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1 화
화려하지만 어두운 응접실.
황제의 침실과 연결된 응접실은 이미 환해진 밖과 달리 아직 어둠 에 휩싸여 있었다.
창은 커튼으로 가려져 있었고,
응접실은 은은한 초들만이 탁자에 서 불을 밝히고 있었다.
그리고 그 어둠 속에 아직 10대 인 황제와 늙은 대마도사가 자리 하고 있었다.
황제는 가운 차림으로 소파에 앉 아 여러 번 접힌 자국이 있는 쪽 지를 들여다보고 있었다.
대마도사는 탁자 반대편에 서서 조금 걱정되는 얼굴로 황제를 바 라보는 중이었다.
쪽지를 다 읽은 황제가 중얼거렸다.
"특사로 보낸 게 아들 중 하나가
아니라 하나밖에 없는 딸이란 건 가?"
그가 지금 보고 있는 쪽지는 수 도 기사단이 루테리아 영지를 떠 날 때 수도를 향해 날린 매에 묶 여 있던 것이었다.
그 안에는 일의 진행 상황과 루테리아의 대응, 그리고 제일 중요 한 특사에 대해 적혀 있었다.
수도 기사단이 날린 매는 패밀리 어 마법에 의해 조종되는 동물이 었고,황도의 마탑에서 관리를 하 고 있었다.
매가 마탑으로 가져온 쪽지를 본
대마도사가 부리나케 황제가 있는 곳으로 달려온 것이었다.
황제는 오랜만의 늦잠을 방해받 아 짜증을 났지만,그것도 잠시, 쪽지를 확인한 지금은 표정이 달 라져 있었다.
특사로 루이첼 공녀가 결정되었 다는 내용 때문이었다.
"칼은 커녕 말도 못 타 본 여자 였는데…… 특사라니. 어떻게 된 거지?"
황태자비로 준비했던 시절은 물 론,미래에 그와 살았던 시절에도 그녀는 말 한 번 타지 않고 황비
로 자리를 지켰었다.
그런 그녀가 특사라니,황제는 이해할 수가 없었다.
평생을 인내하고 살았던 그녀를 완고하고 꽉 막힌 황비로만 인식 하고 있었던 그로서는 그녀의 숨 은 모습을 알 도리가 없었다.
"일을 취소하는 게 어떻겠습니까? 아직 시간이 있으니 없던 것 으로 되돌릴 수 있습니다."
신음을 흘리는 황제의 모습에 대 마도사는 조심스럽게 권유를 했다.
레이첼 공녀는 대마도사도 무척
마음에 들었다.
당당하고 품위 있고,제대로 된 귀족답게 배려심도 있어 거친 황 태자를 품기에 딱 알맞은 배필이 라고 생각했다.
황제가 미래를 경험한 내용을 이 미 들어서 알고 있던 대마도사다.
그럼에도 레이첼이 충분히 황비 로서의 자격을 갖췄다고 생각하고 있었기에, 그는 황제가 그녀를 바 로 내치는 것을 안타깝게 여겼다.
하지만 황제는 이미 황비,아니, 레이첼 공녀에게 질려 있었다.
물론, 오랜 세월 같이 살았던 정
이 있기는 했지만,그 정 때문에 일을 멈출 정도는 아니었다.
황제는 잠깐 침실을 바라보았다 가 결정을 내렸다.
"그냥 진행하도록,이 기회에 과 거,아니,미래의 잔재를 치워 버 리는 게 좋겠어."
황제의 말에 대마도사는 차마 다 시 말을 꺼낼 수가 없었다.
말을 하는 황제의 눈에서 붉은 기운이 흘러나오는 것을 느꼈기 때문이었다.
물론 마나 같은 기운은 아니었지 만,눈에 보일 정도로 강렬한 살
기가 그에게서 흘러나오고 있었다.
"이미 잠에서 깨 버렸으니,일정 을 시작해야겠군."
한순간 뿜어낸 살기를 바로 거둬 들인 황제는 조금 풀어진 얼굴로 탁자 위의 종을 흔들었다.
