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하급 서기관의 회귀-58화 (58/222)

58 화

황제 기사들과 상인들이 사라진 지 한 달이 훌쩍 넘은,낙엽이 붉 게 물든 가을.

일단의 기사들이 루테리아 영지 의 성문을 거쳐 영주의 성으로 말

을 타고 달려갔다.

그로 인해 길 곳곳에서 기사들을 피하느라 소란이 일어났지만,굳 은 표정의 기사들은 그런 소란을 모두 무시한 채로 영주의 성으로 향했다.

기사들은 내성 앞에서 말을 멈추 었지만,제국 수도 기사단의 휘장 만큼은 성 앞에 있는 자들에게 강 한 압력을 가했다.

다만,성문을 지키고 있는 레인 저가 이런 위압감을 못 버틸 리가 없었다.

"책임자분들은 따라오시고,나머

지 분들은 숙소로 안내하겠습니다."

담담히 말하는 레인저의 말에 일 행의 책임자로 온 선임 기사 주크 베인은 말을 남겨 둔 채로 레인저 를 따라 움직였다.

뒤에 남은 다른 기사들은 사용인 들을 따라 숙소로 향했다.

"공작님께 가는 길이 아니었나?" 레인저는 성 안으로 들어가는 것 이 아니라 성벽을 타고 성의 뒤쪽 으로 움직였다.

당연히 집무실이나 영접실에서 공작을 만날 줄 알았던 기사는 레

인저의 안내에 의문을 품을 수밖 에 없었다.

"아,지금은 집무실이 아니라 후 원에 있는 연무장에 계십니다. 지 도 대련 중이시라 그런 것이니 양 해 부탁드립니다."

'지도 대련?'

펜대나 잡고 있는 귀족이 아니 라,실력 있는 기사라는 것은 이 미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아무리 그렇다 하더라도 공작이 직접 지도 대련에 나선다 는 것은 그로서는 무척이나 의아 한 일이었다.

그의 의문 섞인 눈을 보고서도 길을 안내하는 레인저는 그의 궁 금증을 풀어 줄 생각이 없어 보였다.

잠시 나름 정갈한 화원을 지난 뒤,기사는 크지 않은 연무장을 만나게 되었다.

성안에 있는 곳이라 크기는 크지 않았지만,그래도 정병이 훈련하 는 연무장답게 구색을 잘 갖춰 있 었다.

한쪽에는 잘 관리되어 햇빛이 번 쩍이는 무기들이 무기대에 늘어서 있었고,다른 쪽에는 훈련용으로

사용할 보조재들이 쭉 세워져 있 었다.

그리고 그 연무장 가운데에는 레 인저 복장을 한 사람들이 꽤 많이 보였다.

그런데 레인저들은 훈련하는 것 이 아니라 연무장을 둘러서서 열 심히 다른 이의 대련을 구경하고 있었다.

자세히 보니,안내한 레인저가 말한 대로 루테리아 공작이 레인 저 복장을 하고는 다른 사람과 대 련을 하고 있었다.

상대는 판금으로 만들어진 전신

갑옷을 착용하고 있어 어떤 사람 인지 알 수가 없었다.

'뭐,투구를 제친다고 알 수 있 는 것도 아니고,하긴,공작님과 대련을 하려면 저 정도 갖춰 입지 않으면 곤란하겠지. 더구나 아직 마나도 못 다루는 것 같으니

그의 생각대로,판금 갑옷을 입 은 자는 기사인 공작의 검의 속도 를 따라가지 못했다.

마나를 다루는 자와 그렇지 않은 자의 차이는 지금도 여실히 드러 나는 중이었다.

공작의 검은 상대의 갑옷을 계속 두드리는 중이었고,이미 한참을 두들겨 맞았는지 갑옷도 멀쩡한 상태가 아니었다.

하지만 잠시 대련을 지켜본 주크 베인은 곧 눈을 크게 뜰 수밖에 없었다.

