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4화
자신을 바라보는 백작 아들을 마 주 바라보던 루이는 포기한 얼굴 로 눈을 감았다.
"제가 남겠습니다."
"그래 잘 생각했어. 잘 막아 내
고 살아 돌아온다면 내가 기사로 세워 줄게!"
반역자가 되어 다른 나라로 도망 치면서 어떻게 기사로 세워 주겠 다는 것인지.
그리고 홀로 어떻게 그들을 막아 내고 살아남을 수 있겠으며,산다 면 어떻게 대수림을 빠져나갈 수 있는지.
그 어떤 것도 말이 되지 않는 이 야기 였다.
여기 있는 모든 사람이 그것을 알고 있었지만,누구도 그에게 뭐 라 말하는 사람이 없었다.
다만,기사들과 여성들은 그를 외면했고, 용병들은 안쓰럽게 바 라볼 뿐이었다.
그 가운데에서 앰버는 어쩔 줄 몰랐다.
누구를 희생시키는 것을 극도로 싫어하는 그녀였지만,다른 귀족 이 하는 일에 참견할 권한이 없었다.
"아뇨,이것으로 백작님이 거두 어 주신 은혜는 모두 갚은 것으로 하겠습니다. 그동안 감사했습니다."
루이는 마지막으로 여성들 쪽을
향해 고개를 숙였다.
그 모습에 귀족 모녀는 안쓰럽게 그를 바라보았지만,차마 그에게 대답할 말이 없었다.
루이의 말은 가문과 인연을 끝낸 다는 이야기였다. 동시에 기사와 종자와의 계약도 버린다는 말이었다.
루이의 말에 얼굴이 벌게진 로럴 드 공자였지만,죽겠다고 남은 사 람에게 차마 뭐라 할 수 없어 먼 저 협곡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다른 사람들도 서둘러 협곡으로 향했다.
계획을 세웠는데 협곡에 도착하 기 전에 잡혀 버리면 웃기지도 않 는 일이었다.
모두가 협곡으로 나아가는 동안, 제이크가 앰버에게 다가가 질문을 던졌다.
"협곡을 무너뜨릴 정도의 마법을 쓰려면 시간이 얼마나 걸리죠?"
제이크의 질문에 고개를 갸웃거 리던 앰버는 곧 심각한 얼굴이 되 었다.
"적어도 20분은 필요해요. 도저 히 혼자서는 무리일 것 같은데요."
숲에서의 이동이 시간이 걸린다 고 하지만,이쪽은 일반인이 포함 된 일행이었다.
그 시간 동안 종자는 홀로 추적 자들을 막아야 했다.
아무리 방패를 잘 쓴다고 하지만,그녀가 생각하기로는 절대 무 리였다.
"하지만 다른 방법이…… 내가 남을 수도,다른 사람보고 남아 달라고 할 수도 없고."
마음 같아서는 앰버가 남고 싶었 지만,그녀는 마법으로 협곡을 무 너뜨려야 했다.
더구나,여성들을 안전한 곳까지 바래다주는 것이 그녀의 목표였기 에 함부로 남을 수도 없었다.
"아무래도 다른 사람에게 말해야 겠어요. 의미 없이 사람만 죽게 될 거예요."
앰버의 말에 제이크가 제시카를 돌아보며 입을 열었다.
"우리가 남는 게 좋을 것 같은데요."
갑작스러운 말에 제시카가 어리 둥절한 표정이 되었다.
"제시카 씨가 마나 사용자잖아요. 다른 사람과 다르게 암벽도
충분히 기어 올라갈 수 있으니 막 아서다가 저를 업고 절벽 위로 피 하면 될 거예요."
이미 앰버는 제시카의 부츠가 마 법 부츠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마나 사용자라고 하더라도 싸우 는 순간 급하게 가속을 하고,평 지처럼 나무를 오를 수 있는 것은 마법 부츠밖에 없었다.
대수림을 다니는 모험가가 마법 아이템 하나 숨겨 놓고 있을 수 있다는 생각에 대수롭지 않게 여 겼지만,그건 마법사이자 귀족인 그녀의 생각일 뿐이었다.
아무튼,제이크의 말은 일리가 있어 보였다.
"에엑,무거워서 무리야!"
뒤이어 들려온 제시카의 말이 아니었다면.
-좀 말 좀 맞춰 줘요! 업으라고 안 할 테니까요!
제시카의 딴지에 질겁을 한 제이크가 급하게 메시지 마법으로 쏘 아붙이자,그녀는 뚱한 표정으로 말을 바꿨다.
"아,아니네요. 충분히 가능할 것 같아요."
갑작스러운 말 바꿈에 어리둥절
한 앰버에게 제이크가 쐐기를 박 았다.
