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6 화
대수림의 숲을 벗어나 벌판을 달 리는 몬스터들의 모습은 흐린 광 원과 달빛으로 더욱 무시무시해 보였다.
하지만,장벽 위의 용병들과 레
인저들은 그 모습을 담담히 지켜 보고 있었다.
"이상하게 빨리 시작된 것치고는 전과 그리 달라지지 않은 것 같은데?"
"아, 제시카 씨는 전에도 경험해 봤겠네요."
"이래 쾌도 용병들 사이에서는 꽤 고참급에 들어갈걸?"
루이의 말에 제시카가 어깨를 으 쏙거리며 잘난 척했다.
주변의 용병들도 그녀의 말에 고 개를 끄덕여 동의해 줬다.
제이크 일행은 공작과 레인저 부
대장 등이 있는 대장벽 중앙의 영 주성 외각 벽에 배치되었다.
아마도 공녀와 앰버의 입김 때문 인 듯했지만,다른 용병이나 레인 저 중에 의아하게 생각하는 사람 은 없었다.
그동안의 활약으로 제이크 파티 의 실력을 의심하는 사람은 많지 않았다.
가끔 그들이 누군지 몰라 의아하 게 생각하는 사람도 있었지만,주 변에서 '여왕벌 파티'라고 하면 바로 이해했다.
"시간대가 밤이라서 그렇지,쏟
아져 나오는 숫자는 그리 다르지 않아."
"숫자가 장난이 아닌데요?"
루이의 말대로,어두운 벌판을 달려오는 몬스터들의 숫자는 한눈 에 봐도 수백이 넘어 보였다.
"처음에는 대수림 외각에 사는 약한 놈들이니까,숫자가 많아도 별문제 없지. 장벽 위로 올라오는 놈도 없을걸?"
"맞아,중반까지야 사냥에 가깝 지. 뭐. 최대한 체력을 유지하는 게 더 중요할 판이니까."
제시카의 설명 뒤에 근처에 있던
용병이 말을 이었다.
"용병 등록한 지가 1년도 안 되 었는데 벌써 여기서 만나는군. 대 단해,용병 사무소에 다니면서 본 용병 중에 제일 빠른 것 같아."
말을 꺼냈던 용병은 알고 보니 용병 사무소에서 제이크의 시험을 감독한 알렌이었다.
"알렌도 여기예요?"
"그래,용병 사무소에서 일한 죄 지. 장벽 곳곳에 배치된 용병 놈 들 관리에,영주님 지시를 전달하 는 역할인 거지,뭐."
알렌의 말에 제이크가 의아한 표
정을 지었다.
"그럼 후방에 있어야 하지 않나요?"
"장벽 아래에는 따로 일하는 애 들이 있고,우리야 몸으로 때우는 일이니까. 영주님도 직접 나서셨 는데 우리가 어떻게 후방에 가 있 을 수 있겠어?"
그러고 보니 참모라던 남작 빼고 는 영주와 공녀,그리고 영주의 사병까지 모두 장벽 위로 올라와 있었다.
'역시 루테리아인가.'
모든 영지민이 몬스터와의 싸움
에 한몫을 거둔다는 영지였다.
황도나, 전생에서 보던 자신의 안위를 위해 뒤로 숨는 사람은 이 곳에는 전혀 보이지 않았다.
"뭐,상인 놈들 몇몇하고 황도에 서 온 귀족들 몇은 냉큼 튀어 버 린 것 같지만."
아니, 거의 보이지 않았다.
그렇게 잠시 잡담을 하는 사이에 몬스터들이 장벽 앞으로 가깝게 다가왔다.
용병들이 걸어서 한 시간 이상 걸리는 거리를 십여 분만에 주파 해 버린 것이다.
이제 몬스터들의 생김새를 마나 사용자라면 모두 구별할 수 있을 정도로 거리가 좁혀졌다.
상당한 크기의 붉은 늑대와 몇 미터나 되는 여섯 발 도마뱀,거 기다 마치 벌판 위를 나는 것처럼 보이는 사람 크기의 날다람쥐.
대수림을 오가면서 대수림 입구 에서 가끔 보았던 몬스터들이 함 께 장벽을 향해 달려오고 있었다.
"정말 신기하네요. 어떻게 서로 다른 몬스터들이 서로 싸우지 않 고 섞여서 오다니."
제시카의 말에 어느 정도 안심을
한 제이크가 꺼낸 말은 그의 예상 과 달리 모두를 놀라게 만들었다.
"그러네 이번 웨이브는 뭔가 다 른데"
"그게 무슨 소리야!"
"정말이야? 이런 적은 없었는 데."
놀란 제시카가 난간을 향해 달려 갔고,난간 가까이 있던 알렌이 실눈을 뜨고 아래를 보다 놀라 외 쳤다.
다른 사람들도 아래를 내려다보 게 되었고 소란은 장벽위로 퍼져 나갔다.
"몬스터 웨이브 때는 원래 그런 것 아니었나요?"