그러자,응접실 밖에서 하녀들이 안으로 들어와 커튼을 걷었고,침 실에서도 두 시녀가 나와 황제의 시중을 들기 시작했다.
침실에서 나온 시녀들은 분명 어 젯밤에 황제와 동침한 것이 분명 했다.
물론 마법으로 처리하여 모두가 바라지 않는 아이가 생길 가능성 은 전혀 없었다.
하지만 그렇다 하더라도 무분별 한 황제의 처신은 귀족들 사이에 서 말이 나올 게 분명했다.
대마도사는 밀려오는 두통에 슬 쩍 인상을 찌푸렸다.
'차라리 다른 황비를 빨리 들이 든가 할 것이지.'
파혼을 이유로 새로운 황비 선출 을 계속 미뤄 왔는데,지금 황제 의 모습을 보니 말이 안 되는 이 유였다.
'이번 일을 처리하고 제대로 황 비 문제도 해결해야겠어.'
파혼한 공녀도 곧 죽을 테니 새 로운 황비를 뽑는 데 더는 걸릴 것이 없었다.
대마도사는 속으로 한숨을 내쉰 뒤,황제에게 인사를 하고 응접실 을 빠져나갔다.
응접실 밖에는 마법사 한 명이 그가 나오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의 제자 중 하나로,매를 패밀 리어로 삼은 마법사였다.
황제의 지령을 받은 즉시 매를 날려서 수도 기사단에 연락을 줄
생각으로 데려온 마법사였는데, 아쉽게도 매로 전달할 명령은 처 음과 달라지지 않았다.
다만,대마도사는 황제의 명령에 좀 더 내용을 추가할 생각이었다.
"답신에는 일은 그대로 진행한다 고 하고,습격 쪽 인원에 지원할 마법사는 나라고 알려."
"네? 스승님이 직접 가신다고요?"
놀란 제자가 다시 반문했지만, 그는 제자에게 두 번 말하는 성격 이 아니었다.
'파혼까지 당했는데. 적어도 편한
죽음 정도는 주는 게 좋겠지.' 물론,나름 대마도사에게 이유는 있었지만,제자에게 할 이야기는 아니었다.
대마도사는 말없이 통로를 걸어 갔다.
그 뒤로 그의 제자가 빠르게 걸 음을 옮겼다.
인간이 사는 대수림 서쪽의 태반 을 장악한 제국의 남쪽에는 네 개 의 왕국이 자리 잡고 있었다.
서쪽에는 제국이 있기 전에는 제 일 강대했던 나라였지만,제국에 밀려 쪼그라든 전통과 기사의 나 라,브리티가 자리 잡고 있었다.
그리고 동쪽으로는 남쪽의 대수 림과 맞닿아 있어 호전적인 국가 인 히베루니아가 사방으로 날을 세우고 있었다.
대륙의 남쪽 반도와 섬들은 페카 폴라스라는 해양 왕국이 바다를 누비는 중이었다.
마지막으로,중앙에는 제국과 다 른 세 왕국 간의 교역 무역으로 성장한 상업 왕국 레타니아가 지
금도 계속 배를 불리고 있었다.
루테리아 영지를 출발하고 2주 뒤.
공녀 일행은 바로 산업 왕국 레 타니아의 관문 앞에 도착해 있었다.
일행이 모두 말을 몰고 이동한 덕분에 제국의 동쪽인 루테리아 영지에서 정남쪽에 있는 레타니아 왕국까지 2주 만에 도착할 수 있 었다.
아쉽게도 제국을 가로지르는 동 안 특별한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처음에 만난 음유 시인 정도만이 특별하다 할 수 있었다.
게다가 일정이 빠듯한 관계로, 일행은 중간 영지들을 지나칠 수 밖에 없었다.
그 탓에 연이어진 노숙으로 다들 꼴이 말이 아니었다.
다만,제이크 파티와 제이크 일 행의 도움을 받은 공녀와 앰버 마 법사 정도만이 그럭저럭 괜찮아 보였다.
