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3 화
일행은 잠시 뒤 다시 접객실로 돌아왔다.
마지막으로 들어온 제이크는 공 녀를 향해 몰래 손을 흔들었다.
접객실에서 나갈 때 걸어 둔 마
법을 지금 회수한 것이다.
뭔가 대단한 마법이 아니라 마나 를 이용해 심신에 안정을 주는 것 이 불과했지만, 덕분에 공녀는 큰 도움이 된 듯했다.
"휴우,지금에서야 심장이 마구 두근거리네요. 그동안 실감이 안 나서 였을까요?"
물론 마법의 도움이 없어도 충분 히 헤쳐 나갈 수 있었겠지만,뒤 에만 서 있다 오는 것보다 이런 작은 도움을 주는 쪽이 보람이 있 었다.
"정말 대단하셨어요. 처음 같지
않으셨어요."
앰버가 상기된 얼굴로 공녀를 칭 찬했다.
조금 전까지 공녀보다 그녀가 더 긴장하고 있었던 그녀였기에,목 소리도 살짝 높아져 있었다.
"잘하셨습니다."
따로 말이 없던 수도 기사단의 선임 기사도 공녀에게 칭찬을 했다.
하지만 공녀에게 고개를 숙이던 그의 표정은 조금 일그러져 있었다.
어쨌거나 레타니아 왕과의 만남
은 무사히 끝이 났다.
"그럼,이제는 실무 조정만 남은 건가요?"
앰버의 말에 선임 기사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하지만,저쪽에서 잘못을 인정 하지도 않았는데 다음으로 넘어갈 수 있겠습니까?"
그의 질문에 한쪽에 서 있던 제이크가 기억 속에 있던 회의들을 떠올리며 대답했다.
"저 정도 표현이면 충분히 레타 니아 왕이 인정을 했다고 봐도 될 겁니다. 어차피 공식적으로 인정
할 수 없을 테니,저 정도면 실무 에서 판을 깨지는 않을 겁니다."
그의 말이 떨어지자 방안의 시선 은 모두 제이크에게로 향했다.
기사의 표정은 이해할 수 없는 일을 본 듯한 모습이었고,공녀와 앰버는 생각했던 것을 다시 확인 한 듯한 표정이었다.
"제이 씨 말이 맞을 겁니다. 그 런 의미로,실무 협상은 제이 씨 와 앰버가 맡아 주세요."
"네?"
"알겠습니다."
놀란 제이크와는 달리 앰버는 미
리 알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하지만, 앞으로 있을 실무 협상 은 국가 간의 이루어지는 공무였다.
용병인 제이크가 하는 것은 이치 에 맞지 않을뿐더러,레타니아 쪽 에서 항의가 들어올지도 몰랐다.
그런데 공녀의 말에 수도 기사단 의 선임 기사는 반대하지 않았다.
그는 협상보다 다른 고민이 있는 듯이 보였다.
-아무래도 발을 빼지 못하실 것 같은데요.
-이것도 일종의 테스트인건가?
그동안 공녀는 제이크 일행을 자 신의 휘하에 두기 위해 여러 가지 로 일을 맡기고 있었다.
이번에 호위를 맡은 것도 그중 하나로,이제는 제이크 일행도 그 녀의 계획을 어느 정도 알 수 있 을 정도였다.
여성 마나 사용자에 뛰어난 던전 탐사 용병이자 도적인 제시카,그 리고 제대로 된 마나 사용자이자 방패 전사인 루이.
제이크를 제외한 두 명은 이미 자신의 능력을 제대로 펼쳐 보이 고 있었지만,그동안 제이크는 두
사람에 비해 별 활약을 보여 주지 못하고 있었다.
그래서 나름 학식이 있고,귀족 예절에 밝은 제이크의 쓰임새를 확인하기 위해 협상 멤버로 쓸 생 각이었던 것 같았다.
-하지만 주인님도 마법 지팡이 를 쓸 수 있는 마나 사용자(?)이 잖아요.
-뭐,그걸 말한 게 출발한 뒤였 으니까....
출발할 때부터,실무 쪽 문관을 데려오지 않는 것을 이상하게 여 겼는데,아무래도 처음부터 제이
크를 쓸 생각이었던 모양이다.
