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5 화
"뭔가 좀 평범한 곳이면 안 될까? 맨날 이런 곳이야!"
일주일 이상 걸어서 목표에 도착 한 제시카는 눈앞의 광경으로 보 고 푸념을 내뱉을 수밖에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이번에도 멀쩡 한 곳은 아니었다.
"세상에,죽은 자의 땅이라니. 생 각보다 더 안 좋아!"
물론 제이크가 미리 말해 주긴 했지만,실제로 본 광경은 예상보 다 더 심했다.
죽은 생명체가 살아서 돌아다니 는 대지.
바로 언데드가 번성하고 있는 지 역이었다.
일명 죽은 자의 땅이라 불리는 이곳은 여러 가지 이유로 아직 대 륵 곳곳에 모습을 보이고 있었다.
시체가 움직인다는 비현실적인 이유와 각종 전설과 종교적인 이 유로 사람들이 외면하는 장소였다.
그래서 필요에 따라 성직자들이 나서서 정화하는 정화하기도 했다.
대수림 깊숙이 자리 잡은 이 언 데드의 땅도 다른 곳과 그리 다르 지 않았다.
내장을 고스란히 드러낸 채로 돌아다니는 죽은 동물과 몬스터들.
그리고 말라붙은 가지에 색이 변 한 잎이 붙은 채로 모습을 유지한
나무들과 식물들.
모두 죽은 존재들이었지만,아직 움직이고 있었다.
앞다리가 떨어져 나간 들개,목 이 반쯤 뜯긴 채로 움직이는 몬스 터 등.
보기에도 끔찍한 언데드의 모습 들에 경험 많은 용병인 제시카도 질겁한 얼굴이 되었다.
"이런 곳을 들어가도 되는 건가요? 뭔가 오염되거나 그런 것은 아니겠죠?"
루이도 검게 변한 땅을 보며 무 척이나 꺼림칙한 표정을 하고 있
었다.
"괜찮아요,괜찮아. 죽지만 않으 면 아무 문제가 없어."
제이크가 위로의 말을 꺼냈지만, 두 사람의 표정은 더 안 좋아졌다.
"설마,우리도 죽으면 저런 언데 드가 된다는 거야?"
"그렇긴 하죠. 언데드의 땅인데 죽으면 당연히 언데드로 변할 수 밖에요."
"당연한 게 아니잖아!"
"뭐,어차피 죽은 뒤에야,땅속에 묻히건 움직이건 죽은 사람에게는
별 차이 없는 거잖아요."
쿨한 제이크의 말에도,두 사람 은 안절부절못했다.
"죽어도 언데드가 되긴 싫습니다 만."
"맞아,죽은 뒤 언데드가 되면 영혼을 빼앗긴다는 이야기도 있어."
"어차피 제시카는 섬기는 신도 없잖아요."
"기분 문제잖아! 기분 문제!" 어차피 들어가긴 해야겠지만,불 안한 마음에 괜스레 투덜거리는 두 사람이었다.
일행이 바라보는 곳은 몇 개의 산을 넘고 계곡을 넘은 후 도착한 높은 언덕으로 둘러싸인 분지.
마른 나무 사이로 돌아다니는 언 데드들이 보이는 이곳은 지옥의 한 장면처럼 보이기까지 했다.
분지가 언덕에 둘러싸인 덕분에 언데드들이 밖으로 퍼져 나가지 않았지만,대신 이 안은 언데드의 숫자가 상당했다.
이 안에서 죽은 생명체는 모두 죽은 모습 그대로 유지되었고,외 부에서 들어온 생명체도 이 안의
죽임을 당해 언데드로 변해 버렸 기 때문이다.
그리고 죽은 것은 동물이나 몬스 터만이 아니었다.
"역시,아무도 안 와 본 게 아니 었네."
좀 먼 곳에 있었지만,아무리 그 래도 이 던전이 그동안 누구에게 도 알려지지 않았던 것이 의아했 던 제시카는 분지 안을 보고 그 이유를 알 수 있었다.
죽은 나무 사이로 가죽 갑옷을 입은 시체가 움직이는 게 보였기 때문이다.
이 분지를 발견한 사람이 있었지만,그는 살아서 돌아가지 못했던 것이다.
"항상 욕심이 문제야."
발견한 뒤에 곱게 물러났으면 살 았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하지만 대수림 모험가에게 호기 심과 욕심을 빼면 남을 게 없었다.
지금 이렇게 푸념하는 제시카였 지만,그녀의 눈도 기대감으로 반 짝이고 있었다.
"우선 외각부터 정리해야 해요. 이성이 없는 언데드라고 하지만,
소리가 나면 몰려드는 것은 마찬 가지니까요. 한쪽 방면은 다 정리 해야 할 것 같아요."
