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3 화
"와,이런 무거운 방패를 그렇게 자유자재로 사용할 수 있다니 정 말 대단하네요."
제이크는 한참 엣된 얼굴을 한 소년 앞에서 그를 칭찬하는 중이
었다.
제이크의 말에 덩치 큰 소년이 난감한 표정으로 머리를 긁적였다.
그 모습을 본 제시카는 황당한 표정을 지었다.
제이크가 남을 저렇게 대놓고 칭 찬하는 것을 처음 보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제이크는 뻔뻔한 얼굴로 계속 말을 이어 갔다.
"혹시 마나 사용자 아니세요? 나 이는 어리시지만,기사처럼 보이 시는데요?"
작게 속삭인 제이크의 말에 소년 은 급하게 고개를 저었다.
"아,아닙니다. 마나를 느끼긴 했 지만,마나를 외부로 발산할 수 없는 반쪽입니다. 그런 이야기를 함부로 하시면 큰일 나요."
물론,함부로 이야기하면 큰일 난다는 것을 알기에 작게 속삭인 것이었지만,역시 제이크의 예상 대로 소년은 이미 마나를 느낀 뒤 였다.
그도 그럴 것이,소년은 조금 전 전투에서 다른 방패보다 몇 배는 무거워 보이는 철제 방패를 한 손
으로 마구 휘둘렀다.
며칠 동안 저 무거운 방패를 메 고 움직이고,싸울 때도 저 방패 를 검처럼 휘두를 수 있는 것은 마나 사용자밖에 없었다.
제이크는 계속 영업용 미소를 지 으며 그에게 말을 붙였다.
그도 쑥스러운 표정을 지으면서 도 제이크의 말을 잘 받아 주었다.
방패 기사 루이.
제이크와 이야기하는 덩치 큰 소 년의 이름이었다.
제이크가 본 미래에는 멋진 성이
이름 뒤에 붙게 되지만,바뀐 세 상에서는 그 성은 다시 붙을 리가 없었다.
어렸을 때 루이의 재능을 알아본 톨레도 백작이 그를 둘째 아들의 종자로 만들었고,그는 먼 훗날 백작의 방패로,그리고 제국의 방 패 기사로 널리 이름을 알렸었다.
아쉽게도 마지막에는 황제의 대 수림 정벌에 차출되어 목숨을 잃 고 말았지만,이제는 오지 않을 미래였으니 그런 걱정은 하지 않 아도 될 듯했다.
"루이! 거기서 뭐 해!"
나름 즐겁게 이야기를 나누던 종 자는 앞에서 들려온 소년의 목소 리에 표정을 굳혔다.
"그럼,전 공자님이 부르셔서." 그는 제이크에게 인사를 한 뒤에 백작 아들에게 달려갔다.
"저 소년이야?"
"네."
"으,덕분에 몸에 닭살이 돋았어. 그런 말투하고 표정은 어디서 배 운 거야."
"접대 멘트라고 부르는 겁니다. 뭐 원하시면 해 드릴 수도 있는데요. 우리 여성 마나 사용자 용병
"아니! 절대 하지 마!"
슬쩍 옆으로 고개를 돌리며 제이크가 하는 말에 제시카가 질겁을 했다.
몸에 닭살이 돋고 얼굴이 새빨개 진 그녀는 한참을 손으로 부채질 을 해야 했다.
"흠,얼굴을 보니 덩치하고는 다 르게 어린 소년이네? 방패는 잘 쓰는 것 같긴 한데. 저 소년이 미 래에 엄청난 기사가 된다는 건 가?"
"지금도 대단해요. 마나를 밖으
로 뿜어내지는 못하지만 이미 마 나 사용자예요."
"으엑! 또 천재야?"
잠시 만나는 애들마다 다 천재들 이냐는 투덜거림이 지나간 뒤에 제시카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근데 저 소년은 저기 있는 대단 하신 젊은 기사님의 종자잖아. 어 떻게 우리 파티로 데려온다는 거 야?"
"저도 좀 걱정이었는데,잠깐 이 야기해 보니 아주 불가능한 것은 아닌 듯해요. 뭐,남부 왕국에 도 착할 때까지 시간이 있으니 차분
히 이야기해 보죠."
"그런데 마나 사용자인데 종자로 있는 거야? 마나 사용자면 바로 기사가 되는 거 아니었어?"
방금 마나 사용자가 되었고,기 사에 대해 제대로 알지 못하는 제시카로서는 충분히 할 수 있는 질 문이었다.
마법사가 되는 마나 사용자 이외 에 육체적인 힘을 사용하는 마나 사용자는 두 가지 방식으로 마나 를 사용했다.
하나는 마나를 이용해 육체를 강 화하는 방법.
근육을 강화해서 무거운 것을 들 고,빨리 움직이고,눈을 강화해 멀리 있는 것을 보고 빠른 움직임 을 볼 수 있는 등 마나를 이용해 인간의 육체적인 한계를 넘는 방 법이다.
