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1 화
리치의 핵이 던전 중추였던 모양 이다.
핵이 파괴되자 던전의 기능이 멈 추었고,죽은 자들을 언데드로 만 드는 힘도 사라져 버렸다.
아직 파괴되지 않은 언데드는 그 냥 남아 있게 되었지만,이제 던 전이 있는 이 분지는 더 이상 죽 음의 땅이 아니었다.
"죽음의 냄새가 사라졌어요."
사제인 레이는 주변 공기가 원래 대로 돌아간 것을 알 수 있었지만,다른 이들은 조금 분위기가 가벼워진 것을 느낄 뿐이었다.
"나는 잘 모르겠는데. 어쨌거나 이제는 부서진 놈들이 다시 살아 나는 일이 없다는 거지?"
가구의 잔해를 뒤지면서 제시카 가 질문을 했다.
"네,리치의 핵이 이 오염된 던 전을 가동하고 있었으니,핵이 파 괴된 지금은 사체가 다시 언데드 로 부활할 일은 없습니다."
그렇다고 남아 있는 언데드가 바 로 원래의 시체로 돌아가는 일은 없겠지만,부활만 되지 않는다면 오래지 않아 이곳도 평범한(?) 대 수림으로 돌아갈 것이다.
제이크의 대답에 같이 잔해를 뒤 지던 루이가 만족한 얼굴로 고개 를 끄덕였다.
용병보다 기사에 가까운 그였기 에 보상이나 돈보다는,죽음의 지
대를 없앤 것에 만족감을 느낀 것 이다.
"오,있다,있어!"
하지만 제시카는 제대로 된 용병 이었다.
한참 석실을 뒤지던 제시카가 환 호성을 울렸다. 가구의 잔해들 속 에서 결국 반짝이는 금화들을 찾 아 낸 것이다.
시간이 과거의 유적들을 풍화시 켜 버렸지만,고대 금화는 아직도 찬란한 빛을 내뿜고 있었다.
물론,마법 아이템을 얻는 것이 훨씬 더 좋은 일이기는 했다.
하지만 이번 던전 탐사에서 나온 물건들은 하나도 팔지 못할 듯했다.
언데드 나이트에게서 나온 마법 아이템 일체는 루이가 차지했고, 리치를 쓰러뜨리고 얻은 마법 지 팡이는 벌써 제이크가 배낭 속에 집어넣고 있었다.
제이크가 리치를 잡은 이유가 이 마법 지팡이였으니,절대 팔 리가 없었다.
그렇기에 파티의 재정을 담당하 는 제시카로서는 실제로 돈이 될 고대 금화가 무척이나 반가웠다.
세심하게 석실을 뒤진 끝에 일행 은 상당량의 금화를 모을 수 있었다.
"네 명이니 사분의 일은 레이 사 제님 몫이네요."
"네,감사합니다."
제시카가 아깝다는 뜻을 온몸으 로 표현하며 건네주는 금화를,레 이 사제는 담담한 표정으로 받았다.
모시는 신의 성향상 역시 계산은 칼 같았다.
"그럼 돌아갈까요?"
제이크의 말을 끝으로 일행은 석
실을 빠져나온 뒤 통로를 거쳐 던 전을 벗어났다.
"왜 이렇게 늦었어? 언데드 놈들 이 부활하면 또다시 길을 뚫어야 할지도 몰라!"
부루토 용병 대장이 조금 짜증 나는 얼굴로 던전을 빠져나온 일 행에게 쏘아붙였다.
언데드를 부활시키는 던전의 마 법이 사라진 것을 알지 못하는 그 로서는 시간을 지체한 제이크 파 티가 짜증 날 법했다.
제시카는 미안한 얼굴로 용병 대 장에게 사과했다.
그 뒤,일행은 모두 들어온 길로 분지를 빠져나가기 시작했다.
일행이 움직이자 레이 사제는 상 인들이 있는 곳으로 돌아갔다.
"저 팀이 뭣 좀 찾아냈습니까?" 상인들이 그녀에게 대수롭지 않 은 듯이 질문을 던졌고.