"가능하다네요. 마법사님 대신에 저희가 남도록 하죠."
"아,하지만……"
뭔가 제이크의 말에 휘둘리는 느 낌이었지만,자신들을 희생해 사 람들을 구하겠다는 이야기였기에 앰버는 의심할 겨를이 없었다.
"걱정하지 마세요. 저희는 문제 없이 도망칠 수 있어요. 그리고 운이 좋다면 저 친구도 구할 수 있을지 몰라요."
제이크의 말에 앰버는 반대하고
싶었지만,결국 고개를 끄덕일 수 밖에 없었다.
나중을 위한 포석을 잔뜩 깔아 놓은 제이크는 협곡 안쪽에서 제시카와 함께 멈추어 선 뒤에 앰버 를 향해 손을 흔들었다.
"꼭 살아남아야 해요!"
"걱정하지 마세요. 먼저 영지에 돌아가 있을게요."
앰버의 외침에 제이크가 대답했 고,제시카도 앰버를 향해 손을 흔들어 주었다.
루이는 협곡 입구에 서서 숲을 바라보았다.
그의 귀에 멀어지는 사람들의 목 소리가 들려왔지만,그 소리는 의 미 없이 그를 스쳐 지나갔다.
그는 지금,방패를 땅에 세운 채 로 길지 않은 삶을 되돌아보는 중 이었다.
소작농의 아들이었던 어린 시절. 그리고 아이들과 검을 가지고 전 쟁놀이를 하다가 톨레도 백작의 눈에 띄어 성으로 들어간 일.
고달프지만 보람 있었던 훈련들.
마나를 깨달아 기뻤던 순간과 백 작 아들의 시샘,그리고 마나를 외부로 뽑아낼 수 없어 좌절했던 순간들.
마지막으로 새 황제의 반역 선언 과 백작의 죽음,도주.
외톨이가 되고 백작 아들에게 괴롭힘을 당하던 시간들.
짧은 시간이었지만,참으로 다채 로운 시간이었다.
다만 이렇게 마지막 시간이 되니 바위같이 단단한 그도 우울해지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죽은 할아버지 말대로 결국,마
지막은 혼자 남는 건가?" 무척이나 서글퍼지는 말이었지만,그의 독백은 뒤에서 들려오는 대답에 박살 나 버렸다.
"무슨 소리야? 기껏 같이 남아 줬건만,혼자 분위기를 잡고 있어?"
루이는 놀란 표정으로 뒤를 돌아 보았다.
그의 뒤에는 이곳에 오면서 친해 진 제이크와 동료인 제시카가 서 있었다.
"왜 이곳에 있는 겁니까? 여긴 저 혼자만 남는다고……"
"아니,이야기 하나도 못 들은 거야? 완전히 자기 세상에 빠져 있었네."
제이크는 어리둥절한 루이의 모 습에 난감한 표정이 되었다.
자신과 다르게 감수성이 풍부한, 그저 평범한 십 대 후반 청소년이 었다.
하는 수 없이 제이크는 자신들이 남은 이유를 설명해야 했다.
"……이렇게 된 거야. 걱정돼서 남았으니 고맙다고 해."
그동안 열심히 친해진 덕분에 이 제 서로 말을 놓기로 했지만,아
직 루이는 제이크에게 말을 놓지 못한 상태였다.
"괜찮겠어요? 추적자들이 제국 기사들이라면 도망가기 힘들 거예요. 아무리 용병님이 마나 사용자 라지만 사람을 업고 절벽을 오르 기는 힘들어요."
"그것 봐! 여기 잘 아는 사람이 있네. 나,틀린 말 한 거 아니다, 뭐."
"미리 알려 줬잖아요. 말 맞춰 주기로 해 놓고 딴말한 사람이 누 구인데……"
그동안 말하지 않고 일을 벌여서
제시카가 삐진 탓에,이번에는 메 시지 마법으로 미리 그녀에게 말 해 두었다.
하지만 제시카가 엄한 대답을 해,하마터면 일을 그르칠 뻔했다.
"아니,그렇게 갑자기 진행될 줄 몰랐지. 으…… 미안, 내가 가서 추적자들 상황을 보고 올게."
빨개진 얼굴로 제시카가 숲을 향 해 달려 나갔다. 마법 부츠를 쓴 덕분에 그녀의 움직임은 번개 같 았다.
- 도망쳤네요.
"그래,도망쳤어."
파티마의 말에 제이크가 고개를 끄덕였다.
미안하고 창피한 마음에 그녀가 자리를 피했다는 것을 그도 알고 있었다.
"그럼,나도 제대로 일을 해 볼까?"