"에고,던전 탐사인줄 알았는데, 결국 몬스터 사냥이네."
한숨을 내쉰 제시카가 언덕을 내 려가기 시작했고,두 남자도 곧 그녀를 따라 움직였다.
언데드가 위험한 이유는 그 모습 에서 오는 공포감도 있지만,그보 다 더 큰 이유가 두 가지 있었다.
이미 죽은 몸이라 목숨을 도외시 하고 저돌적으로 달려든다는 이유 와 평범한 공격으로는 움직임을 멈추기 힘이 든다는 이유가 바로 그것이었다.
검으로 팔을 잘라도 다른 팔을 휘두르고,목을 날려도 전혀 음직 임이 느려지지 않았기에 언데드와 붙어 싸우는 것은 일반인들에게는 두려운 일이었다.
하지만 마나 사용자는 조금 상황 이 달랐다.
퍽!
루이의 방패에 맞은 머리 없는
들개가 뒤로 수 미터를 튕겨 나더 니 몸이 산산이 부서졌다.
서걱!
제시카의 단검은 사람 반만 한 족제비의 몸을 순식간에 몇 등분 내어 버렸다.
마나 사용자의 힘은 굳어 버린 사체들이 감당하기에는 너무 강했다.
더구나 살아 있을 때보다 느려진 언데드의 움직임은 마나 사용자들 에게는 움직이지 않는 것과 다를 바가 없었다.
제이크의 도움을 받으며 두 마나
사용자는 차근차근 외각부터 언데 드들을 줄여 나갔다.
"그런데 얼마나 죽여야 하는 거 야?"
언데드 한 마리를 또 산산조각 내며 제시카가 물었다.
"나중에 탈출로로 쓸 영역하고 던전 입구에 자리 잡은 놈과 싸울 때 달려오지 못할 정도만 잡으면 됩니다."
바닥을 흔들어 휘청거리는 언데 드들을 넘어뜨린 제이크가 그녀의 말에 대답했다.
"그럼,하루 이틀에 안 될 것 같
은데요?"
내장을 목에 감고 달려드는 들소 를 방패로 흘리며 루이가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그래서 식량 준비를 많이 했잖 아요."
"엑! 던전이 깊어서 많이 준비한 줄 알았지!"
"던전이 깊으면 이야기했겠죠." 눈을 휘둥그레 뜬 제시카를 향해 제이크가 한숨 섞인 목소리로 말 을 하자 그녀는 입을 삐쭉 내밀었다.
분지가 예상보다 넓었다.
위에서 볼 때는 몰랐지만,내려 와서 보니 하루 정도에 뚫릴 길이 아니었다.
더구나 단지 길을 뚫는 정도가 아니라 주변에 있는 언데드들을 정리하면서 움직이는 것은 그보다 몇 배는 시간이 걸렸다.
결국, 일행은 삼분의 일도 못 뚫 고 해가 지기 전에 다시 분지 밖 으로 빠져나올 수밖에 없었다.
일행은 처음 도착했던 분지의 언 덕 위에 캠프를 차리고 다음 날을 준비했다.
분지는 밤이 되자 회색빛 안개가
드리워져 마나 사용자인 일행 눈 으로도 안이 잘 안 보일 지경이 었다.
그리고 시체에서 흘러나온 인광 때문인지 안개 사이로 언뜻 보이 는 녹색 빛들은 마치,전생에 보 던 반덧불 같기도 했다.
"아마,삼사 일 정도만 정리하면 던전 입구에 자리 잡은 언데드 몬 스터와 싸울 준비가 될 겁니다. 던전 입구에 있는 언데드는 살아 생전 상당히 강력했던 몬스터여서 잡기가 쉽지 않을 거예요."
얼마 전 싸웠던 초롱아귀 같은
놈은 아니었지만,그래도 살아 있 다면 상대하기 만만찮았을 몬스터 였다.
물론 죽었다고 쉬워지는 것은 아 니었지만,다행히 제이크에게 방 법이 있었다.
성직자가 있다면 더 쉬워졌겠지만,고대 마법사도 대충 흉내는 가능했다.
"휴,그럼 앞으로 이틀은 이 고 생을 계속해야 한다는 거네."
느리고 약한 언데드에다,지능도 떨어지는 놈들이라 싸우는 것은 어렵지 않았지만,그 숫자가 만만
찮아 피로는 더 큰 느낌이었다.
그 탓에 식사 후 일행은 반쯤 풀 어진 얼굴로 어둠에 싸인 분지를 나른 한 표정으로 내려다보게 되 었다.
"루이는 힘들지 않아? 종자가 이 런 일 하기는 쉽지 않을 텐데."
분지에서 흘러나오는 낯선 느낌 때문일까?