당연하게도 실무 회의는 앰버가 앞에 나서서 상대방 귀족과 협상 을 벌였고,제이크는 그녀 뒤에서 조언을 해 주었다.
레타니아 왕국에서 나온 사람들 도 꽤 전향적으로 회의에 임했다.
공식적인 인정이나 사과는 하지 않았지만,보상조로 상당히 많은 돈을 지불하기로 한 것이었다.
덕분에 회의는 무난하게 풀려, 다음 날 저녁에는 만찬과 함께 마 지막 파티를 할 수 있게 되었다.
오전에 마지막 회의를 끝내고 오 후에 제이크 일행과 공녀,앰버는 공녀가 지내는 방의 응접실에 모 여 작은 차 모임을 가졌다.
그동안의 일을 제시카와 루이에 게 알려 주는 자리기는 했지만, 회의가 끝나서 홀가분한 시간을 가진다는 의미이기도 했다.
공녀를 모시고 온 레인저들도 모 임에 초청했지만,아쉽게도 레인 저들은 공녀의 요청을 거절했다.
제국으로 돌아갈 준비를 해야 한
다는 핑계를 댔지만,그들의 속내 는 뻔했다.
중립,혹은 그녀의 오빠들에게 줄을 대고 있는 레인저들이 친분 을 다지는 차 모임에 참석할 리가 없었다.
덕분에 차 모임은 루이에게는 재 미가 없는,그리고 여성들에게는 즐거운 모임이 되었다.
아직 홍차 맛을 모르는 루이는 한쪽에 앉아 정자세로 공녀의 말 을 경청하는 중이었고,제시카는 레타니아 산 홍차를 마시며 그동 안의 일을 듣고 있었다.
"그런데 신기하네요. 레타니아의 왕이 이렇게 쉽게 물러나다니."
이야기를 들은 제시카가 이해가 안 된다는 얼굴로 고개를 갸웃거 렸다.
제시카의 말에 루이를 제외한 모 두는 고개를 끄덕여 동의하자,앰 버는 모두가 건드리지 않았던 이 야기를 슬며시 꺼내 들었다.
"그렇죠? 그래도 난 저들이 끝까 지 오리발을 내밀 줄 알았거든요. 정말 저들은 황제의 비밀을 알아 낸 걸까요?"
앰버의 말에 모두 난감한 표정으
로 서로를 바라보았다.
이곳에 있는 모든 사람은 제국인 이었기에 황제의 비밀이 무엇을 가리키는지 모르는 사람은 없었다.
더구나 실제로 황제와 함께 미래 를 보고 온 제이크는 레타니아가 알고 있는 것보다 훨씬 많은 내용 을 알고 있었다.
다만,전지의 황제에 대한 이야 기는 함부로 꺼낼 것이 아니었다.
황제의 권위와 힘 덕분에 제국인 들은 본능적으로 그 이야기를 하 는 것을 주저했다.
앰버도 공녀의 일 때문에 황제에 게 실망하지 않았다면 꺼내지 않 았을 것이었다.
다만,다른 사람들은 여러 가지 이유로 그녀의 말에 대답을 하지 못했다.
그렇게 말이 막혀 분위기가 가라 앉자 제이크가 나서서 화제를 전 환했다.
"루테리아 쪽보다는 오히려 저희 제국의 요구가 너무 무난했습니다. 공식적인 사과도 받지 않고, 책임자의 처벌도 원하지 않으면서 단지 많은 보상만 원하다니. 왕국
쪽에서 충분히 수용할 만한 내용 이었습니다."
제이크의 말처럼,제국이 내건 조건은 그동안의 제국이 보여 준 행동과 너무 다른 내용이었다.
"정말 그게 다일까요? 황제가 원 하는 것이 이런 보상뿐일 리가 없 는데……
황도에서 황제를 보아 온 공녀에 게도 정말 이해가 안 되는 내용이 었다.
그 자기중심적인 황제라면 돈 같 은 것보다는 사과를 듣기를 원할 게 분명했다.
제이크도 그녀와 같은 생각이었다.
