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4 화
레타니아 왕국이 자랑하는 고대 숲에 들어선 일행은 숲을 빠져나 가기 위해 말을 재촉했다.
왕국 북부에 길게 가로로 늘어서 있는 거대한 숲은 예로부터 제국
의 침략을 막아 내기 위한 최후의 방파제로 이름이 높았다.
숲은 무척이나 험했고,숲에서 뿜어져 나오는 마나의 양도 무척 이나 많았다.
물론,대수림이 아니라 대륙 중 앙에 덩그러니 놓여 있는 숲이라 위험해 보이는 몬스터들은 최대한 제거했지만,수시로 생기는 몬스 터를 모두 박멸할 수는 없었다.
더구나 숲의 이름처럼 아직도 숲 에서 간간이 보이는 고대 유물 덕 분에 아직 발견되지 않은 던전이 있다는 소문이 무성했다.
그런 험한 숲이었지만,길게 늘 어진 숲 가운데 몇 군데,사람들 이 지나갈 수 있는 길들이 있었다.
다른 곳보다 숲의 폭이 좁아 빠 른 시간에 통과할 수 있는 곳들이 었다.
다만, 일행이 수도로 향할 때 사 용했던 길은 폭이 좁아 마차를 탄 공녀 때문에 이번에는 사용할 수 없었다.
그래서 일행은 어쩔 수 없이 폭 이 넓은 다른 길을 이용하기로 했다.
"폭이 넓긴 한데,이건 무지 겁 나는 곳인데요?"
흥분한 기색이 역력한 말을 달래 며 루이가 질린 얼굴로 옆을 내려 다보았다.
길 옆쪽으로는 끝이 보이지 않는 낭떠러지가 계속 이어져 있었다.
더구나 반대쪽도 높은 절벽이 위 로 치솟아 있어서 만에 하나의 경 우,다른 곳으로 피할 수도 없었다.
"여길 지나가느니 차라리 공녀님 과 같이 말을 타고 왔던 길로 돌 아가는 게 좋을 뻔했어."
절벽 옆구리에 생겨난 바위 길은 마차 두 대가 지나갈 정도로 무척 이나 넓었지만,제시카 말대로 몇 배는 더 위험해 보였다.
이 끝이 보이지 않는 협곡은 바 로 이 고대 숲의 명물인 바닥이 보이지 않은 거대한 균열,신의 흉터라고 불리는 곳이었다.
물론,전해 오는 이름처럼 무시 무시한 곳은 아니었고,단지 바닥 이 보이지 않는 넓고 긴 협곡일 뿐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바닥이 보이지 않는다는 이유만으로 사람들에게
이야깃거리가 되고 있었다.
만일 공녀의 말이 멀쩡했다면 이 곳으로는 절대로 올 일이 없었을 터다.
하지만 공녀가 말을 타는 것도 탐탁지 않게 여기던 기사들이 공 녀가 다른 여성과 함께 말을 타는 것을 반길 리가 없었다.
불리는 이름처럼 매우 위험해 보 이는 길이었지만 제이크의 판단으 로는 바람도 없었고 길이 넓어서, 말만 흥분하지 않으면 큰 문제는 없어 보였다.
게다가 제이크가 모는 마차의 말
들은 다른 말들과는 다르게 마치 평지를 걷는 것처럼 안정적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제이크가 말에 안정화 마법을 걸어 침착하게 했 던 것이다.
"뭐,말이 얌전하게 가는 걸 보 니까 큰 문제는 없는 것 같네."
말을 타고 달리던 제시카가 마차 를 보며 중얼거렸다.
제이크가 모는 마차는 공녀와 앰 버가 같이 타고 있었다.
앰버의 말은 멀쩡했지만,공녀의 말벗이 되기 위해 앰버가 같이 탄
것이었다.
앰버의 말은 제이크의 말과 함께 루이에 손이 이끌려 뒤를 따라오 고 있었다.
일행의 선두에는 왕국에서 붙여 준 안내자와 함께 수도 기사단의 선임 기사가 나서서 일행을 안내 하고 있었다.
그 뒤에는 수도 기사단이 따르고 있었고,그다음은 공녀가 탄 마차 가,마차 뒤에는 루이와 제시카, 그리고 같이 온 레인저가 뒤를 지 키는 중이었다.
