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9 화
남쪽으로 향하는 여행길은 평화 롭고 한가로웠다.
대부분의 인원이 말을 타고,나 머지 인원은 마차를 타고 움직여 서 일행의 이동 속도도 무척이나
빨랐다.
제이크 파티도 나름 괜찮은 말들 을 구한 덕분에 공녀 일행에게 뒤 처지지 않을 수 있었다.
"그런데 대수림도 아닌데 길잡이 같은 게 필요한 겁니까?"
공녀와 함께 움직이는 제이크 일 행을 보고 수도 기사 하나가 선임 기사에게 작게 물어보았다.
"뭐,하녀 대신 잡일에 쓸려고 부른 거겠지."
흉갑을 입고 말을 타고 있는 그 녀였지만,제국에 몇 없는 공작의 외동딸이었다.
하녀나 하인,하나도 없이 길을 나섰으니 잡일을 할 사람이 필요 할 게 분명했다.
"하지만 그런 것치고 마나 사용 자가 둘이나 돼서…… 거기에 이 상한 마법 아이템을 들고 있는 용 병도 있고. 괜찮을까요?"
"뭐,그래 봤자 용병이야. 어차피 사람을 쓰려면 실력 있는 자를 쓰 고 싶었던 거겠지. 신경 쓸 필요 없어."
선임 기사가 고개를 흔들며 하는 말에 다른 기사는 더 이상 말을 꺼내지 않았다.
확실히,기사의 의문처럼 제이크 일행은 레타니아 왕국으로 가는 길을 알지 못했다.
공녀도 그런 사실을 잘 알고 있 었다.
그녀는 제이크 일행을 길잡이나 잡부로 부른 것이 아니라 자신의 사병으로 부른 것이었다.
앰버가 제시카의 실력을 충분히 보았고,그동안의 소문을 들으니 루이도 제법 대단한 방패 전사였다.
더구나 이번에 처음 안 것이었지
만,잠깐씩 그녀를 보며 기분 좋 게 웃는 제이크라는 어린 청년은 마법 지팡이를 쓸 수 있는 마나 사용자였다.
마법사용 마법 아이템이라는 것 이 어떤 것인지 공녀는 잘 이해가 안 되었지만,빠르게 강해지는 그 들을 보니 자신의 선택이 옳았던 것이 분명했다.
"와,마법진이 몇 개나 그려져 있는 거지? 정말 이 아이템은 마 법사의 마나로도 사용할 수 있네요. 그래서 제이크 몸에 있는 마 나가 다른 마나 사용자들하고 다
른 거였구나."
앰버는 제이크가 건네준 지팡이 를 계속 신기한 눈으로 살펴보는 중이었다.
다행히 그녀는 제이크가 마법 지 팡이를 가진 상태로 각성한 덕분 에 특이한 마나 사용자가 되었다 는 것을 수긍해 주었다.
덕분에 제이크는 편한 마음으로 말을 모는 중이었다.
"마법 아이템을 저렇게 막 건네 줘도 돼요?"
앰버가 지팡이를 살펴보는 모습 에 루이가 걱정되는 모양이었다.
앰버와 같이 다녀 보지 못했던 그로서는 그녀가 마법사라는 것 때문에 경계 중이었다.
기사들과 같이 자라 온 그에게는 제이크를 제외한 마법사는 호기심 이 가득한 욕심 많은 괴짜일 뿐이 었다.
하지만 제이크는 전혀 걱정하지 않았다.
두 번에 걸친 복제 세상에서의 경험으로 그녀는 믿을 수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그의 예상대로,앰버는 한숨을 내쉬며 제이크에게 마법 지팡이를
돌려주었다.
"그런데 다른 마법사에게는 함부 로 보여 주면 안 돼요. 욕심내는 마법사들이 많을 거예요."
그녀는 오히려 제이크를 걱정해 주었다.
"그런데 정말 신기하네요. 따로 마법을 배우지 않고 각성만으로 마법 아이템을 사용할 수 있다니, 아쉽네요. 이런 식으로 각성할지 미리 알고 있었다면 제대로 된 마 법사가 될 수 있을 수도 있었을 텐데."
그녀는 정말로 아쉬워하는 것처
럼 보였다.
마법사와 일반 마나 사용자와 다 른 것은 각성 시에 몸속에 강제로 마나를 뭉쳐서 서클을 만든다는 점이었다.
서클 없이 각성했다고 알려진 제이크로서는 이제 제대로 된 마법 사가 되기는 무리였다.
하지만 제이크는 이미 그녀에게 마법을 배운 적이 있었다.
파티마를 얻은 당시에 복제 세계 에서 1년간 그녀에게 지금의 마법 사가 마법을 쓰는 방법,마법 기 술자들의 마법 시전법을 배웠던
것이다.