또 하나는,마나를 몸 밖으로 빼 내서 자신의 무기를 강화하는 방 법이었다.
그중 하나가 검날에 마나를 부여 해서 강력한 절삭력을 내는 것이 었다.
바로 기사들이 쓰는 방법이었는 데,강력한 육체와 함께 사용을
하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이 세계의 기사들이 전장에서 탱크 같은 활약을 할 수 있는 이유였다.
일반인이 보기 힘들 정도로 빠르 게 움직이고,누구도 막기 힘든 힘을 가진 채로 그 무엇도 벨 수 있는 검을 든 기사를 막을 방법은 같은 기사나 마법사밖에 없었다.
하지만 종자인 루이는 마나를 사 용해서 몸을 강화할 수 있었지만, 마나를 밖으로 뽑아낼 수는 없었다.
그렇기에 그는 자신을 반쪽 마나
사용자로 이야기할 수밖에 없었 고,기사도 될 수 없었다.
"흠,그게 안 되는 사람도 있는 거였어?"
마나를 얻자마자 몸 밖으로 뽑아 낼 수 있었던 제시카는 처음 듣는 이야기에 고개를 갸웃거렸다.
"사람마다 다 다르니까요."
하지만 제이크는 소년의 단점이 전혀 문제가 안 된다는 표정이었다.
"흠,뭐,우리가 기사를 데려오는 것도 아닌데 상관없지. 그리고 네 말대로 방법이 없는 것은 아닌 것
같네."
두 사람의 눈에 종자 루이가 소 년 기사에게 마구 혼나는 모습이 보였다.
그는 고개를 숙인 채로 백작 아 들에게 손등으로 뺨을 맞고 있었다.
그 모습을,다른 기사들과 여성 들은 외면하고 있었다.
왜 종자가 자신의 기사에게 괴롭 힘을 당하고 있는지는 그날 알 수 있었다.
길을 걸으며 제시카는 그녀에게
관심을 보였던 백작 아들에게,제이크는 공작가 여성들과 알고 지 냈던 앰버에게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결국,시기심이네요."
"뭐,건방져서 그랬다고 이야기 하는데,네 말대로 시기심이 맞아. 실력은 대단해도 아직 애더라."
"뭐,자신보다 어린데 먼저 마나 를 느꼈으니 질투할 만도 하네요. 그런데 상대가 마나를 느낀 뒤에 성장이 멈춰 버렸으니, 결국 비뜰 어진 이기심이 그리로 터져 나온 거군요."
"일이 있기 전까지는 그래도 자 제를 했나 보더라고. 아버지인 백 작의 눈치를 봤겠지."
"제어하는 사람이 모두 죽고,쌓 인 스트레스가 다 그쪽으로 간 거 군요. 그리고 주변 사람들은 구심 점인 그를 막아설 수 없었던 거고."
잘 시간이 된 지금도 그는 일행 바깥에 홀로 자리를 잡고 있었다.
명백한 외톨이 신세.
무척이나 불쌍해 보였지만,그 누구도 그런 그에게 다가가는 이 가 없었다.
"안쓰럽긴 하지만,차라리 잘됐 네요."
제이크는 슬그머니 자리에서 일 어나 루이에게 걸어갔다.
그 모습을 보고 백작 아들은 눈 살을 찌푸렸지만,귀족 체면에 차 마 제지는 하지 못하고 속으로 쌓 아 둘 뿐이었다.
그렇게 제이크는 계속 루이에게 말을 붙였고,백작 아들은 더욱 루이를 구박하고,루이는 제이크 에게 점점 마음을 열었다.
루이와 제이크,그리고 제시카가 서로 가까워지는 시간만큼 일행의 전진은 계속되었다.
크고 작은 몬스터와의 싸움과 고 생스러운 행군이 계속됐다.
다행히 아직 쓰러지지는 않았지만,일주일이 지나자 여성들의 표 정은 슬슬 한계인 것이 여실히 느 껴 졌다.
"이제 위험한 지역은 다 벗어났 습니다. 저 협곡만 지나면 평탄한 길이니 더는 힘들지 않을 겁니다."
맥이 가리키는 전방에는 몇 그루 의 나무 뒤로 험난한 바위산이 일 행을 가로막고 있었다.
다행히 일행이 가는 길에는 실 같은 협곡이 나 있어,저 험한 바 위산을 오를 필요는 없어 보였다.
"신기하네요. 저런 협곡은 어떻 게 발견한 거죠?"
"이게 다 오랜 경험 덕분이지. 괜히 수십 년간 대수림에서 구른 게 아니야."
파티의 도적이 길 안내를 했지만, 맥이 오히려 어깨를 으쏙거렸다.
이제 편해진다는 이야기에 어둠 이 짙게 내려앉았던 여성들의 표 정이 조금 풀렸다.