제국에서 유명한 공작의 검술은 예전부터 알고 있었지만,상대의 검술과 움직임은 그를 무척이나 놀라게 하였다.

판금 갑옷을 둘러쓴 자는 마나를 익히지 못해 공작의 반도 안 되는 속도로 검을 휘두르고 몸을 음직

이고 있었다.

그런데 그런 상태에서도 그자가 공작의 움직임을 얼추 따라가고 있었던 것이다.

검과 검이 마주칠 때는 검을 흘 리고,갑옷을 향해 검이 날아올 때는 최대한 피하고,혹은 피하지 못하면 갑옷 면으로 흘리며 공작 을 상대하고 있었다.

물론 공작도 마나를 일으키지 않 고 싸우고 있었지만,마나를 깨달 은 자의 육체는 마나를 몸에 돌리 지 않아도 평범한 인간을 훨씬 초 월한다.

그런데 그런 이를 상대로 저런 몸놀림이 라니.

'설마,공작보다 검술이 좋은 건 아니겠지?'

자신의 얼토당토않은 생각에 속 으로 헛웃음을 치는 사이에 공작 과 판금 갑옷의 대련이 끝이 나 버렸다.

"제국의 수도에서 수도 기사 일 행이 왔습니다."

그를 안내했던 레인저가 공작에 게 보고를 올렸기 때문이었다.

레인저의 말을 들은 두 사람은 바로 대련을 멈췄다.

전혀 호흡에 변화가 없었던 공작 과 달리,판금 갑옷은 검을 땅에 짚고는 격하게 숨을 몰아쉬었다.

마나가 없는 몸이었기에 대련만 으로 지쳐 버린 것이었다.

주크베인은 나름 안타까운 마음 이 들었지만,지금은 더는 판금 갑옷에 신경을 쓸 때가 아니었다.

"수도 기사단,1대 선임 기사 주 크베인입니다. 황제 폐하의 칙령 을 가져 왔습니다."

공작 앞으로 나아간 그는 한쪽 무릎을 꿇고 가슴에 품어 온 두루 마리를 앞으로 내밀었다.

바로 뒤쪽에 물러서 있던 흐린 얼굴의 귀족이 나와 그에게서 두 루마리를 받더니 공작에게 전달했다.

공작은 힐끗 주크베인을 쳐다보 고는 그 자리에서 황제의 인장을 뜯고 두루마리를 펼쳤다.

공작의 행동에 주크베인은 고개 를 숙인 채로 눈살을 찌푸렸다.

하지만 다른 사람들은 공작의 행 동을 전혀 이상하게 여기지 않았다.

'과연 제국 속의 공국이라고 불 릴 만하네.'

영주들이 세를 떨치고 있는 남부 의 왕국들과 달리 제국은 이미 황 제의 권위가 제국 전체에 미치고 있었다.

물론 남부 왕국들처럼 영주가 각 지역을 다스리고 있는 형태이기는 했지만,영주들의 실권은 남부 왕 국처럼 강하지 못했다.

반신에 가까운 전지의 황제가 새 로 등극할 때마다 영지들을 쑥밭 으로 만들어 놓았기에,영주들은 황제의 권위를 침해할 생각은 꿈 도 꾸지를 못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런 제국에서도 제국답

지 않게 영주의 권위가 강한 영지 가 몇 곳 있었다.

그런 영지들 안에는 이곳 루테리아도 들어 있었다.

제국 건국의 공신의 후예에다가 대수림을 지켜 왔다는 자부심,그 리고 대수림의 몬스터를 막아 내 고 있는 실제적인 무력까지.

다른 귀족들은 이 영지를 황실 몰래 루테리아 공국이라는 부러움 이 섞인 호칭으로 부르고 있었다.

"전에 전령이 보낸 내용과 달라 지지 않았군. 레타니아로 보내기 위한 특사라……

여러 가지 미사여구가 가득 들어 있던 두루마리였지만,결국 쓰여 있는 내용은 간단했다.