"고대 금화 약간 찾은 것 같습니다."
그녀도 평범한 어조로 대답했다.
비밀로 하겠다고 신의 이름으로 맹세한 이상,합리적인 약간의 거 짓말은 신도 용서하실 것이 분명 했다.
"쳇,역시 용병인가. 바닥까지 쓸 어 가는군."
그녀의 말에 안젤로 부기사단장 은 인상을 찌푸렸고,두 상인도 작은 목소리로 험담했다.
싸우는 모습은 평범한 용병답지 않았지만,결국 그들도 돈을 최고 로 여기는 지저분한 용병들이었다.
대수림으로 파견된 레타니아의 특수 부대는 첫 던전 탐사를 흘륭
하게 마무리 지었다.
제국에 파견되었던 스파이들이 조직을 박살 내면서 얻어 온 정보 가 이 탐사로 인해 사실이라고 확 정받을 수 있었다.
그렇기에 던전에서 구한 마법 아 이템보다 이 탐사의 성공이 훨씬 큰 값어치가 있었다.
같이 온 용병대의 입장에서도 이 탐사에서 고대 금화 덕분에 나름 나쁘지 않은 결과를 얻게 되었다.
하지만 그들은 자신들과 함께 온 상인들과 그 호위 용병들에 대해 많은 의문을 가지게 되어 기분이
좋지만은 않았다.
한편,제이크에게 이번 탐사는 충분히 만족스러웠다.
중간에 난입한 상인 용병대 때문 에 엄청 놀라긴 했지만,덕분에 레타니아 왕국,혹은 남부 왕국들 에게 제국의 비밀이 탄로 난 것을 알게 되었다.
뿐만 아니라 목표했던 마법 아이 템도 구할 수 있었다.
던전에 있던 모든 유물을 독점하 지 못했지만,오히려 오늘 얻은 정보를 이용하면 훨씬 많은 유물 을 얻을 수 있을지도 몰랐다.
그동안 제이크는 황제의 눈 때문 에 알고 있던 많은 던전 위치를 방치하고 있었다.
황제가 알고 있는 던전을 미리 그가 털었다가 들키기라도 한다면 황제에게 그의 생존 사실을 들킬 지도 몰랐기 때문이었다.
그렇기에 황제가 죽은 뒤에 발견 된 던전만을 찾아다녔던 것이었다.
그런데 이렇게 남부 왕국에서 온 자들이 설치게 된다면 앞으로 제이크가 벌이는 일들을 이들에게 뒤집어씌울 수가 있었다.
'루이의 누나에게는 미안한 일이 지만,이런 기회를 놓칠 수는 없지.'
배낭 속에 들어 있는 고대 금화 에 기뻐하는 제시카 옆을 걸으며 제이크는 속으로 미소를 지었다.
그렇게 서로 다른 생각을 하던 언데드 던전 탐사대는 분지를 완 전히 나오자마자 서로 갈라지게 되었다.
제이크 일행이 나머지 탐사대원 들과 헤어진 것이다.
상인 일행과 같이 움직인다면 많 은 인원이 움직임으로 좀 더 안전
해질지도 모르겠지만,제이크 일 행에게는 불편함이 더 컸다.
그들과 같이 움직이면 제이크가 마법을 쓸 수 없게 되고,배낭 속 에 들어 있는 마법 아이템들도 꺼 낼 수 없었다.
더구나 일행의 능력으로도 충분 히 덤벼 오는 대수림 몬스터들을 처리할 수 있으니, 상인 일행은 제이크 일행에게는 불편한 혹일 뿐이었다.
다행히 상인들도 제이크 일행이 껄끄러웠는지 떠나는 일행을 막지 않았고,다만 레이 사제만이 일행
을 배웅해 주었다.
"곧 찾아뵙도록 하죠."
담담히 말하는 레이 사제의 목소 리는 마치 하숙집을 방문하겠다는 학부모의 목소리 같아,제이크의 등골이 조금 서늘해졌다.
얼마 뒤,제이크 일행은 루테리아 시로 돌아왔다.