지쳐 보이던 기사들도 힘을 얻는 것 같았다.
하지만 오히려 제이크는 표정이 딱딱하게 굳어 있었다.
"왜 그래?"
뒤를 돌아보며 인상을 쓰는 제이크를 향해 제시카가 물었다.
"이곳에서 다른 여행자를 만날 가능성이 얼마나 될까요?"
그런데 제이크는 오히려 그녀에 게 반문했다.
그의 감시 마법에 몬스터가 아 닌,마나를 가진 사람이 걸려 든 것이었다.
"사람?"
"그것도 마나 사용자들입니다. 제 감시 마법은 일반인은 안 걸려요."
제이크의 말에 제시카의 얼굴도 굳어졌다.
"거리는 얼마야?"
"한,천 걸음?"
500미터 후방에서 마나 사용자 들이 다가온다는 이야기였다.
다른 사람에게도 알려야 했지만,
제이크의 마법을 빼고는 설명하기 난감한 일이었다.
그때,제시카가 옆에 있는 나무 를 타고 위로 오르기 시작했다.
마법 부츠를 활성화해서 나무를 밟고 위로 솟구치는 모습은 제이크가 전생에서 보던 닌자 만화의 주인공 같았다.
다른 일행도 갑자기 나무를 타는 제시카의 모습에 놀라 걸음을 멈 췄다.
잠시 뒤에 나무 위로 올라갔던 제시카가 아래로 뛰어내렸다.
급하게 다가온 맥이 그녀에게 질
문했다.
"무슨 일이지?"
"사람들이 따라오고 있어요. 인원 은 열 명 이상. 게다가 일부는 마 나 사용자 같았어요."
실제로 마나 사용자인지는 눈으 로 봐서는 알 수 없었지만,제시카는 제이크의 말을 믿고 자신이 본 것에다 설명을 덧붙였다.
"설마,추적자?"
맥의 얼굴도 딱딱하게 굳어졌다.
둘의 표정이 굳어지자 기사들과 백작 아들도 다가왔다.
"추적자가 붙은 거야?"
"대수림까지 따라올 리가 없을 텐데?"
"그럼 어떻게 해요!"
웅성거리는 사람들을 뚫고 백작 아들이 소리쳤다.
"뭐가 문제야! 추적자 따위는 모 두 없애면 되잖아. 우리 기사들과 용병들이 있는데. 다 죽이면 그만 이야!"
그의 말에 기사들은 다시 기운을 차린 것 같았지만,용병들은 고개 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추적자가 확실하면 저희들은 발 을 빼야 합니다."
"뭐라고!"
"아무리 더러운 일을 한다고 하 더라도 모두 제국의 기사들입니다. 제국에서 용병 일을 하려면 황제의 기사들에게 검을 들이댈 수는 없습니다."
용병들의 말에 로럴드는 이를 빠 득 갈았다.
다른 나라와 다르게 제국은 황제 에 대항하는 그 어떤 인간도 용서 하지 않았다.
영지전으로 서로 싸우는 것은 용 납했지만,황제의 기사들에게 대 항하는 것은 모두 반역으로 처리
해 버렸다.
덕분에 제국의 용병들은 제국의 사병 역할을 하거나 영지전에 참 가하는 게 아니면 모험가를 할 수 밖에 없었다.
"그럼,우리끼리라도 싸우면 돼!" 로럴드 공자가 악을 질렀지만, 말도 안 되는 소리였다.
용병들이 떠나 버린 뒤 대수림을 더 지나간다는 것도 무리였고,추 적자들을 이기리라는 보장도 하기 힘들었다.
물론,숨어 있는 한 사람이 실력 을 보인다면 모르겠지만,그는 다
른 생각을 하는 중이었다.
"흠,저 앞에 있는 협곡은 한 사 람이 충분히 지킬 수 있을 것 같 은데요?"
제이크의 말에 일행도 돌아보았다.
바위산에 나 있는 협곡은 보기에 도 한 사람이 막아서면 다른 사람 이 지나갈 수 없어 보였다
그 광경에 제일 먼저 로럴드 공 자가 환호성을 토해 냈다.
"그럼,누가 막는 동안에 모두 피하면 되잖아! 마법사님이 있으 니 사람들이 빠져나간 뒤에 협곡
을 무너뜨리면 돼!"
기막힌 아이디어를 떠올렸다는 듯이 환한 얼굴로 토해 낸 이야기 에 모두의 얼굴이 찡그려졌다.
모두가 떠올렸지만,차마 꺼내지 못한 이야기였다. 말 자체는 그럴 듯하지만 누가 나서서 막는단 말 인가.
용병들이 희생할 리도 없고,그 렇다고 여성들에게 시켜봤자 소용 없었다.
그동안 충성해 온 기사들이 남을 수도 있겠지만,말을 하는 백작 아들의 눈은 자신의 종자를 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