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2화
그날,레이 사제는 저택을 한참 둘러보았다.
나름 이상한 느낌을 받은 모양이 었지만,다행히 그녀는 별말을 하 지 않았다.
그러고 나서,레이 사제는 제이크 일행과 서재에 모여 이야기를 나누었다.
"백작 아들이 있으니 교단 근처 로 오기는 힘들겠네."
레이 사제는 어떻게 루이가 용병 이 되었는지 자세히 듣고는 그가 이곳에 있는 게 제일 좋다는 것을 이해했다.
물론 데리고 가지 않는 데에는 루이의 상황 이외에 다른 이유도 있어 보였다.
하지만 무표정한 그녀의 얼굴에 서 그 이유를 찾기는 어려웠다.
"그리고 레이 사제님도 최대한 빨리 교단으로 돌아가시는 것이 좋겠습니다."
루이의 일이 마무리되자,제이크 는 그녀에게 도시를 벗어날 것을 권했다.
"아무래도 그 상인들과 같이 있 으면 위험할 겁니다."
당연히 제국에 위장을 한 채로 들어왔으니 위험할 법했지만,제이크의 말은 그런 뜻으로 한 것이 아니었다.
그리고 레이 사제도 제이크의 말 을 알아들었다.
"그들에게 안 좋은 일이 생길 거 라는 이야기인가요?"
그녀의 물음에 제이크가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 그 안 좋은 일의 일부는 제이크에게도 책임이 있기는 했지만,그것까지 말해 줄 필요는 없었다.
"뭐,사제가 필요한 던전은 더 없을 테니 먼저 돌아간다고 말을 하면 되기는 한데…… 루이,너도 내가 돌아가면 좋겠어?"
누나의 물음에 루이가 바로 고개 를 끄덕였다.
"응,위험할 거야."
진지하게 말하는 루이를 보는 레 이 사제의 얼굴에 묘한 미소가 슬 쩍 떠올랐다.
"지금 네 표정이 어렸을 때 위험 하다며 나를 말릴 때하고 똑같아. 그때 아마,동네 악동들을 혼내 주려고 만든 함정에 내가 다가갔 을 때였지?"
레이 사제의 말에 루이의 표정이 난감해지자,제이크는 속으로 한 숨을 내쉬었다.
-다 알아차린 것 같은데요?
-어쩔 수 없지. 적은 안 될 것
같으니 다행이라 해야 하나.
아무래도 루이에게는 앞으로 중 요한 이야기를 하는 것은 무리일 듯했다.
"알겠어요. 최대한 빨리 교단으 로 돌아가도록 하죠."
루이의 말을 듣고 레이 사제는 돌아가기로 했다.
그녀는 저택을 떠나면서 제이크 에게 루이를 부탁했다.
"동생을 부탁할게요. 나이를 이 렇게 먹고도 멍청,아니,순진한 것은 그대로라 걱정이 많이 되네요."
"네,걱정하지 마세요."
"그렇게 말해 주시니 어느 정도 안심이 되네요. 참,그리고 나중에 레타니아에 오실 일이 있으면 교 단에 한번 들르세요. 아마 도움이 되실 거예요."
말을 하는 도중에 그녀의 눈에 신력이 살짝 머물다 사라진 것으 로 봐서는 신이 알려 준 예지일 듯했다.
상인들에게 돌아간 레이 사제는
얼마 지나지 않아 루테리아 시를 떠났다.
갑작스러운 그녀의 결정에 상인 일행은 의아했지만,그녀가 떠나 는 것을 막지는 않았다.
남은 던전들은 그녀의 도움이 많 이 필요치 않은 곳들뿐이었기 때 문이다.
또한,사제가 보기에는 좋지 않 은 일들이 벌어질 앞으로의 탐사 때문에도 그녀가 빠져 주는 편이 오히려 좋을 수도 있었다.
레이 사제가 떠난 후,상인 일행 은 계속 대수림을 방문했다.