물론,그녀가 알던 황제와 미래 를 경험하고 온 지금의 황제는 많 이 달라졌지만, 기본적인 성격은 다르지 않았다.
오히려 좀 더 잔인해지고 음흉해 져서 이전보다도 나빠져 있었다.
그렇게 그들이 제국의 요청을 이 해할 수 없었던 것은 황제의 전쟁 계획을 알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황제는 이번 협상이 어떻게 되든 아무 상관이 없었다.
그에게는 레타니아 왕국으로 떠
난 특사의 죽음만이 필요할 뿐이 었다.
그렇기에 황제의 특명을 받고 온 선임 기사는 협상이 어떻게 진행 되든 관심을 보이지 않고 있었던 것이다.
용병인 제이크가 실무 인원으로 참여를 하든,최대한 보상을 뜯어 내든,별로 관심이 없었다.
기사단 중에서 그만이 황제의 계 획을 조금이나마 알고 있었다.
물론,황제는 그에게 공녀가 죽 게 된다는 것을 직접적으로 알려 주지는 않았다.
그렇다 해도 이리저리 보내온 지 령을 보고 위쪽에서 딴생각이 있 다는 것을 선임 기사인 그가 모를 리가 없었다.
황제에 충성을 맹세한 기사이자 남들이 알지 못하는 일도 몇 번 처리하기도 한 그였다.
하지만 황제 폐하의 사냥개들처 럼 아예 기사도를 저버리지는 않 았다.
때문에 그는,아름다운 전 황태 자비를 위험에 빠뜨릴지도 모른다 는 생각에 홀로 작게나마 죄책감 을 느끼고 있었다.
"그런데 제이는 쓸 만했나요? 말 만 번지르르하지 않았나요?"
"아뇨! 정말 훌륭했어요!"
반쯤 놀리는 제시카의 말에 오히 려 앰버가 정색을 했다.
"정말이에요. 실무에서 정말 오 래 있던 관리 같았다니까요. 왕국 쪽 사람들은 실무 책임자를 제이 로 알고 있을 게 분명해요."
열성적으로 말을 하는 앰버 옆에 서 공녀는 제이크를 유심히 바라 보고 있었다.
이미 앰버에게서 제이크에 대해 들었던 그녀는 그동안 그에 대해
가져왔던 생각을 모두 치워 버렸다.
궁정 예절에 밝은 차를 잘 타는 어린 청년,과거 귀족가의 집사 준비생 정도로 생각했던 그의 모 습은 이번 여행으로 완전히 달라 져 있었다.
어떤 방법인지 마법 아이템을 쓰 는 특이한 마나 사용자가 된 데 다,제대로 된 실무 능력을 가진 관리의 모습을 보여 준 것이다.
아무리 봐도 처음 생각했던 집사 후보생 정도로는 도무지 말이 안 되는 능력이었다.
그래서 공녀와 앰버는 이번 임무 가 끝난 뒤 확실히 제이크의 뒤를 캐 볼 생각이었다.
시간이 걸리겠지만,저런 나이대 의 학식 있는 소년이라면 주위에 서 모를 리가 없었다.
단지 능력이 뛰어나다는 정도에 불과하다면 이렇듯 과거를 캘 생 각까지는 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공녀와 엠버의 예상을 훨 씬 넘어서는 능력을 보여주는 제이크를 끌어들이기 위해서는,그 의 배경을 확실히 알아 볼 필요가
있었다.
잠시의 티 파티 이후 저녁에 이 어진 만찬은 제이크 대신에 수도 기사단의 선임 기사가 공녀를 호 위했다.
좋은 일로 찾아온 것이 아니니만 큼 많은 사람이 모이지는 않았지 만,만찬과 파티는 레타니아 왕국 의 화려함을 제대로 보여 주었다.
커다란 홀에서 이루어진 파티는 화려한 드레스를 입은 귀족의 영
양들이 저마다 아름다움을 뽐내는 자리이기 마련.
하지만 아쉽게도 그들은 뒤늦게 등장한 공녀 앞에서 모두 빛을 바 래고 말았다.
공녀의 옷은 그들처럼 화려하지 도 않았고,그녀의 얼굴은 아름다 웠지만,다른 치장을 한 여성들보 다 훨씬 뛰어나지도 않았다.