그렇게 길게 늘어서서 절벽 중턱
에 자리 잡은 길로 일행은 계속 앞으로 나아갔다.
모두는 기괴하고 신비로운 협곡 을 보며 감탄을 내뱉었다
하지만 제이크는 마차를 몰다가 신경을 거슬리는 느낌에 인상을 찡그리고 있었다.
-뭔가 걱정이 있으신가 봐요?
제이크의 생각 자체는 알 수 없 었지만,그의 시선과 감각을 공유 하는 덕분에 그의 기분 정도는 파 티마도 알 수 있었다.
-뭔가 자꾸 감각을 건드리는 느 낌이 들어.
-마나 사용자나 몬스터가 느껴 지시는 건가요?
-아니,그런 느낌이 아니야. 안 개처럼 흐릿한 느낌이라. 영 이상 한데.
-흠,그럼 배낭 속에 들어 있는 바보 검이 난리치는 것 아닐까요?
파티마의 말에 제이크가 고개를 흔들었다.
처음 배낭에 던져 넣을 때는 난 리를 치기도 했지만,한참 전부터 에고 검은 조용한 상태였다.
더구나 에고 검이 난리칠 때 느 낌은 지금하고 전혀 달랐었다.
더군다나 그 느낌은 길 앞뒤에서 느껴지는 것이 아니라,수백 미터 는 떨어져 있는 반대편 협곡에서 느껴지고 있었다.
하지만,이쪽 협곡에서 느껴지는 것도 아니니 제이크가 어떻게 할 수 있는 것이 없었다.
다만,협곡을 빠져나갈 때까지 아무 일도 없기를 바랄 뿐이었다.
안타깝게도,제이크의 바람은 얼 마 지나지 않아 깨지고 말았다.
일행이 나아가는 길에 큰 바위 하나가 떡하니 가로막고 있었던 것이다.
마차 크기 정도의 거대한 바위는 협곡 위에서 떨어진 모양이었는 데, 다행히 길 자체는 무너지지 않았다.
하지만,바위 때문에 길을 지나 가기는 쉽지 않아 보였다.
바위 옆에는 말 한 마리만 겨우 지나갈 정도의 틈밖에 없었고,그 마저도 아슬아슬했다.
"모두 경계해!"
보기에는 평범하게 위에서 떨어
진 낙석인 듯했다.
하지만 선임 기사는 규정대로 마 차 주위로 기사들을 배치하고는 앞으로 나서서 바위를 살펴보았다.
그는 바위 앞에 서서 한참을 갈 등하더니 결국 한숨을 내쉬며 마 차를 향해 소리쳤다.
"낙석이 맞습니다. 앰버 마법사 님이 도와주셔야겠습니다! 기사들 로는 무리입니다."
그의 말에 마차 안에서 앰버가 밖으로 나왔다.
그녀의 뒤를 따라 제시카와 루이
도 바위가 있는 곳으로 걸음을 옮 겼다.
제이크 일행은 출발하기 전에 미 리 호위 방식을 정해 놓았었다.
평상시에는 공녀 위주로 호위를 하지만,이렇게 경계 상황에서는 제이크를 제외한 두 사람이 앰버 를 호위하기로 한 것이다.
경계 시에는 기사단 전원이 공녀 를 지키고 있으니 일행 중 하나 (?)밖에 없는 마법사를 방패 전사 와 도적이 지키기로 한 것이었다.
앰버가 기사들을 지나 바위가 있 는 곳에 도착해 보니 그의 말대로
자신이 나서야 되는 일이었다.
앰버는 바위 크기를 확인한 뒤에 뒤를 향해 소리쳤다.
"조금 물러나세요. 파편이 튈지 도 몰라요!"
그녀의 말에 따라 사람들은 모두 조금 뒤로 물러섰고,앰버는 바위 에 손을 올린 채로 마법식을 구축 하기 시작했다.
앰버의 가슴속에 자리 잡은 마나 서클이 앰버가 구축한 마법식을 구현하며 회전했다.
그녀가 가지고 있던 마나가 서클 에서 마법으로 전환되어 그녀의
손을 통해 구현이 되었다.
"파이어 브로큰!"
붉게 물든 손에서 출발한 화염이 바위 전체를 감싸고,곧이어 바위 가 엄청난 소리를 내며 쪼개져 나 가기 시작했다.