제이크는 한 손에 쇠뇌를,다른 한 손에는 에고 완드를 꺼내 든 뒤, 어리둥절한 표정의 루이에게 제안했다.
"만약,나와 제시카가 너를 살려 주면 어떻게 할래."
"뭐? 살려 준다고?"
제이크의 말에 루이는 자신도 모 르게 반말로 반문했다.
"맞아. 너 이제 갈 데도 없잖아. 혹시 이곳에서 살아나게 되면 우 리하고 같이 지내지 않을래?"
제이크의 말에 루이는 빙그레 미 소를 지었다.
"그러죠,살아남으면 같이 지내 죠. 어차피 기사가 될 생각도 버 렸으니까."
타이밍 좋게 찔러 들어간 제이크 의 제안은 제대로 루이의 마음을 움직였고,제이크는 주먹을 불끈 쥐었다.
-와,대단해요! 그동안 제 주인 님 중에서 제일 사기꾼 같아요."
-사기꾼이라니? 영업이야,영업. 사람 하나 스카우트하는 게 쉬운 줄 알아?
"그럼,이제 살아남기만 하면 되 는 건가?"
제이크의 손에 들린 에고 완드가 푸른빛을 머금기 시작했다.
그렇게 루이가 커다란 방패를 쥐 고 앞을 막아서고,제이크가 뒤에 서 마나를 모으고 있을 때.
숲으로 들어갔던 제시카가 금방
밖으로 달려 나왔다.
그리고 곧이어 가죽 갑옷을 입은 남자들이 숲을 튀어나왔다.
"아니,상황을 보고 온다는 사람 이 뒤에 사람들을 달고 오냐."
황당한 상황에 제이크가 들고 있 는 쇠뇌를 제시카가 오는 쪽으로 겨누었다.
또다시 화살통에서 화살이 스스 로 빠져나와 쇠뇌에 장전되었고, 장전된 화살은 은은한 빛이 흘렀다.
숙!
제이크는 바로 쇠뇌를 발사했다.
화살은 번개 같은 속도로 제시카 의 옆을 통과해 그녀를 쫓는 험상 궂은 남자의 얼굴로 향했다.
"홍!"
자신을 향해 날아오는 화살을 보 고도 남자는 비웃음을 홀리며 검 을 치켜들었다.
이런 복장을 한 채로 어둠 속에 일하고 있지만,그는 제국이 자랑 하는 기사 중 한 명이었다.
마나를 다룬 지 십 년이 지났는 데 날아오는 화살 하나 쳐 내지 못할 리가 없었다.
그는 화살을 향해 힘차게 검을
휘둘렀고,검은 화살을 정확하게 때렸다.
깡!
하지만 예상과 다르게 화살은 부 러지지 않았다.
오히려 쇠가 부딪치는 소리를 내 며 옆으로 튕겼다.
푹!
화살은 얼굴 대신 그의 어깨를 관통했고,제시카를 쫓던 그와 다 른 사람들은 급하게 발을 멈추었다.
"마법 무기다! 마나 사용자가 더 있어! 주의해!"
마나가 실린 검이 잘라 내지 못 한 것을 보면 화살에 마나가 실려 있다는 이야기.
그렇다는 것은,앞에 선 궁사가 마나 사용자란 이야기였다.
"마나 사용자였어요?"
"아니,그게 좀 다른데……"
루이도 놀라 제이크에게 물어보 았지만,제이크는 당장 설명하기 가 어려웠다.
추적자들이 멈춘 사이에 제시카 는 마법 부츠의 힘으로 루이를 뛰 어넘어 제이크 뒤로 내려섰다.
"으아,놀랬다."
제시카의 얼굴이 하얗게 질려 있 었다.
"도대체 어떻게 된 거예요."
"아니,중간에 마주쳐서 좀 시간 을 벌어 보려고 슬쩍 간을 봤거 든?"
"설마,싸운 거예요?"
"누가 그렇게 셸 줄 알았나. 하 마터면 죽을 뻔했어."
마나 사용자가 되어 자신의 실력 을 너무 과신한 모양이었다.
아무리 마나 사용자가 되었다지만,상대는 그녀보다 훨씬 오래전 에 마나 사용자가 되어 긴 기간
제대로 된 훈련을 받은 기사들이 었다.
그녀가 상대될 리가 없었다.
"반성,반성. 너무 홍분했나 봐." 그래도 그녀는 바로 깨달은 듯했다.
자신의 머리를 손으로 두들기는 모습에 제이크는 따로 말을 하지 않기로 했다.
그보다,먼저 다가오는 자들을 상대해야 했다.
검날에 마나를 씌운 열 명의 남 자가 조심스럽게 그들을 향해 다 가오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