제시카는 그동안 못 했던 질문을 꺼내놓을 수 있었다.
그녀의 질문에 방패를 닦던 루이 가 잠시 생각에 잠겼다.
"흠,별로 힘든 것은 모르겠는데
요. 어렸을 때는 먹고 살기 힘들 었고,종자로 일할 때도 지금보다 힘들면 힘들었지,쉽지 않았어요. 오히려 제이 님과 같이 있을 때가 실력이 느는 게 느껴져서 좋은데요?"
아무리 말을 했지만,제이크에게 붙이는 존칭은 변하지를 않고 있 었다.
"그래도 용병 일을 하는 거잖아. 종자로 있었으면 기사가 목표 아 냐?"
제시카의 물음에 제이크도 귀를 세우고 루이의 말을 기다렸다.
지금이야 제이크가 생명을 구해 주고,도망자 신세라 갈 곳이 없어서 있는 것이지만,나중에는 어 떻게 될지 몰랐다.
"당연히 기사가 목표죠."
"실력은 이제 기사급 아닌가? 나 중에 조용해지면 기사단으로 갈 거야?"
물론 제국에서는 힘들겠지만,이 대륙에 제국만 있는 것은 아니었다.
"아뇨,내치지만 않는다면 제이 님과 같이 있을 생각입니다."
"엥? 기사가 된다며."
"제이 님 밑에서 기사가 될 생각 입니다."
"에…… 엑?"
제시카는 루이가 한 말의 뜻을 고민하다 깜짝 놀라고 말았다.
"아니,그건 말이…… 설마,말이 되는 건가?"
제이크의 밑에서 기사가 된다는 것은 제이크가 기사를 둘 수 있는 귀족이 된다는 이야기.
처음에는 말이 안 된다고 느꼈지만,잠시 생각해 보니 그러지 못 하리라는 법이 없었다.
분명 제이크는 귀족 출신에다가,
루이는 모르지만,지금 세상에 한 명밖에 없는 고대 마법사였다.
그리고 그는 벌써 많은 유물을 들고 있고,앞으로도 구할 수 있 는 엄청난 부자였다.
물론 높은 귀족으로 올라서려면 여러 가지 난관이 있겠지만,루이 가 다른 곳에서 기사가 되는 것도 마찬가지였다.
"우… 정말, 내가 큰 실수를 한 걸까?"
거기까지 생각이 미친 제시카가 우울한 표정을 짓자 제이크는 헛 웃음을 지었다.
"앞으로 어떻게 될지도 모르는데 뭘 걱정하세요. 어떻게 되든 제시카하고는 동료예요."
"아니,그게 문제야."
"네?"
"아무래도 포지션을 잘못 잡은 것 같아. 이럴 줄 알았으면 내숭 을 떨어서 꼬시는 쪽이 좋지 않았 나 하는 거지. 높은 귀족 부인이 될 수도 있었잖아."
"퍽도 그러시겠네요. 제가 소굽 친구분과 헤어지는 걸 봤습니다."
"어,그것도 봤어?"
"화끈하게 차시더군요."
제이크의 말에 제시카가 벌게진 얼굴을 손으로 부채질했다.
두 사람의 만담 덕분에 루이의 말이 부드럽게 넘어갔지만,제이크는 마음속에 작은 책임감이 느 껴졌다.
제이크는 루이의 말에 대답하지 않았다.
하지만 루이가 그런 생각이라면 자신도 그의 말에 언젠가 대답해 줄 필요가 있었다.
행동으로.
그렇게 밤이 깊어 갔고,세 사람 은 피곤한 상태에서도 각자 생각
에 잠겨 시간을 흘려보냈다.
* * *
다음 날.
늦게 잠든 세 사람은 늦은 아침, 뜻밖의 소리에 잠에서 깨고 말았다.
분지 쪽에서 전투 소리가 들려온 것이었다.
자리에서 일어나 분지를 내려다 보니 많은 수의 용병들이 분지 입 구에서 언데드들과 싸우며 분지로 진입하고 있었다.
그 모습에 세 사람 다 놀랐지만, 특히 제이크의 놀람은 이루 말할 수가 없었다.
이곳은 지금 발견될 리가 없는 곳이었다.
미래에 황제가 죽은 뒤에 발견된 곳으로,새 황제가 알 리도 없었다.
더구나 우연으로 왔다고 하기에 는 분지로 들어온 용병대의 모습 이 너무나 체계적이었다.
"어,저 사람들은 분명 레타니아 에서 온 상인들인데?"
그때 였다.
용병대를 따라 분지로 들어서는 사람들을 제시카가 알아보았다.
남부 특유의 자유분방한 모습을 한 남자들과 로브를 둘러쓴 여성 이 바로 그들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