쩌쩌쩍!
그리고 잠시 뒤,바위가 커다란 폭음과 함께 터져 나갔다.
대부분의 파편이 사람이 없는 앞 쪽으로 날아가던 중,반대로 날아 간 일부가 뒤에서 대기하고 있던 루이의 방패에 막혀 튕겨졌다.
바위가 날아가 버린 길은 다시
훤하게 뚫려서,그녀가 제대로 성 공한 것이 확실히 보였다.
하지만 일행은 그녀의 마법에 감 탄할 상황이 아니었다.
그녀가 바위를 터트리는 순간, 협곡 반대편에서 더 큰 소리의 폭 음이 울려 퍼진 것이다.
놀란 사람들이 반대편 협곡을 쳐 다보자,그곳에서 엄청난 크기의 화염구가 이쪽 절벽을 향해 날아 오는 중이었다.
방금 터져 버린 바위보다 훨씬 큰 불덩어리는 속도마저도 엄청나 게 빨랐다.
다만,먼저 거대한 마나의 유동 을 감지한 앰버만이 남은 마나로 화염구를 만들어 쏘아 보냈다.
하지만,앰버가 쏘아 보낸 화염 구는 날아오는 거대한 화염구에 그대로 먹혀 버렸다.
반대편 절벽에서 날아온 화염구 는 절벽에 난 길 정도는 그대로 뭉개 버릴 정도의 크기였다.
문제는 그 화염구가 날아오는 방 향. 화염구는 바로 공녀가 탄 마 차를 향해 쏘아지고 있었다.
"안 돼!"
"모두 막아!"
그 모습을 보고 기사들이 소리치 고 레인저가 달려왔지만,그들의 움직임은 너무 늦었다.
더구나 그들이 달려온다고 해도 저 거대한 화염구를 막을 수도 없 어 보였다.
모두 절망적인 표정이 되었을 때,한 남자는 필사적으로 자신이 가진 마법을 현실에 구현하고 있 었다.
분명,날아오는 화염구는 요즘의 마법사인 마법 기술자가 만든 정 형화된 마법이었다.
하지만 마법 기술자가 만든 정형
화된 마법이라고 해도,그 마법을 만든 마나의 크기가 무식하게 크 다면 고대 마법사라고 해도 제어 하기가 불가능했다.
-엄청난 마나양이에요. 말도 안 돼,이런 강한 마법 기술자라니.
파티마가 침음을 흘렸다.
시대가 흘렀으니 마법 기술자들 도 성장을 했을 것은 분명했다.
파티마는 자신이 깨어 있던 시절 의 마법 기술자를 기준으로 이 시 대를 판단한 것이 잘못됐었다는 걸 깨달았다.
더구나,마법 준비에 시간이 걸
리는 고대 마법사와는 달리 마법 기술자는 마법 시전 속도가 엄청 나게 빨랐다.
때문에 제이크는 남들과 거의 동 시에 마법을 알아차리게 되었다.
-좀 전에 주인님이 느낀 이상한 기운이 저 강한 마법 기술자인가 봐요. 너무 강한 마나라 주인님이 이상하게 느낀 모양이에요.
화염구가 날아오는 와중에도 열 심히 상황을 설명하는 파티마.
하지만 제이크는 파티마의 말을 신경 쓸 여력이 없었다.
날아오는 마법을 막을 수 없다고
해도 그대로 보고만 있을 수는 없 는 노릇이었다.
그는 마법의 방향을 바꾸기 위해 필사적으로 새로운 마법을 구성해 나갔다.
"젠장! 열기는 공기를 움직이고, 바람은 물체를 움직인다. 바람아 네가 갈 곳은 저 구덩이 속, 가 라! 토네이도!"
다행히 늦지 않았다.
제이크가 주문을 외움과 동시에 거대한 바람이 불덩이 주위를 휘 감았다.
마치 화염구가 거대한 불기둥으
로 변한 듯한 모습!
하지만 그 불기둥은 금방 흩어져 버리고,원래의 모습으로 되돌아 오고 말았다.
허공에 커다란 회오리바람을 지 속시킬 만한 여력이 제이크에게는 없었다.
하지만 화염구를 없애는 데 완전 히 실패한 것은 아니었다.
마차를 노리던 화염구 방향이 바 뀌었다.