그 가운데 제이크는 제국을 가로 지르는 동안 계속해서 뒤따라오는 자를 느낄 수 있었다.
바로 처음에 만난 음유 시인이었다.
처음 헤어진 후에 그는 가끔 제이크의 감지 범위 밖으로 나가는 것을 제외하고는 끝까지 그들을 따라왔다.
말을 타고 달린 그들의 속도를 따라온 것에 제이크는 꽤 감탄하 고 있었다.
지금 그들이 서 있는 레타니아 왕국의 관문은 돌로 쌓아 올려 만 든 일종의 요새였다.
오래된 만큼 상당히 낡은 방식이 기는 했지만,지금도 충분히 실용
적이어서 감탄이 절로 나왔다.
교역 무역으로 부를 쌓아 올린 만큼,주변 국가들의 침략도 많이 받았다.
대대적인 침략은 아니었지만,제 국도 왕국을 수없이 많이 공격했 었다.
하지만 그때마다 레타니아 왕국 은 그것들을 모두 감당해 냈다.
그런 역사적인 성문 앞에서 제시카는 입을 비쭉 내밀고 있었다.
"왜 이렇게 기다리게 하는 거야."
일행은 요새 성의 거대한 문 앞
에서 한참 동안 문이 열리기를 기 다리고 있었다.
그들이 문이 열리기를 기다리는 사이에 옆의 작은 문을 통해 등짐 을 가득 진 사람들이 드나들고 있 기는 했다.
하지만 제국의 공무를 가지고 온 그들이 저들처럼 쪽문으로 들어갈 수는 없는 일이었다.
물론,제이크의 전생 때와는 달 리 왕국이나 제국이 국경 전체를 막을 수는 없었기에 관문인 이 엔 제벨룸 성을 꼭 지나지 않아도 왕 국으로 들어갈 수는 있었다.
하지만 이 요새 성을 거치지 않 고는 제대로 된 여행증을 받지 못 했기에,왕국으로 들어오는 제국 인과 다른 왕국인들은 꼭 이곳을 거쳐야 했다.
더구나 공녀 일행은 공적인 일로 온 것이었기에 더욱 이 엔제벨룸 에 들려야 했다.
다행히 제시카의 불만은 오래가 지 않았다.
얼마 지나지 않아 요새의 성문이 열리기 시작한 것이다.
열리는 성문 앞에는 왕국의 관리 와 기사들이 서서 일행을 맞이했
다.
일행을 맞이하는 관리의 모습과 기사들이 입고 있는 갑옷들은 제 국 관리와 기사들의 모습과는 사 뭇 달랐다.
실용적인 면을 중요시하면서도 웅장한 면을 자랑하는 제국의 복 식과는 달리,이 레타니아 왕국의 복식은 무척이나 화려했다.
기사의 갑옷도 여러 무늬를 새겨 놓아 싸움에서 쓰는 물건이 아니 라 예술품으로 보일 정도였다.
"제국의 사절이시군요. 어서 오 십시오. 저희 엔제벨룸에 방문하
신 것을 환영합니다."
앞으로 나선 관리는 마치 장사꾼 처럼 일행에게 인사를 했다.
상업 왕국다운 환영이었지만,일 행은 그의 비위를 맞춰 줄 생각이 추호도 없었다.
왕국 수도까지는 아직 많이 남아 있었고, 더구나 그들은 왕국에 훈 계라는 이름의 협박을 할 제국의 특사였다.
이곳에서 접대를 받느라 낭비할 시간은 없었다.
일행은 여행증을 받고,잡고 늘 어지는 관리를 뿌리친 뒤에 왕국
의 수도로 향하는 여행을 이어 갔다.
제국의 사절로 온 공녀 일행에게 는 한 부대의 왕국 경보병이 호위 겸 감시역으로 따라붙기는 했다.
하지만 다행히 이 경보병들은 길 을 안내하는 일 외에는 일행의 신 경을 그리 건드리지 않았다.
레타니아 왕국은 상업 왕국답게 국도가 잘 정비되어 제국만큼이나 이동하기가 편했다.