물론,마나를 몸속에 가두지 않 는 고대 마법사였던 제이크로서는 이론적인 공부에 불과하긴 했지만,덕분에 많은 도움이 되었다.
하지만 그 일은 제이크만 기억하 고 있었다.
"말씀만으로도 진심으로 감사하 고 있습니다."
제이크는 복제 세상에서의 도움 을 감사를 담아 진심으로 그녀에 게 고개를 숙였다.
앰버는 제이크의 과한 인사에 꽤 난감해했다.
"바람둥이 마법사님, 이번에는 앰버 마법사님에게 마수를 뻗치는 중이신가요?"
허둥지둥 자신의 자리로 돌아간 앰버 대신에 제시카가 제이크 옆 으로 와서 그를 놀려 댔다.
물론 농담일 뿐이었지만,상당히 뼈 있는 농담이었다.
귀족으로서 배운 예절과 인생을 한 번 이상 겪은 노련함,거기다 전생에 습득한 여성에 대한 배려 가 그를 상당히 노련한 바람둥이 로 보이게 만들었던 것이다.
물론,어린 나이와 어딘가 초연
해 보이는 모습 때문에 대놓고 접 근하는 여성은 없었다.
하지만 소문은 이미 날 대로 나 있는 상태였다.
제시카의 말에 제이크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지만,그녀는 말 을 멈추지 않았다.
"거기다,공녀님 보면서 의미심 장한 미소를 짓는 건 또 뭐야. 뭔 가 노친네가 웃는 느낌이라 몸에 닭살이 돋았단 말이야."
"아,전에 본 모습이라서 그랬습 니다."
제이크의 말에 제시카는 그게 무
슨 뜻인지 알아차렸다.
지금 흉갑을 입은 공녀의 모습은 미래에 그가 보았던 황비의 모습 과 닮았던 것이다.
황도가 불타고 도망자가 되어 달아나는 동안,당시 황비였던 레이 첼 공녀는 입고 있는 드레스를 벗 어 던지고 갑옷을 입은 채로 사람 들을 지휘했다.
물론 기사급 정도의 실력은 되지 못했지만,그 기백은 일개 기사가 따라오지 못했다.
더구나 지금은 오랜 시간 궁궐에 갇혀 있던 그때와 달리 젊고 건강
했다.
앞으로 어떻게 될지는 모르겠지만,기대를 걸 수 있을 것 같았다.
* * *
새 황제가 즉위한 초반에 제국은 반란을 제압한다는 명목으로 많은 영주를 쓸어버렸다.
그래서 루테리아 밖으로는 제국 이 꽤 혼란스러웠지만,시간이 지 난 지금은 어느 정도 원래의 모습 으로 돌아가 있었다.
쓸려 나간 영주 대신 새로 부상 한 귀족들이 그 자리를 차지했다.
그러나 영지민들은 그에 상관없 이 세금을 내느라 허덕일 뿐이었다.
거기다 무슨 일인지 전보다 세금 이 과중되어,제국민들의 어깨는 더욱 무거워졌다.
그럼에도 겉으로 보기에는 평화 로운 제국이었다.
"한가롭네요."
루테리아 영지를 벗어난 뒤에도 일행은 무척이나 평화로운 여행을 하는 중이었다.
가을이 깊어진 계절이었지만 남 쪽으로 내려가는 동안에 날이 따 뜻해져서,일행은 더욱 여유로워 질 수밖에 없었다.
덕분에 꽤 긴장해 있었던 수도 기사들마저도 터덜터덜 말을 몰며 잡담을 나누었다.
그래서인지,일행은 길 중간에서 만난 남자를 보고도 그리 경계를 하지 않았다.
노새가 모는 지붕 없는 마차를 타고,만돌라를 등에 멘 여행복 차림의 남자.
흔하지는 않지만 모두 그가 어떤
일을 하는 사람인지 알고 있었다. 바로 노래하는 여행자,음유 시 인이었다.
그는 무슨 자신인지 이런 혼란한 시기에 혼자 여행을 하고 있었는 데,일행이 다가가자 길을 비켜 주는 대신 오히려 일행에게 다가 왔다.
"와,용맹한 황도의 기사 분들이 시군요! 거기다 아름다운 기사분 도 계시고. 오랜만에 저에게도 행 운이 찾아온 것 같네요."
음유시인은 역시 예상대로 입에 꿀을 바르고 있었다.
듣기 좋은 낭랑한 목소리로 일행 을 하나하나 칭찬을 하니 사람들 은 처음 보는 그에게 호감을 느끼 게 되었다.
그런 분위기를 느꼈는지,그는 더욱 일행에게 달라붙었다.
"혼자 여행하느라 겁이 나서 죽 을 뻔했다니까요. 루테리아는 그 래도 치안이 좋았는데 그곳을 벗 어나니 잠잘 곳도 여의치 않더라 고요."