용병대와 같이했던 던전 탐사와 그들만으로 행하였던 탐사가 이어 지면서,그들의 소문은 시 전체로 퍼져 나갔다.
* * *
몇 개월 뒤.
레타니아에서 온 가짜 상인과 기 사단 일행은 임대한 개인 주택의 한 방에 모여 심각한 얼굴로 이야 기를 나누고 있었다.
오늘 회의 내용은 계속된 탐사 성공으로 들떴던 기분을 바로 곤
두박질치게 만드는 내용이었다.
"아무래도 서둘러야 할 것 같습 니다."
상인 중 한 명인 산치스가 먼저 입을 열었다.
"그 정도인가?"
안젤로 부단장의 표정이 굳어졌다.
아직 찾아보아야 할 던전이 남아 있었다. 벌써 돌아가기에는 아쉬 움이 너무 컸다.
"네,너무 소문이 많이 났습니다."
"어느 정도 소문은 날 수밖에 없
잖은가."
첫 탐사 이후로 최대한 용병대를 안 쓰고 자신들만 움직였지만,그 렇다고 아예 소문이 안 날 수는 없었다.
"하지만 이 정도로 날 줄은 예상 하지 못했습니다. 소문 자체가 너 무 과장되게 났습니다. 이 정도면 제국 쪽 기사들이나 이곳 영주들 에게도 소문이 들어갔을 가능성이 큽니다."
또 다른 상인,부폰이 어두운 얼 굴로 입을 열었다.
자신들이 한 일이 아닌 것까지
자신들이 벌인 것처럼 소문이 나 고 있었다.
이래서야 위까지 이야기가 올라 가지 않을 리가 없었다.
두 첩자의 말에 부기사단장이 거 칠게 턱을 쓰다듬으며 생각에 잠 겼다.
'제국 황제가 아는 던전은 아직 건드리지 않았는데……'
다른 이들은 알지 못했지만,지 금 이들이 찾아다니는 던전은 황 제가 알고 있는 던전과는 다른 던 전이었다.
그는 탐사하는 던전이 황제가 알
고 있는 던전과 최대한 겹치지 않 게 무던히 노력하고 있었다.
하지만 이렇게 소문이 나 버리면 그동안의 노력이 무의미해져 버릴 게 분명했다.
"왜 이렇게 소문이 퍼진 거지?"
"잘 모르겠습니다. 동시다발적으 로 난 소문이라,출처도 찾을 수 가 없습니다. 같이 다닌 용병대 놈들도 떠들고 다니고,처음 던전 에서 만난 여자 용병도 술자리에 서 신나게 자랑하는 모양입니다.." 부단장은 용병들이 비밀을 지킬 거라고는 처음부터 기대조차 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들 정도로는 이 정도까 지 소문이 퍼질 리가 없었다.
더구나 부단장은 여자 용병 이야 기에 여태 자신을 찾아오지 않는 소년 방패 용병이 떠올라 눈살을 찌푸렸다.
아무래도 사람을 잘못 본 모양이 었다.
착실한 기사감이라고 생각했었는 데,다른 이들처럼 돈을 쫓는 용 병이었던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그걸 떠올릴 때가 아니었다.
"그건 처음 던전 때 만이잖아."
"그 뒤로 알아서 소문이 늘어나 는 것 같습니다. 원래 소문이란 게 그런 법이긴 한데……
부폰은 자신도 더 이상 어쩔 수 없다는 듯이 말끝을 흐렸다.
잠시 고민하던 부단장은 결정을 내렸다.
"앞으로 한 곳을 더 탐사한 뒤에 귀환하기로 하지. 제일 중요한 정 보 확인을 끝냈으니,아쉽지만 물 러가도록 해야겠어."
부단장의 말에 모두 얼굴이 밝아 졌다.
어쨌거나 자신의 왕국이 아닌 제 국의 땅이었다.