화염구는 원래 날아오던 방향인 마차 쪽을 살짝 비껴 나가,마차 아래쪽 절벽에 직격했다.
과앙!
엄청난 폭음과 함께 절벽 일부가 무너져 내리기 시작했다.
동시에 공녀가 타고 있는 마차와 옆에 있던 기사들이 같이 휩쓸려 버렸다.
쿠구구궁!
그대로 낙석들과 함께 마차와 기 사들이 끝 모를 협곡 아래로 떨어 져 내리기 시작했다.
"안 돼!"
놀란 앰버 마법사의 비명이 절벽 을 울렸고,아래로 뛰어내리려는 루이의 앞을 제시카가 막아섰다.
"비키세요! 아직 살아 있을지도 모릅니다."
"아니! 살아 있어. 그래서 막는 거야. 괜히 따라가려다가는 너만 위험해져!"
제시카가 강하게 말하자 그제야 루이의 정신이 돌아왔다.
그도 제이크가 어떤 존재인지 기 억해 낸 것이다.
하지만, 다른 사람들은 두 사람 과 같은 믿음을 가질 수 없었다.
앰버가 뒤따라 뛰어내리려고 하 는 것을 기사들이 막아섰다.
레인저들은 무너진 절벽 옆에 붙
어 검게 죽은 얼굴로 아래를 내려 다보고 있었다.
"내려가야 해요! 어디 걸렸을지 도 몰라요! 당장 비키지 못해요?! 안 비킨다면 모두 불살라 버릴 거 예요!"
애원하고 소리치는 앰버였지만, 기사들,특히 선임 기사는 철저하 게 그녀를 막아서고 있었다.
"정신 차려요! 빨리 여기서 벗어 나야 합니다! 뒤쪽에서 적이 옴니 다!"
그녀를 막아서며 소리치는 기사 의 말에 모두 자신들이 온 방향을
바라보았다.
멀리 절벽 사이에 난 길을 통해 검은 옷과 복면을 한 자들이 말을 타고 빠른 속도로 일행을 향해 달 려오고 있었다.
이 협곡에서 안정된 모습으로 말을 타는 것이,전부 마나 사용 자로 보였다.
"우선 이 협곡을 빠져나가야 해요. 여기는 적국입니다. 이곳에 있 다가는 모두 전멸하고 말아요!"
앰버는 그의 말에 계속 거부를 했지만,이미 마나를 바닥까지 쓴 그녀로서는 마나 사용자인 기사들
의 힘을 버텨 낼 수가 없었다.
일행은 빠르게 앞으로 달려가기 시작했다.
루이와 제시카도 걱정스러운 표 정으로 무너진 절벽을 바라보았지 만,곧 일행을 따라 앞으로 내달 렸다.
그리고 잠시 뒤,검은 복면의 추 격자들이 반쯤 무너진 절벽을 지 나 일행을 계속 쫓아 달렸다.
그리고 반대편 협곡에서는 제국 의 대마도사 아이힌테일이 혀를 차고 있었다.
"정말 고대 신이라도 있는 건가?
그 타이밍에 회오리바람이라니. 고통 없이 보내 줄려고 했는데 말 이야,쯧쯧."
그는 절레절레 고개를 흔들더니, 뒤에 서 있는 제자를 불렀다.
"난 돌아갈 테니,남은 놈들을 수습해서 따라오거라. 뭐,혹시 모 르니까 최대한 공녀 시체를 찾아 보도록 하고."
"네? 공녀 시체를요?"
"뭐,무리하지 말고 돌아와도 상 관없지만,이왕에 저 협곡 아래쪽 에 뭐가 있는지 알아보는 것도 나 쁘지 않겠지."
그렇게 제자에게 말을 남긴 대마 도사는 하늘로 솟구쳐 제국 방향 으로 날아가기 시작했다.
그리고 대마도사의 제자는 검게 죽은 얼굴로 끝이 보이지 않는 협 곡을 바라보았다.
스승의 괴팍한 성격을 아는 그로 서는 공녀가 탄 마차조각이라도 가져가야 한다는 것을 뼈저리게 잘 알고 있었다.
"맙소사,남의 나라에 와서 지옥 탐험이라니."
하지만,한탄을 하는 마법사 앞 에 있는 거대한 협곡,신의 흉터
는 조용히 자신의 암흑을 내보일 뿐이 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