"한꺼번에 몰려오기는 했지만, 이렇게 섞여 오는 경우는 없었어. 먹이가 없어져서 쏟아져 내려온 거라 자기 무리끼리 확실히 뭉쳐 있었어!"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지만,이 미 벌어진 일은 어쩔 수 없었다.
"좀 더 까다로워진 것 같기는 하 지만,그래도 크게 달라진 것은 아니지 않나요?"
거기다 담담히 말을 하는 제이크 로 인해 제시카는 금방 흥분을 가
라앉힐 수 있었다.
그리고 공작 쪽에서 유효적절하 게 공격 신호가 나왔다.
앰버와 같이 있던 마법사 하나가 하늘을 향해 붉은색의 광원을 띄 워 올린 것이다.
아직 사거리 안에 완전히 들어온 것은 아니었지만,더 혼란이 커지 기 전에 공격을 명한 것으로 보였다.
그걸 본 알렌이 크게 소리를 외 쳤다.
"모두 사격! 목표는 다가오는 몬 스터들이다!"
이 주위 용병들을 알렌이 담당하 는 모양이었다.
알렌의 말에 용병들이 가지고 있 던 활과 쇠뇌로 장벽 아래를 향해 화살을 쏘았다.
횃불과 마법 광원의 빛 속에서 화살들이 지상을 향해 쏟아져 내 렸다.
마치 전생의 영화에서 보던 화살 의 비였다.
모두 싸움에 일가견이 있는 용병 들과 레인저들이 쏜 화살은 수십 미터가 넘는 장벽의 높이로 더욱 더 빨라져,달려오는 몬스터들을
강타했다.
콰과과과곽!
캬아아아악!
크아아악!
화살이 몬스터들에게 박히는 소 리가 들리고,지상에 피보라가 퍼 져 나왔다.
맨 앞에서 달려오던 몬스터들이 한순간에 무너져 내렸다.
족히 수십 마리는 쓰러진 것 같 았다.
하지만 다음 순간,무너져 내린 몬스터들은 뒤의 몬스터에 묻혀 보이지 않았다.
다만,화살의 비도 아직 끝나지 않았다.
그 뒤로 이어진 화살 공격은 계 속해서 몬스터들을 쓰러뜨렸다.
처음 집중 사격과 달리 한두 발 의 화살로는 쓰러지지 않는 몬스 터들이었지만,영지 쪽에도 마나 사용자들이 있으니 문제는 없었다.
기사급 레인저들과 큰 용병대에 한두 명씩 있는 마나 사용자들, 그리고 제시카와 루이까지.
마나 사용자들이 쓴 화살들은 사 람 이상의 힘을 싣고 있었다.
그리고 그 한 발 한 발은 몬스터 들을 쓰러뜨려 나갔다.
거기다 마나 사용자가 아니면서 도 마나 사용자 이상으로 몬스터 를 학살하는 사람이 있었다.
"자동 장전 모드. 장전 대상은 뒤쪽의 화살 더미. 장전 속도는 0.2 초."
제이크는 게임 시스템을 설정하 는 것처럼 마법을 들고 있는 쇠뇌 에 걸어,성벽 아래로 화살을 쏘 아 보내기 시작했다.
파파파파파!
화살이 꼬리를 문 채로 성벽 아
래로 쏟아져 내렸다.
마치 기관총처럼 쏟아지는 화살 은 달려오는 몬스터들을 뚫고 지 나갔다.
그리고 순식간에 제이크 일행이 담당하던 장벽 앞을 쓸어 버렸다.
"뭐야! 마법 아이템인가?"
"엑,마법사라며!"
좀 전에 스스로 앰버와 같은 학 파 소속의 마법사라고 해 놓고, 마나 사용자만 사용하는 마법 쇠 뇌를 쓰다니!
"마법사용 마법 아이템입니다." 하지만,제이크는 뻔뻔하게 뻥을
쳤다.
사실 고대 마법사는 쇠뇌나 칼 같은 육체를 사용하는 마법 아이 템을 좋아하지 않았다.
마법 이외에는 비천하게 보는 마 법사 특유의 기질과 실제로 귀족 이상의 특권을 누려 온 그들이다.
때문에 육체를 사용하는 마법 아 이템은 모두 마나 사용자를 위한 것만 만들어 놓았던 것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공격용 마법 아 이템들은 마나 사용자만 사용할 수 있다고 알고 있었고,실제로도 그랬다.
하지만,스스로가 고대 마법사이 면서도 그들 특유의 교만함이 없 었던 제이크는 마법 아이템을 사 용하는 데 거리낄 것이 없었다.
[빨리 제대로 마법사인 걸 알릴 수 있어야 해요. 그러지 않으면 저 사람들은 마법사가 뭘 할 수 있는지 제대로 알지도 못하면서 맘대로 판단한다니까요?]
다만,그런 잘난 체를 하는 에고 아이템을 가지고 있을 뿐이었다.