황제가 보낸 기사들의 실종을 항 의하기 위해 공작 일가를 특사로 보내라는 명령과 그 호위를 위해 수도 기사들을 딸려 보내 준다는 내용이었다.

"항의보다는 협박일 테고,호위 보다는 감시겠지."

실제로는 그 뒤에 더 어두운 내 용이 숨어 있었으나,공작은 이 이상은 알 방법이 없었다.

공작의 무례한 말에 다시금 주크

베인의 얼굴이 찌푸려졌다.

그런데 공작의 말은 거기서 끝난 게 아니었다.

그는 고개를 돌려 아직도 숨을 몰아쉬는 대련 상대를 보며 말을 이었다.

"결심은 바뀌지 않은 거지? 원하 면 다른 형제를 보내도 상관없다 만."

공작의 말에 판금 갑옷은 몸을 쭉 펴고 투구에 손을 올렸다.

'의외로 몸매가 날렵한데?'

늘씬한 갑옷을 보고 고개를 갸웃 거린 주크베인은 곧 투구를 벗은

상대를 보고 입을 딱 벌리고 말았다.

투구를 벗은 상대는 남자가 아니 라 아름다운 여성이었고,그 여성 은 주크베인도 먼 곳에서 본 적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전 황태자비이자 비운의 공녀인 루이첼 공녀가 바로 그곳에 있었다.

이틀 뒤,루테리아에 들어온 수 도 기사단의 기사들과 두 명의 레

인저는 공녀와 마법사 앰버와 함 께 루테리아의 서쪽 성문으로 향 하고 있었다.

황제가 보낸 수도 기사단원들은 특사로 가는 사람이 공작의 아들 이 아닌 공녀라는 데 몹시 놀란 눈치 였다.

하지만 그렇다고 차마 그녀나 공 작에게 항의할 생각은 하지 못했다.

공작의 딸도 공작의 일가 중 한 명이었고,이틀 전 연무장에서 보 여 준 모습으로 자신의 몸 정도는 충분히 지킬 수 있다는 것을 보여

줬기 때문이다.

지금도 그녀는 가문의 휘장이 새 겨진 흉갑을 입은 채로 영지의 전 투마를 타고 영지민들의 인사를 받고 있었다.

드레스와 마차 대신 갑옷을 입고 말에 올라 인사하는 공녀를 보고 도 영지민들은 그리 놀라지 않았다.

제국의 다른 영지와 달리 이곳은 여자도 앞에 나서서 싸우는 곳이 었다.

또한,역대 영주 중에 검을 든 여자 영주도 있었기에 그리 특별

한 일이 아니었다.

수도 기사단들은 공녀가 특사로 가는 것을 항의하는 대신에 다른 부분에서 딴지를 걸었다.

바로 그녀를 호위하기 위한 레인 저의 인원 문제였다.

어쨌거나 공작가 외동딸이 밖으 로 나가는 것이었기에 공작은 레 인저 한 부대를 그녀에게 딸려 보 낼 생각이었다.

하지만 수도 기사단은 주크베인 을 대표로 레인저 부대의 출전을 막아섰다.

황제가 이미 자신들을 그녀의 호

위로 지정했다는 이유였다.

더구나 레인저까지 따라가기에는 다른 나라에 방문하는 기사들의 수가 너무 많아지기에,결국 따라 가는 레인저는 두 명으로 줄어들 어 버렸다.

대신 그녀는 친구인 앰버와 같이 가기로 했고,길 안내를 위해 작 은 용병 파티를 일행에 추가했다.

지금 그 용병 파티가 서쪽 성문 앞에서 공녀 일행을 기다리고 있 었다.

제이크와 제시카,그리고 루이 세 사람으로 이루어진 속칭 '여왕

벌' 파티였다.

"공녀님! 오랜만이에요!"

공녀 일행이 다가오자 제시카가 반가움에 크게 팔을 휘둘렀다.

일개 여자 용병이 공녀에게 행한 모욕적인 행동에 수도 기사단 모 두는 무척이나 놀란 모습이었다.