더구나 기사들은 용병인 척하느 라 고생이 이만저만이 아니었기 에,돌아간다는 말에 더욱 기뻐했다.
"용병대를 모집하도록. 제대로 큰 던전을 탐사하기로 하지."
어차피 마지막 탐사였다.
부기사단장은,이번에는 황제 기 사들이 찾는 던전 중에서 고르기 로 했다.
* * *
같은 시간.
황제가 두 번째로 보낸 기사들은 모집한 용병들과 함께 대수림 깊 숙한 곳에 있는 던전에 들어와 있 었다.
용병들을 던전 밖으로 세워 둔 채,던전 깊숙한 석실에 도착한 그들은 텅 빈 석실을 보고 사방으 로 분노를 토해 냈다.
"또 텅 비었어! 이게 말이 돼?"
제일 선임인 기사가 화를 주체하 지 못해 버럭 소리를 지르자,다 른 기사들도 심각한 표정으로 주
변을 둘러보며 말했다.
"한 번이 아니라 두 번이면 우연 은 아닌 듯합니다."
우연이 아니라면 누군가가 자신 들보다 먼저 이 던전에 왔었다는 말이 된다.
"하지만 여기는 아는 사람이 있 을 리가 없어! 황제 폐하가 알려 주신 곳인데 누가 안단 말이야!"
수백 년 동안 이어진 일이었다. 그동안 이런 일이 생겼다는 이야 기는 들어 본 적이 없었다.
"하지만 박쥐 떼가 남긴 핏자국 이나 다른 흔적을 보면 얼마 전에
털린 게 분명합니다."
"젠장! 저번 던전에서 자세히 살 피지 않은 게 잘못이었어.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이지?"
이해가 되지 않았지만,눈앞에 증거가 있으니 외면할 수 없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범인일지도 모르는 자들의 소문을 들었다는 것이었다.
"소문으로는 굉장한 속도로 던전 을 찾아내는 자들이 있는 것 같았 습니다."
"그 남부 상인들 이야기인가?" 부하의 이야기는 그도 아는 내용
이었다.
"네,이곳에 온 지 몇 달도 되지 않아,벌써 네 개 이상의 던전을 털었다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그게 말이 돼?"
하지만 자세한 내용은 처음 듣는 것이라,그는 무척이나 놀란 표정 이었다.
"이전에 황제 폐하가 보내신 기 사들 이외에는 처음 있는 일이라 용병들 사이에서도 말이 많습니다."
"아무래도 그놈들일 확률이 높겠 지?"
"방법은 모르겠지만,그럴 가능 성이 큽니다."
그렇다면 그들을 그냥 놔둘 수는 없었다.
"이런 식으로 가다간 폐하의 명 령을 수행하지 못할 가능성이 커. 그랬다가는 우리 목이 멀쩡할 리 가 없지."
"보고하실 생각입니까?"
부하의 말에 기사는 고개를 끄덕 였다.
"예상치 못한 일이니 우선 보고 해야지. 그리고."
"체포할까요?"
이번에는 그의 고개가 좌우로 움 직였다.
"아니,이번에 돌아가서 놈들 뒤 를 밟는다. 그 현장을 직접 덮치 는 게 가장 좋은 방법이니까."
"알겠습니다. 폐하께는 돌아가서 바로 보고를 올리겠습니다."
결정을 내린 기사들은 던전 밖으 로 나간 뒤, 용병대를 이끌고 협 곡을 빠져나갔다.
그들의 모습이 더는 보이지 않게 되자,협곡의 한쪽 숲에서 몇 개 의 덤불이 형태를 바꾸기 시작했다.
잠시 뒤,덤불이 사람의 형태를 갖춰 가더니,곧 제이크 파티로 변했다.
제이크가 일행 모두를 마법으로 숨겼던 것이다.
"아무래도 일이 커지는 것 같은 데……
일행이 사라진 방향을 보며 제시카가 나지막이 혀를 찼다.