중간에 고대의 숲이라 불리는 거 대한 숲과 협곡이 없었다면 오히 려 제국보다 이동이 더 편하다고
느꼈을 것이다.
'정말 대단하군. 왕국까지 쫓아올 줄 예상하지 못했네.'
한편,제국 내에서 일행을 뒤쫓 았던 음유 시인은 아직까지 일행 을 뒤따라오고 있었다.
어떻게 제국의 국경을 넘고 왕국 의 관문을 지났는지 신기할 정도 였다.
그런 음유 시인의 끈기에 제이크 는 그만 감탄을 하고 말았다.
물론 평상시 같았으면 뒤가 간지 러워 처리했었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황제의 명령으로
움직이고 있었다.
변수가 많은 편이 일을 처리하기 에 편할 수도 있다는 생각에,제이크는 음유 시인을 계속 방치하 고 있었다.
더욱이 패밀리어가 분명한 매가 가끔 와서 황제의 기사들에게 지 시를 내리고 있어,멀찌감치 따라 오는 여우족에 신경 쓸 여력이 없었다.
그렇게 호위를 받으며 일주일을 더 달려,일행은 왕국의 수도에 도착할 수 있었다.
수도에서는 따로 검문 절차를 거
치지 않고 바로 안으로 들어갔다.
성문을 통과한 일행은 비워진 왕 국 수도의 중앙대로를 말을 타고 지나갔다. 그들 덕분인지 왕국인 들은 길옆에 밀려나 그들을 지켜 보고 있었다.
그런데 지나가는 일행을 보는 왕 국인들의 시선이 좋지를 못했다.
제시카가 그 모습을 보고 제이크 에게 작은 목소리로 물었다.
"길을 못 쓰게 해서 화가 난 거 야?"
루테리아 영지 안에서 평범한 용 병 생활을 했던 제시카가 제국과
남부 왕국 간의 관계를 제대로 알 리가 없었다.
"그런 것도 있겠지만,그보다는 이어져 내려오는 제국에 대한 분 노겠죠."
물론,제국과의 교역으로 돈을 버는 왕국인들이었지만, 그게 제 국인을 좋아하는 이유가 될 수는 없었다.
더구나,제국의 귀족과 기사들이 분명한 자들을 좋아할 왕국인은 그리 많지가 않았다.
물론 당장 나서서 싸우겠다는 표 정들은 아니었지만,보는 입장에
서는 기분이 좋을 수가 없었다. 설상가상으로,잠시 뒤에 일행을 긴장시키는 일이 벌어졌다.
도로 양 끝에 밀려나 있던 사람 들 속에서 구호가 들려오기 시작 한 것이다.
"제국인들은 물러가라!"
"학살자 기사들은 썩 꺼져라!"
군중들 사이에서 들려온 목소리 에 공녀 일행은 물론,사람들을 막아선 병사들도 놀란 표정이 역 력 했다.
길옆으로 물러나 있던 사람들도 흠칫하는 듯했지만,이내 그들은
곧 분위기에 휩싸이기 시작했다.
"물러가라!"
"물러가라!"
사람들 사이에 구호는 조금씩 더 커졌다.
"서둘러야겠습니다."
그 모습을 보고 선임 기사가 일 행을 다그칠 때였다.
쉬익!
중앙대로 옆집 창문에 일행,정 확히는 공녀를 향해 화살들이 날 아왔다.
"위험해!"
바로 기사들이 달려왔고,앰버가
마법을 펼친 덕분에 화살이 공녀 의 몸에 닿지는 않았다.
하지만.
히이잉!
몸을 던져 공녀를 막아선 기사들 때문에 공녀가 탄 말이 쓰러져 버 렸다.
다행히 공녀는 말에서 뛰어내릴 수 있었지만,일대는 순식간에 난 장판으로 변하고 말았다.
병사들은 사람들을 강제로 해산 시켰고,일부 병사들은 화살이 쏘 아진 집으로 뛰어들었다.
그리고 위기감을 느낀 일행은 바
로 왕궁을 향해 달리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