역시 소수로 움직이는 편이 빨라 서 그런지,일행은 상인 일행보다 먼저 돌아올 수 있었다.
성문을 들어오기 전에 루이가 입 었던 판금 갑옷을 배낭에 넣어 둔
덕분에,일행에 대한 관심은 예상 보다 크지 않았다.
하지만 그래도 매번 소수로 나갔 다가 무사히 돌아오는 제이크 일 행에 대한 관심은 그리 작은 편이 아니었다.
"루이가 판금 갑옷 그대로 걸치 고,제이크 네가 마법 지팡이라도 들고 있었으면 아주 난리 났겠어."
일행을 힐끔거리며 쳐다보는 사 람들을 보고 제시카가 히죽 웃어 보였다.
그런 그녀를 향해 '여왕벌'이라는
소리가 들려왔지만,그녀는 쿨하 게 그 말을 무시해 주었다.
"앞에 나서서 말하지도 못하는 놈들이……
그동안 겪은 일에 비하면 이런 비방은 애교 축에도 들지 못했다.
일행은 바로 용병 사무소에 들러 복귀를 신고한 뒤,당연하다는 듯 이 다즐링 여관으로 향했다.
탐사가 끝나기만 하면 제시카가 매번 들리는 바람에 다른 일행도 따라오게 된 것이다.
제이크가 느끼기에는,이제는 무 슨 징크스처럼 여겨질 정도였다.
"무사히 정말 돌아오셔서 다행이 에요."
일행이 들어오자 제니가 외박한 남편을 맞이하는 얼굴로 달려왔다.
그러고는 루이와 제이크를 번갈 아 보며 행복한 표정을 지었다.
일행이 자리에 앉을 때까지 그녀 의 표정이 변하지 않자,제시카가 피식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
"이상한 생각하지 말고 주문이나 빨리 받아."
그 말에 제니가 발끈했다.
"이상한 생각이라뇨!"
"빤히 보이거든? 계속 서 있지만 말고 얼른 맥주하고 식사 좀 가져 다줘. 일이 많아서 피곤해."
"홍,알았어요."
제시카의 놀림에 한껏 토라진 표 정을 한 제니가 부엌으로 들어갔다.
"아이고,힘들어라. 예상치 못한 일이 생기는 바람에 이번 탐사는 꽤 정신없었네. 그래도 루이는 좋 았겠어,어릴 때 헤어졌던 누나를 만나서."
"네,다행히 잘살고 있었네요." 담담히 대답하는 루이를 보고 예
시카가 입을 쭉 내밀었다.
"쳇,헤어졌던 가족을 만났으면 감동의 눈물을 흘리든가 해야지, 그게 뭐야? 하여튼 우리 파티의 남자들은 전부 다 재미가 없다니 까."
"저는 그래도 루이 정도로 무뚝 뚝하지는 않습니다만."
그녀의 말에 바로 제이크가 반대 했지만,오히려 불 난 집에 부채 질을 한 꼴이 되어 버렸다.
"넌,더 나빠. 머릿속에 든 능글 거리는 늙은이 때문에 소름 돋는 게 한두 번이 아니란 말이야!"
틀린 말이 아니었기에 제이크도 꿀 먹은 벙어리가 되었고,제시카 의 푸념은 한동안 이어질 수밖에 없었다.
"밖에서는 여왕벌 어쩌구로 불리 는 건 상관없는데,그러면 여왕벌 스러운 재미라도 있어야지. 억울 해서 못 살겠다니까!"
그녀의 푸념은 식사가 나온 뒤에 야 멈췄다.
그제서야 일행은 식사 후 가볍게 맥주를 마시며 제대로 된 이야기 를 나누기 시작했다.
"우리가 하는 이야기가 밖으로
나가는 것은 막았습니다. 걱정하 지 않으셔도 됩니다."
"오,역시 우리 마법사님. 다재다 능하시다니까?"
제이크의 말에 제시카가 엄지를 치켜세웠다.
"그럼 올 때 말한 것처럼 주변에 상인들에 대한 소문을 마구 퍼트 리면 되는 거지?"