공녀는 손을 마주 흔들어 그녀의 인사를 받았다.

"와,갑옷 입으셨네요. 갑옷도 정 말 잘 어울리세요."

공녀가 가까이 오자 제시카가 더 욱 호들갑을 떨었지만,수도 기사 단은 오히려 그녀가 더 놀랍다는

듯 쳐다보았다.

그리고 그들의 시선은 곧이어 조 용히 옆에 서 있는 루이에게로 옮 겨 갔다.

제시카는 단단해 보이는 가죽 갑 옷에 옆구리에는 평범한 단검,그 리고 날렵해 보이는 부츠를 신고 등에는 크지 않은 배낭을 메고 있 었다.

그리고 루이는 특이하게도 조금 낡아 보이는 평범한 판금 갑옷을 걸치고,등에는 중검과 방패를 배 낭과 함께 메고 있었다.

모두 제이크가 추가로 은폐 마법

을 걸어 놓은 마법 아이템들이었다.

마법 아이템의 원래 모습들은 너 무 눈에 띄어,제이크가 한 달에 걸쳐 평범하게 보이는 마법 진을 새겨 놓았다.

그래서 비록 모습은 달라졌지만, 능력은 예전 그대로였다.

아름다운 마법 아이템을 망가뜨 렸다고 제이크가 제시카에게 한참 동안 들들 볶이기는 했지만 말이다.

그러한 이유로,기사들이 제시카 와 루이를 쳐다보는 이유는 그들

이 걸치고 있는 마법 아이템 때문 이 아니었다.

지잉,지잉.

기사들이 가까이 다가가자,기사 들 주변에 펼쳐져 있는 마나장이 다른 마나장을 만나 흔들렸다.

마나장이 흔들렸다는 것은 단 한 가지 원인밖에 없었다.

흔한 용병들이라고 생각했던 두 사람 모두가 마나 사용자들이라는 사실에,모두가 놀라 쳐다본 것이다.

기사들이 제시카와 루이에 놀라 고 있을 때,앰버는 제이크를 보

고 놀란 표정을 짓고 있었다.

"설마 마법사가 된 건 아니죠?" 제이크가 한 손에 마법사가 쓰는 지팡이를 들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녀의 말에 제이크는 고개를 저 었다.

"마법사용 마법 아이템입니다. 일종의 편법으로 마나 사용자가 된 것이죠."

제이크의 말에 앰버는 물론 다른 사람들까지 놀란 표정이 되었다.

다른 사람들은 새로 마나 사용자 가 추가 되었다는 것에 놀란 것이

었지만,앰버는 다른 것에 더 놀 라고 말았다.

"마법사용 마법 아이템이라니! 정말이에요?"

앰버는 번개같이 달려와 눈이 뚫 어져라 마법 지팡이를 바라보았다.

"세상에 처음 나온 마법사용 아 이템이에요. 세상에,말도 안 돼!"

앰버가 마냥 놀라는 사이,제이크는 파티마의 콧방귀를 계속 들 어야만 했다.

-누가 마.나. 사용자라고요? 편 법의 마나 사용자? 마법사께서 거

짓말을 정말 쉽게 하시네요.

-거짓말은 아니야. 대충 과장한 정도지.

-네,네,잘 알았습니다. 거기다 최초의 마법사용 마법 아이템이라 니,여기 마법사용 에고 완드가 있는데!

아무래도 파티마가 화난 이유는 제이크가 마법사를 숨긴 것 때문 이 아닌 모양이었다.

자기 대신 마법 지팡이가 최초의 마법 아이템으로 모습을 뽐냈기 때문인 듯했다.

제이크는 속으로 다시 한숨을 내

쉬었다.

그렇게 제이크 파티가 합류한 공 녀 일행은 성벽의 서쪽 문을 빠져 나가 남부 왕국을 향해 걸음을 옮 겼다.

그와 동시에 루테리아 시에서 매 한 마리가 하늘로 솟구쳐 제국의 수도를 향해 빠르게 날아갔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