를 한 모금 마신 뒤에야 앰 버의 표정이 부드럽게 풀렸다.
"두 분도 안에서 일어난 일이 궁 금하실 테니 홍차를 얻어 마신 값 으로 이야기해 드릴게요."
앰버의 생각과는 조금 다른 이유 였지만,두 사람은 그녀 말대로 던전 안에서 일어난 일이 궁금했다.
"처음에는 그리 어렵지 않게 던
전을 내려갔어요……"
기사와 레인저,마법사까지 있는 탐사대였기에 던전 탐사는 쉽게 진행되었다.
하지만 쉽게 진행되던 탐사는 오 래지 않아 문제가 생겼다.
"탐사대를 이끌던 도적 용병의 실력이 좋지를 못해 길을 잘 찾지 못한 게 문제였어요. 때문에 탐사 대는 저층에서 한참을 헤매게 되 었고,기사들도 무척이나 화가 났 죠."
그녀의 말에 제시카는 자기가 같 이 갔어야 했다고 혀를 찼다.
그렇지만 사정을 아는 제이크는 속으로 쓴웃음을 지을 수밖에 없었다.
그는 복제된 세상 속에서 앰버에 게 속사정을 모두 들었다.
제국 황실과 루테리아 영지의 갈 등,그리고 도적을 포섭해서 탐사 대를 빙빙 돌린 그녀와 레인저들 의 이야기까지.
프라이버시였기에 제시카에게 말 해 주지 않았지만,옆에서 두 여 성의 모습을 보자니 무척이나 재 미난 광경이었다.
그렇게 던전을 헤매던 탐사대는
어느 순간 늘어난 땅굴 전갈들과 조우하게 됐다.
땅굴 전갈들과 싸우며 전진하던 그들은 갑작스러운 지진에 던전을 빠져나오게 된 것이었다.
"갑작스러운 몬스터 증가도 문제 지만 지진은 정말 예상치 못했어요. 던전 어딘가가 무너지는 듯 한 소리와 진동이라 모두 급하게 빠져나온 거예요."
앰버의 설명에 제이크와 제시카 가 서로 마주 보았다.
그녀가 말한 두 사건 모두 두 사 람과 관련이 있는 이야기였다.
"그래서 우선 소수 인원으로 빠 르게 주파해 볼 생각이에요. 지친 기사나 병사들은 이곳에서 쉬게 하고,저와 레인저분들만으로 움 직여 볼까 해요. 그때 제시카 씨 도 같이 가 주시면 안 될까요?"
역시 그녀는 단지 홍차가 마시고 싶어서 온 것이 아니었다.
앰버의 말에 제시카는 제이크를 돌아보았고,그런 제시카와 제이크의 모습을 앰버는 묘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우리 쪽 볼일이 끝났으니 저쪽 일도 일찍 끝내게 해 주죠.
제이크의 메시지 마법을 들은 제시카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하죠. 제이하고 저,둘이 길잡이를 할게요."
제이크도 같이한다는 말에 살짝 고개를 갸우뚱한 앰버였지만 곧 미소를 지으며 감사를 표했다.
하지만 그녀와 레인저들의 속셈 을 빤히 알고 있던 제이크는 아무 것도 모르는 표정으로 고개를 갸 웃거렸다.
"보수는 나중에 이야기하는 건가요?"
가방 가득한 보물에,마법 아이
템까지 빼돌린 상황에서 보수를 논하는 제이크의 모습에 제시카는 입을 딱 벌렸다.
그런 제시카를 놔두고,앰버와 제이크는 바로 협상에 돌입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