여유롭게 마차를 모는 모습이 전 혀 그렇게 보이지 않았지만,사람 들은 그의 매끄러운 말솜씨에 이
상함을 느끼지 못하고 있었다.
"그런데 짠 하고 기사님이 나타 나신 겁니다. 제가 얼마나 황제 폐하께 감사했다고요."
더불어 진심이 섞인 듯한 아부가 쏟아져 들어가니 사람들은 그를 측은하게 여기기 시작했다.
"혹시,폐가 안 된다면 일행을 멀찌감치나마 따라가도 될까요? 잘 때 숙영지 근처에서라도 자게 해 주신다면 너무나 감사할 것 같 군요. 대신 불러만 주시면 지루한 밤을 즐겁게 만들어 드릴게요."
그는 두 손을 모으고 갈구하는
표정을 지었다.
"흠,어떻게 할까요? 그리 문제 는 없어 보이는데……
"글쎄,좀 떨어져서 온다면 별문 제는 없을 것 같군. 공녀님 생각 은 어떠신가요?"
공녀의 안전을 생각한다면 당연 히 거절해야 하는 일이었다.
그럼에도 음유 시인의 말발이 통 했는지 수도 기사들은 그의 부탁 을 들어주려고 했다.
"같이 가도록 하죠. 음유 시인의 노래와 이야기를 듣는 것은 여행 중에 가장 즐거운 일이니까요."
원래부터 다른 사람의 이야기를 듣는 것을 좋아하는 그녀였기에 멀리 뒤따라오는 것이 아니라 일 행과 함께 가는 것을 허락했다.
그녀의 말에 잠시 고민하던 기사 단의 선임 기사는 결국 그를 일행 에 합류시켰다.
"감사합니다,감사합니다. 덕분에 살았어요! 감사의 의미로 한 곡 올리도록 할게요."
공녀 뒤쪽에 합류한 음유 시인이 등에 멘 만돌라를 돌려 잡고는 먼 저 자기소개를 했다.
"저는 황제 폐하의 은혜 덕분에
제국을 여행하고 있는 천한 음유 시인,베른이라고 합니다."
모두에게 인사를 한 그는 곧 만 돌라를 튕기며 나지막이 허밍을 하기 시작했다.
가사는 거의 들리지 않는 노래였 지만,그의 목소리는 무척이나 아 름다웠고,사람들의 표정은 모두 부드러워졌다.
신기하게도 고삐를 놓았지만,나 귀는 알아서 일행을 따라 움직였다.
신비한 그의 노래는 한참 동안 계속되었다.
그렇게 모두가 나른한 즐거움에 잠겨 있는 동안 한 사람만이 음유 시인을 노려보고 있었다.
바로 뒤쪽에 따라오고 있던 제이크였다.
그는 음유 시인이 접근할 때부터 지금껏 계속 곱지 않은 시선으로 그를 지켜보았다.
베른이라고 자신을 소개한 음유 시인도 계속해서 그의 눈을 피하 는 중이었다.
-마나 방식도 다르고,사람을 현 혹하는 방법도 마법이 아니네.
-당연하죠. 기본적인 구조가 다
른데요. 사람을 홀리는 것은 일종 의 마나의 활용법이에요. 몬스터 가 능력을 사용하는 것하고 비슷 하다고 할까요?
-흠,그럼 저 모습도 실제 모습 이 아닌 건가?
-아마 그럴걸요? 사람에 정신을 간섭하는 능력은 마법사에게는 잘 안 통하지만,모습을 다르게 보이 게 하는 것은 방어하기가 쉽지 않 죠. 하지만 진실을 보는 눈이면 능력을 뚫고 본모습을 볼 수 있을 거예요.
-근데,여기는 나 말고도 마법사
가 있잖아.
-마법 기술자는 마법사가 아니 라고요! 상상력을 단련하지 않으 면 정신을 공격하는 기술에 쉽게 걸리고 말아요!
괜히 말을 꺼냈다가 파티마의 화 를 부르고 말았다.
제이크는 바로 주문을 외우기 시 작했다.
'내 눈은 진실의 눈,마나는 진 실의 창이 되어 세상의 진실을 보 여라 '
그가 속으로 주문을 외우자 제이크의 눈 위로 남들은 볼 수 없는
마나로 이루어진 마법진이 떠올랐다.
마치 서클 렌즈처럼 눈을 덮은 마나의 막 위에서,제이크는 세상 을 바라보았다.
세상은 전과 달리 좀 더 본래의 모습을 보여 주고 있었다.
그리고 제이크는 음유 시인의 모 습이 달라진 것을 알게 되었다.
잘생긴 얼굴과 훤칠한 키는 그대 로였지만,머리에는 털 달린 귀가 삐쭉 솟아 있었고,그의 등에는 흰색의 풍성한 꼬리가 좌우로 흔 들리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