두 번이나 황제 기사들을 허탕 치게 한 이들은 바로 제이크의 파 티였기 때문이다.
상인들과 만난 뒤,제이크 파티 는 황제가 알고 있을 던전까지도
마구 뒤졌다.
들킬 것을 각오하고 한 일이었지만,막상 두 번이나 들키고 보니, 협곡을 떠나는 기사들의 표정이 심상치 않았다.
하지만 제이크 일행은 별로 걱정 하지 않았다.
그도 그럴 것이,그동안 벌어진 일은 모두 상인들에게 뒤집어씌웠 기 때문이다.
마음에 걸렸던 레이 사제도 잘 설득해서 미리 돌려보내고 나니, 그들은 더 이상 상인인 척하는 이 들에게 자신들의 소행을 덮어씌우
는 데 주저함이 없었다.
"일이 커진다고 이번에 얻은 물 건을 돌려줄 생각은 없잖습니까?"
"당연하지,미쳤다고 돌려줘? 덕 분에 우리,부자가 되었잖아."
상인들이 세 던전을 터는 동안, 제이크 파티는 던전 네 군데를 털 었다.
그러면서 제이크 파티는 마법 아 이템 몇 개와 고대 금화들,그리 고 고대 마도 제국의 골동품까지 도 얻을 수 있었다.
덕분에 지금 제이크의 던전에는 마법 아이템이 차곡차곡 정리되고
있었고,제시카의 주머니는 고대 금화로 두둑해져 있었다.
그때,제시카가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하지만,저들이 뭔가…… 일을 벌일 것 같지 않아?"
하지만 제이크는 전혀 개의치 않 는 듯이 말했다.
"저들 생각이야 뻔하죠. 이럴 게 아니라,저희도 빨리 돌아가죠. 다 음 쇼에 참가하려면 서둘러야 해요."
"다음 쇼라는 건 또 뭐야?"
"그동안 벌인 일의 결과물이죠.
보면 아실 겁니다."
제이크의 말에 제시카는 입을 삐 죽 내밀었지만,그는 더 이상 설 명해 줄 생각이 없어 보였다.
그리고 말을 하는 제이크의 팔에 는 그동안 손을 보았던 마법 지팡 이가 들려 있었다.
그렇게 제이크 파티도 유물을 담 은 배낭을 짊어지고 협곡을 떠났다.
협곡 중간 벽에 나 있던 빈 동굴 은 사람들이 떠나자 다시 박쥐 떼 들이 하나둘씩 돌아오기 시작했다.
며칠 뒤.
상인 일행은 첫 던전 탐사 때 같 이 움직였던 용병대와 함께 마지 막 던전 탐사를 떠났다.
그 뒤를 황제가 보낸 기사들이 쫓았다.
그리고 기사들에게 심어 놓은 마 나를 따라 제이크 파티도 움직이 기 시작했다.
며칠이 지나,목적지에 도착한
제이크는 심각한 표정이 되었다. 상인 일행과 몰래 뒤를 따르던 기사들도 이미 안개 속으로 들어 가 보이지 않고 있었다.
"왜 그래?"
"아무래도 계획을 바꿔야겠습니다."
원래는 황제 기사들과 남부 상인 들의 다툼을 지켜보다 몰래 유물 을 챙길 생각을 했던 제이크였다.
하지만 이곳은 그런 편한 생각으 로 움직일 수 있는 곳이 아니었다.
안개 낀 늪지대도 그리 좋은 환
경은 아니었지만,그 늪지대 중심 에 있는 던전은 늪지대보다 몇 배,몇 십 배 위험한 곳이었다.
그곳은 또 다른 에고 아이템이 잠들어 있는 던전.
그리고 복제 세상의 제시카가 목 숨을 잃었던,바로 그 던전이었다.
"우리는 들어가지 않습니다. 이 곳에서 기다리죠."
제이크는 갸웃거리는 제시카를 굳은 표정으로 바라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