하지만, 그녀가 홀 안으로 들어 서는 순간,모든 사람들은 말을 멈추고 그녀를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담담한 표정으로 홀 안으로 들어
서는 그녀의 모습은 바로 그 순간 자신이 이 홀의 주인공이라고 선 언하는 듯했다.
"과연 제국의 황태자비인 것인 가."
그 모습에 홀 안쪽에 앉아 있던 왕이 눈을 빚냈지만,옆에 서 있 는 귀족은 작게 실소를 흘렸다.
"전,황태자비죠. 우리에게는 다 행히도 이번 황제는 저 멋진 여성 을 담을 그릇이 아니라는 것이겠 죠."
"흠,그건 그렇군. 그런데 아쉽 군,황태자비가 되기 전에 알았다
면 국혼이라도 추진해 보는 건 데."
거기까지 두 사람이 말을 나누었 을 때,공녀가 다가와 인사를 했다.
그녀의 우아한 인사에 왕이 만족 한 얼굴로 답례를 했다.
그러고 나서 자리로 돌아간 그녀 는 곧 제국에 줄을 놓기 위한 귀 족들의 인사 세례를 받아야 했다.
"그런데,이번 제국 특사의 목표 가 뭔지 아직도 파악이 안 된 건 가?"
그 모습을 지켜보던 레타니아의
왕 지오르지오는 옆에 서 있는 상 업장관 빈첸초에게 작은 질책을 담아 물었다.
상업장관이라고는 하지만,이 레 타니아에서는 거의 왕 다음의 권 력을 지낸 총리격인 장관이었다.
"죄송합니다. 제국에 있던 정보 통들이 저번 일로 태반이 무너져 내려서 제대로 된 정보를 구할 수 없었습니다."
"그거야 나도 잘 아는 내용이고. 추측이라도 할 수 있잖은가."
"예상보다 제국의 대응이 영 이 상해서 파악이 어렵습니다. 전 황
태자비를 보낸 것도 그렇고, 자신 의 비밀을 숨기려고 하지 않는 모 습도 그렇고,요구 사항도 그리 까다롭지 않고…… 만약 실무자도 형식적이었으면 뭔가 장난질로 여 겨질 정도였지만,그것도 아니라 서."
몇 가지 우연 덕분에 왕국은 제 국의 생각을 제대로 알아차리지 못했다.
"테러 쪽도 제대로 파악을 못 하고. 이번은 자네에게 좀 실망이 야."
더구나 화살로 특사 일행에게 공
격을 가한 자들은 마지막 잡히기 전에 모두 자살을 해 버려,연결 고리를 찾는 데 실패해 버렸다.
"뭐,그래도 이 정도로 마무리된 듯하니,다음 제국에서 말이 나오 기 전에는 우리도 서두르자고. 이 런 정보를 들고 있으면서 시간을 버리게 되면,죽은 밀정들과 선열 들에게 면목이 없어."
이 정도로 제국의 분노를 넘겼다 고 생각한 그들은 이제 확인된 미 래 정보를 가지고 이익을 뽑을 방 법을 고민하기 시작했다.
공녀 일행은 다음 날 약간의 경 호 인력과 함께 왕궁을 떠났다.
아쉽게도 일정이 바빠서 루이의 누나가 있는 신전에는 들릴 수 없 었지만,일행은 멀찌감치 햇빛에 빛나는 신전을 구경할 수는 있었다.
시간이 흘러 일행이 왕국의 수도 에서 멀어지자,그들은 왕이 보내 준 경호 인력과 헤어져 제국으로 향했다.
말이 다쳐 같이 달리지 못한 공 녀를 위해 왕국은 빠른 이두 마차 를 제공해 주었다.
마차는 다재다능하다는 이유로 제이크가 몰게 되었다.
그렇게 며칠을 달린 일행은 레타 니아 왕국에 위치한 고대 숲이라 는 거대한 숲에 도착할 수 있었다.
그리고 그 숲 안에는 지금,
검은 복면의 마나 사용자들과 흰 수염을 길게 늘어뜨린 제국의 대 마도사가 일행을 기다리는 중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