"네,과장하지 말고 사실대로만 이야기하시면 됩니다. 다만,사람 들이 알지 못하는 여러 던전을 알 고 있다는 듯한 이야기를 좀 더 추가해 주시고요."
"뭐,그 정도야 쉽지. 어차피 서 로 경쟁 상대인데 거짓말을 하는 것도 아니고,상관없어."
제시카는 이번 탐사에서 남부 왕 국의 상인들에게 유물을 빼앗긴 것을 마음에 담아 두고 있었던 모 양이었다.
그녀는 제이크의 요청에 신난 표 정으로 상인들에게 엿을 먹일 계 획을 세우기 시작했다.
제시카와 이야기를 마무리 지은 다음,제이크는 루이를 바라보았다.
"누나가 상인들과 같이 있는데
괜찮겠어?"
"상관없어요. 그때 잠깐 이야기 해 보았는데,그리 가까운 사이는 아니더라고요. 뭐,다들 이곳에 올 때 처음 봤다고 하니. 교단도 그 리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는 것 같 아요."
그래도 던전을 나오는 동안에 루 이와 여사제가 여러 가지 이야기 를 한 모양이었다.
다행히 레이 사제의 교단과는 제 국의 비밀이 공유되지 않는 듯해 조금 안심이 되었다.
하기야 아는 사람이 적을수록 좋
은 이야기였다.
자신이 제시카에게만 이야기한 것처럼,남부 왕국들에서도 일부 만 알고 있을 게 분명했다.
제이크는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자칫하다가는 적이 될지도 모르 는 사람들이었다.
괜히 나중에 싸움이 붙었을 때 루이의 누나 때문에 일이 어긋나 면 곤란했다.
그렇게 일과 관련된 이야기가 끝 나고,다시금 술판이 벌어졌다.
제시카는 결국 나가떨어져,루이
의 등에 업힌 채로 새벽녘이 되어 서야 저택으로 돌아왔다.
다음 날.
하루 늦게 루테리아 시로 돌아온 레이 사제가 약속한 대로 제이크 의 저택에 방문했다.
정문에서 신기한 표정으로 그녀 를 지켜보는 청년들을 지나 저택 으로 다가가다가,그녀는 우뚝 걸 음을 멈추었다.
그녀는 저택과 담벼락을 바라보
다가 저택 뒤쪽의 동산 쪽으로 시 선을 향했다.
그러다가 갑자기 땅을 내려다보 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알아차린 건가?"
-설마요. 그렇게까지 신력이 높 지는 않겠죠. 그 정도면 성녀급 신력일 텐데요.
"그거야 알 수 없지. 어쨌건 더 이상하게 생각하기 전에 나가야겠군."
공방에서 마법 지팡이와 씨름을 하던 제이크는 손을 흔들어 저택 밖을 보여 주는 마법을 지웠다.
던전을 만들 때 전생의 CCTV를 흉내 내서 설치한 마법으로,이제 제대로 핫 스팟의 마나를 사용할 수 있게 되어 나름 쏠쏠하게 쓰는 중이었다.
-재미있는 구현 방식이지만,마 나 낭비예요.
마법 스승인 파티마는 마음에 안 드는 모양이었지만,자신이 만족 하면 그만이었다.
제이크는 마법 지팡이의 마법진 을 마지막으로 확인했다.
리치가 쓰던 이 마법 지팡이는 마나 사용자들이 된 다른 파티원
들과 수준을 맞추기 위해 구한 마 법 아이템이었다.
암흑 마법 쪽에 특화된 마법진만 수정이 끝나면 제이크 자신도 세 상에 자신을 드러낼 수 있게 될 것이었다.
하지만 아직은 조금 더 시간이 필요할 것 같다.
"찾아온 손님부터 만나 봐야겠 지."
제이크는 공방 중앙에 떠 있는 마석을 향해 마법 지팡이를 던졌 고,지팡이는 마석 위로 떠올라 허공을 맴돌았다.
지팡이는 허공에 뜬 상태로 마석 으로부터 마나를 흡수하기 시작했다.
그와 함께 지팡이에 새겨진 마법 진이 점점 진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