그렇게 제이크가 있는 장벽 앞이 나 공작과 레인저 정예가 있는 장 벽 쪽은 무난히 몬스터를 처리하
고 있었지만,모든 장벽이 그런 것은 아니었다.
"이놈들,숫자가 줄어들지를 않 아요!"
"젠장,일반 화살만으로는 무리 예요!"
마나 사용자가 없거나 적은 곳에 서 벌써 장벽 위로 슬슬 기어오르 는 놈들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특히 몸에 피막이 달린 거대 도 마뱀은 마치 벽을 타고 미끄러지 듯이 위로 올라오고 있었다.
"젠장! 별수 없다! 화공을 해!"
"첫날인데 괜찮겠어요?"
"뚫리는 것보다는 나아!"
바로 뒤에 쌓아 놓은 드럼통이 난간으로 빠르게 옮겨졌다.
뒤이어 드럼통에 들어 있던 기름 이 성 밖으로 부어졌다.
그리고 곧바로 불화살과 횃불이 연속적으로 쏟아져 내렸다.
벽을 타고 올라오던 몬스터들이 비명을 지르며 아래로 추락했다.
몬스터들이 불타는 모습에 용병 들이 환호성을 질렀다.
그런데,그 모습을 보고 눈살을 찌푸리는 사람이 있었다.
"저쪽은 어느 용병대가 담당하고
있지?"
"골드바 용병대입니다."
공작이 눈살을 한 번 찌푸리고 질문을 던졌을 뿐이었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도 주변에 있 는 사람들은 모두 그 용병대의 앞 날에 어둠이 가득 끼게 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한 영지의 영주는 왕과 같은 힘 이 있는데,이 루테리아를 다스리 는 공작에게 잘못 보였으니 말이다.
"다른 곳들은 그럭저럭 막아 내 는군."
"네,전하고 다른 모습이라 걱정 했는데 예상 범위 내에서 처리가 가능할 듯합니다."
"아직 첫날일 뿐이니 긴장을 풀 지 말고."
"알겠습니다."
공작의 말은 무척이나 타당한 말 이었다.
레인저 선임 부대장은 가슴에 손 을 올려 공작의 지시에 대답을 했다.
"그런데 레이첼,네 가신들은 예 상보다 더 잘하는 것 같구나."
몬스터들이 장벽에 발도 못 붙이
고 있는 제이크 쪽 장벽을 보고서 공작이 칭찬했다.
"동료입니다."
하지만,만족스러웠던 그의 표정 은 공녀의 대답에 굳어지고 말았다.
두 번째로 들은 '동료'라는 말의 뜻을 정확하게 듣고자 공녀에게 물으려고 하던 공작은 그보다 먼 저 검을 뽑아야 했다.
츄악!
다른 사람보다 머리 하나는 더 큰 덩치의 공작이었지만,검을 뽑 는 동작은 무척이나 빠르고 부드
러웠다.
기사급인 레이저 부대장들도 그 를 눈치채지 못했고,마법사인 앰 버는 아예 공작에게 무슨 일이 벌 어진지도 몰랐다.
단지 공녀만이 공작의 움직임에 반응했다.
공작은 검을 뽑으며 뒤쪽 하늘로 크게 휘둘렀다.
서걱!
공작의 검은 잔상도 남기지 않을 정도로 빠르게 하늘을 가르고 지 나갔다.
빈 하늘에서는 피의 무지개가 붉
게 피어올랐다.
그리고 피 무지개가 채 퍼지기 전에,허공에서 검은 표범이 모습 을 드러냈다.
"은신 표범!"
가슴이 반으로 갈라진 거대한 표 범이 그대로 바닥에 떨어졌다.
공작 주변에 서 있던 레인저들은 급하게 주변을 경계했다.
그 순간,장벽 곳곳에서 병사들 의 몸이 찢겨 나가기 시작했다.
모두 어둠에 몸을 숨긴 표범 몬 스터에게 공격을 받은 것이다.
"모두 경계해라! 은신 표범이 성
벽 위로 올라왔다!"
부대장들이 사방으로 소리를 질 렸지만,이미 늦었다.
"놈들이 먹잇감 사이에 숨어서 성벽 위로 올라온 건가."
"이전보다 더 까다로워진 것 같 습니다."
"그렇군,예상보다 더 귀찮아지 겠어. 어둠 속에서는 이 녀석들을 찾기가 쉽지 않을 텐데."
"부대장들을 보내서 상대하도록 하겠습니다."
"벌써 움직이기는 아쉬운데…… 어쩔 수 없지."
공작이 혀를 차며 승낙을 할 때 였다.
검을 들고 주변을 살피던 공녀가 둘의 대화에 끼어들었다.
"레인저를 안 보내도 될 것 같습 니다."
"무슨 소리지?"
"제 '동료'가 마법을 준비 중입니다."
공녀가 검을 들어 장벽 한쪽을 가리켰다.
그곳에는 루이와 제시카의 보호 를 받으며 주문을 외우고 있는 제이크가 있었다.